(아처) 10월 2일

작성자  
   achor ( Hit: 6941 Vote: 46 )
홈페이지      http://achor.new21.net
분류      fiction


『칼사사 게시판』 34403번
 제  목:(아처) 10월 2일                                 
 올린이:achor   (권아처  )    99/09/23 14:30    읽음: 57 관련자료 있음(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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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할 수 있겠어? 그 년 꼭 꼬셔서 여관까지 가야해."

        명섭은 무슨 원통한 일이  있었는지 내게 신신당부를 하였
      다. 말투에서 이미 짙은 원한이 전해져왔다.

        "그래. 노력해 보지. 그런데 누군데 그래?"

        입술을 질끈  물며 명섭은 분이 아직도  안 풀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명섭은 전날 밤 친구들과 어느 허름한 동네 술집에서 술을 
      마셨는데 그  중 한 친구의 친구란  자격으로 몇몇 여자들이 
      합석을 했나보다. 그들의 대화는 이런저런 얘기 끝에 명섭이 
      공익근무를 하고 있다는 데에까지  이르게 됐는데 그 얘기를 
      들은 한 여자가 명섭에게 물었다는 게다.

        "공익근무? 혹시 그럼 너 권아처 알아?"

        명섭은 신병 시절부터 툭 하면  함께 술을 마셨던 내 동기
      였다. 땅딸만한 키에 지극히 흉측한 얼굴이었지만 꽤 괜찮은 
      아이였다. 물론 여자를 상당히  밝히는 편이었고, 또 후까시 
      잡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던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의 최
      대의 장점, 의리.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그의 모든 단점을 
      보충할 수 있었다.

        "물론이지. 나랑 아주 친한 동기인걸. 아처 알아?"
        "응."

        그런데 명섭이 나를 열 받게 한 건 그녀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은 채로 그렇게  간략한 사항과 10월 2일에 약속
      을 잡아놨으니 만나서 꼭 여관까지 가달라는 요구만 한 데에 
      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물어봐도 모른다고 했고, 그녀가 나를 어떻
      게 아느냐고 물어봐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그
      녀가 날 만나고 싶어한다는 얘기를 힘들게 말해줬을 뿐이다.

        명섭은 평소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무슨 이야기든지 특별
      히 숨길만한 이유가 있거나 아님 잘 모르는 이야기가 아니면 
      괜히 무언가 있다는 듯이  무게 잡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
      니 더욱 이상했던 게다. 나와 그녀와의 관계, 그녀와 명섭과
      의 관계. 그녀는 누구일까, 또  명섭은 그녀와 무슨 일이 있
      었던 걸까?

        어쨌든 아주 심각하게 말해오는 명섭에게 난 그르겠노라고 
      말해주었고 그 날만큼은  하루종일 궁금해했으면서도 며칠이 
      지나자 10월 2일의 약속마저도 희미해져 갔다.







        2.

        9월이 지나 갈색빛  가을이 짙어질 무렵 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명섭이었다.

        "잊지 않았지? 이번 주 토요일이야. 구청 앞에서 2시에 만
      나기로 했어. 늦지마."

        아차. 명섭과 이름 모를 그녀를 만나기로 했었지.
        명섭은 당연히 내가 나와야  한다는 듯이 시간과 장소만을 
      말해주곤 전화를 끊었다. 다시 말해 그날 여자친구와 동물원
      에 가야하는 약속이 있다는 내  말을 전해줄 틈도 없이 전화
      를 끊어버렸다는 이야기. 여자친구와 내가 함께 속해있는 동
      아리에서는 10월, 맑은 동물원을 찾기로 했었다.

        난감해 졌다. 선약을  따지자면 명섭과의 약속이 우선이겠
      지만 가을, 미술관 옆 동물원, 그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
      는 풍경 속에 한 번쯤 흠뻑 빠지고 싶은 낭만은 내게도 있었
      다.

        우유부단함이 문제는 아니었다.  정말 문제는 그다지 계획
      적이지 못한 내 나태함에 있던 게다. 줄곧 생각하다 굳이 내
      가 없어도 여러 사람들이 함께 갈 동물원을 포기한다.

        "미안. 나 동물원 못 갈 것 같아. 즐겁게 놀다 와."

        어쩐지 평화로운 느낌이 나는  미술관 옆 동물원이 아쉬워
      졌다. 그렇지만 그녀에 대한  궁금증은 깊었다. 아마도 초등
      학교 정도의 동창이 아닐까,  우리 집 근처에 사는 여자라면 
      그런 관계밖에 없을 텐데...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는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3.

        비가 올 듯 흐린  날이었다. 하늘이 온통 먹구름으로 덮여 
      있는 게 우산 없이 나온 우리에게 다소 근심이 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안 나오지? 2시 약속 맞지?"
        "응."
        "벌써 30분이나 지났잖아. 전화라도 한 번 해보지 그래?"
        "아니야. 그러고 싶지 않아."
        명섭은 평소답지 않게 조용했다. 그는 마치 부모님의 원수
      를 갚기 위해 20년 간 무예를 닦아 오다 드디어 원수의 집에 
      들어서는 듯한 진지한  표정이었다. 덕분에 소개팅 비스무리
      한 상황에서 한창 기대감과  희망으로 들떠 있어야할 나까지
      도 별 느낌 없이 차분하기만 했다.

        "저기 온다."
        명섭은 짧게 말하며, 길 건너편을 눈으로 가리켰다.

        길 건너편에는 회색빛 정장을 입은 한 여자가 우리를 바라
      보며 서 있었다. 키는 168cm가량 되어 보였고, 아주 마른 편
      이었다. 그리고  스물 셋이란 나이보다는 좀더  성숙해 보였
      다. 아마도 짙은 화장 속의 섹시한 이미지 때문일 거라고 난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을 봐도 아는 사람 같지 않았다. 내 기
      억 속에 그런 여자는  없었다. 특히나 그렇게 괜찮은 여자임
      에도 내가 잊었다는 건 일단 말이 안 되었다.

        "안녕, 아처."
        그녀는 마치 나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가볍게 말 놓으며 
      인사를 해왔다. 어, 반가워, 나 역시 인사를 하며 그녀가 누
      구인지 끊임없이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우리는 잠시 그 거리에 서 있게 됐는데 원칙상 이럴 땐 주
      선자가 어떻게 하자며 분위기를 유도해야겠지만 명섭은 그녀
      가 나타난 이후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
      다. 처음부터 가볍게 나불대는  건 전략상 안 좋겠지만 내가 
      나서야만 했다.

        "우리 어디 갈까?  아직 2시 반밖에 안  되어서 마땅히 갈 
      곳이 안 떠오르네. 좋은 데 없어?"
        "있어. 그런데 명섭, 넌 안 가?"

        그녀는 정말 냉정했다.  그래도 자리를 만들어준 주선자인
      데 차 한 잔이라도 함께 마시는 게 일반적 관습이 아니던가. 
      그녀와 명섭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건 조금은 너무한 처사라
      고 생각했다.

        명섭은 잠잖고 뒤돌아 걸어갔다. 그녀도 나도 명섭을 잡진 
      않았다. 나야 명섭과 함께  있는 것보다는 그녀와 단둘이 있
      는 게 더욱 좋았지만 그녀만큼 냉정한 편은 아니었다. 차 한 
      잔 정도야 같이 마실 각오는 되어있었는데... 그렇지만 명섭
      을 잡는다는 건 그녀에  대한 거부의 표현밖에 되지 못했다. 
      단둘이 있고 싶다는 여자의 호의를 거부하는 건 색마의 도리
      가 아니라고 스승 야혼에게서  누누이 배워온 바. 내가 명섭
      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바램대로, 반드시 그녀와 자
      는 것뿐. 끙.

        "자, 나를 따라 와."
        그녀의 말투에선 어색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무엇 때문인
      지 처음부터 나를 휘어잡고자 하는 힘이 느껴졌다. 뭐, 어쨌
      든 좋다. 마음껏 잡아주렴.

        그녀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MUFFIN,이라는 커피숍이었다. 
      회색빛 바탕 위에  하얀 색 글자가 오늘 같이  흐린 날과 딱 
      맞는 느낌을 받았다.

        MUFFIN에는 Eagles의 Desperado가  흐르고 있었다. 그곳은 
      온통 무채색의 공간이었다. 모던한 느낌이 나는 회색빛 테이
      블도, 끝없이 솟아있는 고압적인 하얀 벽과 천장도, 또 자그
      마한 검정색 전화기도, 모두 화려한 밤거리의 색채를 거부한 
      채  조용히 은둔하고자  하는 것만  같았다. 오직  단 하나, 
      MUFFIN에 존재하는 유일한 유채색은  참 순수해 보였던 종업
      원의 얼굴뿐이었다.

        "무얼 드시겠어요?"

        난 따스한 코코아를 시켰고, 그녀는 XYZ,라는 칵테일을 시
      켰다. 종업원은 가을에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표정으로 예,
      라고 가볍게 말했다. 그 순수한 모습과 내 앞에 앉아있는 섹
      시함과는 꽤나 대조적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할게. 나 너 모르겠어."
        큰 잘못을  저지르고 부모님 앞에서  멈칫거리며 자백하는 
      아이처럼 난 그렇게  그녀에게 미안해했다. 누군가를 기억하
      지 못하는 게 죄는 아니겠지만 미안해할 만한 가치는 있다.

        "당연해. 넌 날  알 수가 없을 거야.  그리고 앞으로도 날 
      알 수 없어."
        여전히 도도한 말투였다. 이거 공주 아냐? 내 공주에 대한 
      심각할 정도의  반감은 내 자만심에 기인했다.  여물지 못한 
      이삭 주제에,라는 자만심은 일절의 공주도 용서치 못했다.

        일단 난 그녀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나, 네 이름도 모른다. 이름이 뭐야?"
        "......"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묻는다.
        "나 알고 있었다며? 우리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바보 같은 질문이란 생각을  하며 내뱉어봤지만 그녀는 여
      전히 침묵이 미덕이란 신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좋아. 그럼 명섭과 넌  무슨 사이야? 예전에 무슨 일이라
      도 있었던 거야?"

        내 계속되는  질문에 그녀는 더이상  침묵하지 못하겠던지 
      드디어 한 마디 전해준다.
        "나에 대해 알려하지마. 너,  고작해야 나랑 자고 싶은 거 
      아냐? 한 번 자고 말 건데 굳이 알 필요까지 있겠어?"

        그녀의 냉정한  목소리는 완전히 내 정곡을  찔렀다. 내심 
      뜨끔하며 변명을 늘어놓는다.
        "네가 솔직하게  말해오니까 나도 솔직하게  말할게. 사실 
      처음엔 그런 생각 없던 건 아닌데 지금은 달라졌어. 너랑 자
      고도 싶지만 널 알고도 싶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한 번 
      대강 관계를 맺고는 잊어버리기엔 많은 아쉬움이 남을 것 같
      았다.

        그녀의 반응은 가벼운 웃음이었다.  훗, 하며 웃는 모습이 
      날 비웃는 것 같았다. 너희 남자들이야 다 그런 거짓말은 서
      너개씩 준비해 놓지 않아?, 하며 날 비웃고 있는 듯 했다.

        "넌 그저 내가 이끄는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돼. 네가 선택
      할 건 하나도 없어. 명섭도 마찬가지였고."



        4.

        이제야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는 파멸이었다.

        그.녀.는.파.멸.이.다.

        그녀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난 그
      녀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를 알았기에, 그녀에 대한 내 모
      든 기억은 파멸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파멸을 부른다.
        파멸은 폭을 부른다.
        그리고 폭은 집착을 부른다.

        그녀를 한 번 알게 되면 그녀가 내게 싫증날 때까지 난 그
      녀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그녀가 지닌 운명의 힘
      이었다. 운명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라도 언젠가 한 번은 파멸을 만난
      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끊임없이 빠져들었다가 얼마간
      의 시간이 흐르면 흔적도 없이 기억에서 사라지는 파멸.

        사랑이 파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제한적이고 유한적인 사랑, 그것은 파멸이다. 혹 그
      것은 파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쓸쓸
      한 사랑의 그리움을, 그  아쉬움을 느껴보지 못한 자라고 단
      정지어 본다.

        PostMinJu시대의 유일한 대안, TTL을 위하여...











        Epilog.

        아무 생각없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대로  자판을 퉁겼는데 
      어느새 이렇게 길어져 버렸다. 쓰고 나서 다시 한 번 읽어보
      니 여전히 오컬티즘적인  냄새가 느껴졌다. 오컬티즘은 모더
      니즘과는 상반된다고 하던데... 그러고 보면 이 세상에 이데
      올로기나 주의주장은 속담만큼 많기에  무슨 짓을 하든 현학
      적인 사람들의 입에 의하여  어떻게든 규정지어질 수밖에 없
      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매사 대충대충 살아가는 게 제일
      이겠거니 생각해 본다.

        PostMinJu시대의 유일한 대안, TTL을 위하여...
        사랑은 야,야,야...
                                                            98-9220340 권아처
# 1999. 9. 23 02:15

        대강 써 놓은 게 며칠 된 이야기인데
        처음부터 아무 생각 없이 현재와 미래 사이의 생각이기에
        중간 완성을 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시간이 더 주어진다 하더라도
        잘 완성시킬 자신이 없어
        그냥 올려놓는다.

        결국 그 아이의 이름을 듣긴 했는데,
        정말 누군지는 모르겠다.
        10월 2일,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98-9220340 권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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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2/26/2009 00:56:26
Last Modified: 08/23/2021 11:4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