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사사 게시판』 34403번
제 목:(아처) 10월 2일
올린이:achor (권아처 ) 99/09/23 14:30 읽음: 57 관련자료 있음(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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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할 수 있겠어? 그 년 꼭 꼬셔서 여관까지 가야해."
명섭은 무슨 원통한 일이 있었는지 내게 신신당부를 하였
다. 말투에서 이미 짙은 원한이 전해져왔다.
"그래. 노력해 보지. 그런데 누군데 그래?"
입술을 질끈 물며 명섭은 분이 아직도 안 풀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명섭은 전날 밤 친구들과 어느 허름한 동네 술집에서 술을
마셨는데 그 중 한 친구의 친구란 자격으로 몇몇 여자들이
합석을 했나보다. 그들의 대화는 이런저런 얘기 끝에 명섭이
공익근무를 하고 있다는 데에까지 이르게 됐는데 그 얘기를
들은 한 여자가 명섭에게 물었다는 게다.
"공익근무? 혹시 그럼 너 권아처 알아?"
명섭은 신병 시절부터 툭 하면 함께 술을 마셨던 내 동기
였다. 땅딸만한 키에 지극히 흉측한 얼굴이었지만 꽤 괜찮은
아이였다. 물론 여자를 상당히 밝히는 편이었고, 또 후까시
잡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던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의 최
대의 장점, 의리.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그의 모든 단점을
보충할 수 있었다.
"물론이지. 나랑 아주 친한 동기인걸. 아처 알아?"
"응."
그런데 명섭이 나를 열 받게 한 건 그녀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은 채로 그렇게 간략한 사항과 10월 2일에 약속
을 잡아놨으니 만나서 꼭 여관까지 가달라는 요구만 한 데에
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물어봐도 모른다고 했고, 그녀가 나를 어떻
게 아느냐고 물어봐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그
녀가 날 만나고 싶어한다는 얘기를 힘들게 말해줬을 뿐이다.
명섭은 평소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무슨 이야기든지 특별
히 숨길만한 이유가 있거나 아님 잘 모르는 이야기가 아니면
괜히 무언가 있다는 듯이 무게 잡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
니 더욱 이상했던 게다. 나와 그녀와의 관계, 그녀와 명섭과
의 관계. 그녀는 누구일까, 또 명섭은 그녀와 무슨 일이 있
었던 걸까?
어쨌든 아주 심각하게 말해오는 명섭에게 난 그르겠노라고
말해주었고 그 날만큼은 하루종일 궁금해했으면서도 며칠이
지나자 10월 2일의 약속마저도 희미해져 갔다.
2.
9월이 지나 갈색빛 가을이 짙어질 무렵 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명섭이었다.
"잊지 않았지? 이번 주 토요일이야. 구청 앞에서 2시에 만
나기로 했어. 늦지마."
아차. 명섭과 이름 모를 그녀를 만나기로 했었지.
명섭은 당연히 내가 나와야 한다는 듯이 시간과 장소만을
말해주곤 전화를 끊었다. 다시 말해 그날 여자친구와 동물원
에 가야하는 약속이 있다는 내 말을 전해줄 틈도 없이 전화
를 끊어버렸다는 이야기. 여자친구와 내가 함께 속해있는 동
아리에서는 10월, 맑은 동물원을 찾기로 했었다.
난감해 졌다. 선약을 따지자면 명섭과의 약속이 우선이겠
지만 가을, 미술관 옆 동물원, 그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
는 풍경 속에 한 번쯤 흠뻑 빠지고 싶은 낭만은 내게도 있었
다.
우유부단함이 문제는 아니었다. 정말 문제는 그다지 계획
적이지 못한 내 나태함에 있던 게다. 줄곧 생각하다 굳이 내
가 없어도 여러 사람들이 함께 갈 동물원을 포기한다.
"미안. 나 동물원 못 갈 것 같아. 즐겁게 놀다 와."
어쩐지 평화로운 느낌이 나는 미술관 옆 동물원이 아쉬워
졌다. 그렇지만 그녀에 대한 궁금증은 깊었다. 아마도 초등
학교 정도의 동창이 아닐까, 우리 집 근처에 사는 여자라면
그런 관계밖에 없을 텐데...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는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3.
비가 올 듯 흐린 날이었다. 하늘이 온통 먹구름으로 덮여
있는 게 우산 없이 나온 우리에게 다소 근심이 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안 나오지? 2시 약속 맞지?"
"응."
"벌써 30분이나 지났잖아. 전화라도 한 번 해보지 그래?"
"아니야. 그러고 싶지 않아."
명섭은 평소답지 않게 조용했다. 그는 마치 부모님의 원수
를 갚기 위해 20년 간 무예를 닦아 오다 드디어 원수의 집에
들어서는 듯한 진지한 표정이었다. 덕분에 소개팅 비스무리
한 상황에서 한창 기대감과 희망으로 들떠 있어야할 나까지
도 별 느낌 없이 차분하기만 했다.
"저기 온다."
명섭은 짧게 말하며, 길 건너편을 눈으로 가리켰다.
길 건너편에는 회색빛 정장을 입은 한 여자가 우리를 바라
보며 서 있었다. 키는 168cm가량 되어 보였고, 아주 마른 편
이었다. 그리고 스물 셋이란 나이보다는 좀더 성숙해 보였
다. 아마도 짙은 화장 속의 섹시한 이미지 때문일 거라고 난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을 봐도 아는 사람 같지 않았다. 내 기
억 속에 그런 여자는 없었다. 특히나 그렇게 괜찮은 여자임
에도 내가 잊었다는 건 일단 말이 안 되었다.
"안녕, 아처."
그녀는 마치 나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가볍게 말 놓으며
인사를 해왔다. 어, 반가워, 나 역시 인사를 하며 그녀가 누
구인지 끊임없이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우리는 잠시 그 거리에 서 있게 됐는데 원칙상 이럴 땐 주
선자가 어떻게 하자며 분위기를 유도해야겠지만 명섭은 그녀
가 나타난 이후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
다. 처음부터 가볍게 나불대는 건 전략상 안 좋겠지만 내가
나서야만 했다.
"우리 어디 갈까? 아직 2시 반밖에 안 되어서 마땅히 갈
곳이 안 떠오르네. 좋은 데 없어?"
"있어. 그런데 명섭, 넌 안 가?"
그녀는 정말 냉정했다. 그래도 자리를 만들어준 주선자인
데 차 한 잔이라도 함께 마시는 게 일반적 관습이 아니던가.
그녀와 명섭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건 조금은 너무한 처사라
고 생각했다.
명섭은 잠잖고 뒤돌아 걸어갔다. 그녀도 나도 명섭을 잡진
않았다. 나야 명섭과 함께 있는 것보다는 그녀와 단둘이 있
는 게 더욱 좋았지만 그녀만큼 냉정한 편은 아니었다. 차 한
잔 정도야 같이 마실 각오는 되어있었는데... 그렇지만 명섭
을 잡는다는 건 그녀에 대한 거부의 표현밖에 되지 못했다.
단둘이 있고 싶다는 여자의 호의를 거부하는 건 색마의 도리
가 아니라고 스승 야혼에게서 누누이 배워온 바. 내가 명섭
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바램대로, 반드시 그녀와 자
는 것뿐. 끙.
"자, 나를 따라 와."
그녀의 말투에선 어색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무엇 때문인
지 처음부터 나를 휘어잡고자 하는 힘이 느껴졌다. 뭐, 어쨌
든 좋다. 마음껏 잡아주렴.
그녀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MUFFIN,이라는 커피숍이었다.
회색빛 바탕 위에 하얀 색 글자가 오늘 같이 흐린 날과 딱
맞는 느낌을 받았다.
MUFFIN에는 Eagles의 Desperado가 흐르고 있었다. 그곳은
온통 무채색의 공간이었다. 모던한 느낌이 나는 회색빛 테이
블도, 끝없이 솟아있는 고압적인 하얀 벽과 천장도, 또 자그
마한 검정색 전화기도, 모두 화려한 밤거리의 색채를 거부한
채 조용히 은둔하고자 하는 것만 같았다. 오직 단 하나,
MUFFIN에 존재하는 유일한 유채색은 참 순수해 보였던 종업
원의 얼굴뿐이었다.
"무얼 드시겠어요?"
난 따스한 코코아를 시켰고, 그녀는 XYZ,라는 칵테일을 시
켰다. 종업원은 가을에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표정으로 예,
라고 가볍게 말했다. 그 순수한 모습과 내 앞에 앉아있는 섹
시함과는 꽤나 대조적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할게. 나 너 모르겠어."
큰 잘못을 저지르고 부모님 앞에서 멈칫거리며 자백하는
아이처럼 난 그렇게 그녀에게 미안해했다. 누군가를 기억하
지 못하는 게 죄는 아니겠지만 미안해할 만한 가치는 있다.
"당연해. 넌 날 알 수가 없을 거야. 그리고 앞으로도 날
알 수 없어."
여전히 도도한 말투였다. 이거 공주 아냐? 내 공주에 대한
심각할 정도의 반감은 내 자만심에 기인했다. 여물지 못한
이삭 주제에,라는 자만심은 일절의 공주도 용서치 못했다.
일단 난 그녀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나, 네 이름도 모른다. 이름이 뭐야?"
"......"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묻는다.
"나 알고 있었다며? 우리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바보 같은 질문이란 생각을 하며 내뱉어봤지만 그녀는 여
전히 침묵이 미덕이란 신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좋아. 그럼 명섭과 넌 무슨 사이야? 예전에 무슨 일이라
도 있었던 거야?"
내 계속되는 질문에 그녀는 더이상 침묵하지 못하겠던지
드디어 한 마디 전해준다.
"나에 대해 알려하지마. 너, 고작해야 나랑 자고 싶은 거
아냐? 한 번 자고 말 건데 굳이 알 필요까지 있겠어?"
그녀의 냉정한 목소리는 완전히 내 정곡을 찔렀다. 내심
뜨끔하며 변명을 늘어놓는다.
"네가 솔직하게 말해오니까 나도 솔직하게 말할게. 사실
처음엔 그런 생각 없던 건 아닌데 지금은 달라졌어. 너랑 자
고도 싶지만 널 알고도 싶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한 번
대강 관계를 맺고는 잊어버리기엔 많은 아쉬움이 남을 것 같
았다.
그녀의 반응은 가벼운 웃음이었다. 훗, 하며 웃는 모습이
날 비웃는 것 같았다. 너희 남자들이야 다 그런 거짓말은 서
너개씩 준비해 놓지 않아?, 하며 날 비웃고 있는 듯 했다.
"넌 그저 내가 이끄는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돼. 네가 선택
할 건 하나도 없어. 명섭도 마찬가지였고."
4.
이제야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는 파멸이었다.
그.녀.는.파.멸.이.다.
그녀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난 그
녀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를 알았기에, 그녀에 대한 내 모
든 기억은 파멸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파멸을 부른다.
파멸은 폭을 부른다.
그리고 폭은 집착을 부른다.
그녀를 한 번 알게 되면 그녀가 내게 싫증날 때까지 난 그
녀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그녀가 지닌 운명의 힘
이었다. 운명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라도 언젠가 한 번은 파멸을 만난
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끊임없이 빠져들었다가 얼마간
의 시간이 흐르면 흔적도 없이 기억에서 사라지는 파멸.
사랑이 파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제한적이고 유한적인 사랑, 그것은 파멸이다. 혹 그
것은 파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쓸쓸
한 사랑의 그리움을, 그 아쉬움을 느껴보지 못한 자라고 단
정지어 본다.
PostMinJu시대의 유일한 대안, TTL을 위하여...
Epilog.
아무 생각없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대로 자판을 퉁겼는데
어느새 이렇게 길어져 버렸다. 쓰고 나서 다시 한 번 읽어보
니 여전히 오컬티즘적인 냄새가 느껴졌다. 오컬티즘은 모더
니즘과는 상반된다고 하던데... 그러고 보면 이 세상에 이데
올로기나 주의주장은 속담만큼 많기에 무슨 짓을 하든 현학
적인 사람들의 입에 의하여 어떻게든 규정지어질 수밖에 없
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매사 대충대충 살아가는 게 제일
이겠거니 생각해 본다.
PostMinJu시대의 유일한 대안, TTL을 위하여...
사랑은 야,야,야...
98-9220340 권아처
# 1999. 9. 23 02:15
대강 써 놓은 게 며칠 된 이야기인데
처음부터 아무 생각 없이 현재와 미래 사이의 생각이기에
중간 완성을 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시간이 더 주어진다 하더라도
잘 완성시킬 자신이 없어
그냥 올려놓는다.
결국 그 아이의 이름을 듣긴 했는데,
정말 누군지는 모르겠다.
10월 2일,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98-9220340 권아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