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전위

작성자  
   achor ( Hit: 4868 Vote: 21 )
홈페이지      http://achor.new21.net
분류      fiction


『칼사사 게시판』 26363번
 제  목:(아처) 전위                                   
 올린이:achor   (권아처  )    97/12/11 23:35    읽음: 37 관련자료 있음(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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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새벽 2시, 언제나 그렇듯이 잦은 늦은 수면으로 인해 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하루키만 읽어서 그런지 더 이상 하루키는 읽고 싶지 않았다.
똑같은 식의 주제로 매번 쫓기만 하는 그에게서 지쳐
난 어느새 조용히 흘러나오는 Saxophone 소리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 문득 내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났던 게다.
그 초등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 보고 싶어졌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첫사랑을 만나 보고 싶어졌다.

[1] 男













     1

잘 정제된 Saxophone으로 연주되는 '제비(La Golondorina)'가 흘러나오는 
무척이나 까만 밤이었다. 침대 옆 창가로 보이는 밤하늘에는 오염된 대기 
때문인지 별 하나  볼 수 없었고, 난 침대에 조용히  누워 커피를 마시며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난 그런 버릇이 있었다. 잠자기 전에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버릇. 덕
분에 늦잠은 내게서 떼어 낼 수 없는,  하얀 벽에 딱 달라붙어 있는 껌과
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특별히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할 이유도 없
기에 내 이 버릇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덕분에 난 3류 연애물
이든, 추리소설이든 평균보다는 높은 독서를 할 수 있었고.

오늘은 이상하게도 책이 읽혀지지 않았다. 평소 Pantera 따위의 Metal 음
악을 듣다가 오늘따라  분위기 있는 Saxophone 연주가  듣고 싶어진 것도 
그렇고, 왠지 커피도 블랙으로 마시고 싶어진 것도 그렇고. 얼마 전 헤어
진 경옥 때문인가?

조금 열어 놓은 창문 틈 사이로 겨울바람이 들어오고 있었기에 난 이불을 
꼭 덮곤 책읽기를 포기한 채 반듯이 누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었
다. 저녁에 먹은  피자가 내 머리로 들어가 마구 뒤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어디서 나타난 바퀴벌레가 내  뇌 속에서 끊임없이 알을 낳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특별히 딱 떠오르는 생각 없이 막연한 여러 잡념들이 이
리저리 섞여 나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러고 보면 분위기는 충분했다.  그 누군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감상적이 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잔잔한 음악에 세상은 온통 까맣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그대 앞에 놓여 있다면. 난  분위기에 이끌려 지난 
첫사랑을 기억하게 됐다. 이 첫사랑의 힘은 얼마나 대단하던지 그 혼란덩
어리였던 내 머리 속을 마치  거대한 핵폭탄으로 평정이라도 하듯이 완벽
하게 그 첫사랑에 대한 생각만으로 만들어 버렸다.

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좋아했으면서도 좋아한다는 표현 한 번 
못한 채 그 아이의 곁에서 아무 관심 없는 척 했던, 그 시절의 추억들.








     2

그 아이와 난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아직은 논이 있고, 밭이 있던 그런 
조그만 마을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난 그 아이를 초등학교 5학년 때 처
음 보았고, 옆 반이었던 그 아이는 첫눈에 나를 빠져들어 버리게 했다.

그 아이는 '걸스카우트'에 속해 있었다. 4학년  때 이미 뽑아 버린 그 스
카우트 모임에 들기 위해 난 부모님과 선생님께 조르기 시작했다.

"제발 저도 보이스카우트에 껴 주세요.  전 정말이지 모험이란 걸 좋아한
단 말이에요. 많은 친구들과 함께 모험을 해 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현진아! 이미 작년에 신청자들을 모두 접수했는걸."
선생님은 이렇게 변명했다. 그렇지만 나  역시 쉽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 아이가 거기 있었기에...
"늦었지만 열심히 할게요. 선생님께서도  '하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이지, 
언제 시작했느냐의 시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셨잖아요."
"그건..." 선생님께서는 잠시 생각을  하시는 듯 하더니 고개를 갸우뚱하
시면서 "그럼 다른 선생님들과 의논해 보지."라고 결론 내리셨다.
더 이상 조르는 것도 무리일 것  같아서 난 알겠다고 하고는 자리를 일어
났다.

그렇게 난 뒤늦게 보이스카우트가 된 게다.

우리는 종종 함께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럴  때면 난 항상 그 아이 근처
에서 얼쩡대곤 했는데 가까운 친구들은 물론이고, 그 아이조차도 내가 그 
아이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소심한 편이었거나  내성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단지 사랑
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었다. 그렇게 곁에서 바라만 보는 것, 그 
시절에는 그것만으로도 난 행복했던 게다.

함께 여행을 할 때면 어김없이 텐트  속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는데 그 어
린 시절에도 성적인 본능 때문인지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 모두 걸스카우
트가 있는 텐트 속으로 침입할 기회를 엿보곤 했다.

나 역시 그 음모에 빠지지 않는 개구쟁이였는데 그럴 때면 난 항상 그 아
이의 텐트를 침입할  생각을 했다. 낮에 텐트를 칠 때  그 아이가 어디에 
있는 지 확인한 후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말해서 
난 그 아이의 텐트를 침입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막상 그 아이의 텐트
까지 어렵게 지도 선생님의 눈을  피해 도착했더라도 들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겠다. 다만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정도다.

그렇게 안면을 조금 익힌 5학년이 지나갔고, 나도, 그 아이도 6학년이 되
었다. 개학 첫 날 조용히 앞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난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6학년 6반, 여기는 틀림없이 내가 지정 받은 새로운 학급
이었다. 그런데 이 곳에 그 아이가 앉아 있던 것이었다.

'이건 하늘에 주신 기회다!' 난  그날부터 하느님을 믿기로 결심했다. 물
론 그 아이가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첫 대화는 6학년이 시작된 지 3일만에 이루어졌다. 생일순으로 번
호를 매겼던 우리 반에서 난  남자 19번이었고, 그 아이는 20번이었던 게
다. 그런데 자연 시간에 실험조를 남자 2명, 여자 2명씩 짜면서 남자 19, 
20번과 여자 19, 20번이 같은 조가 된 것이었다. '아! 신이셔! 진정 그대
를 믿고 따르겠나이다!'

"안녕" 난 가볍게 그 아이의 눈을 보면서 인사를 했다.
"어. 안녕" 그 아이도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내 인사를 받았고, "난 지현
이야. 김지현. 잘 부탁해." 이렇게 내게 소개까지 해 주었다. "넌 현진이
지? 출석 부를 때 봤어."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그건 내 어린  시절 몇 안 되는 결코 잊을 수 없
는 기쁨들 중에 한가지였다. '그 아이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 이 평범한 
사실이 그 시절의 내겐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실험 같은 조와 같은 당번이 되어 더욱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시절만큼은 정말 그 누구보다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
고.

즐거움의 시간은 실로  짧기만 했다. 어느새 우리는  이별을 해야만 했으
니... 난 근처의 남자 중학교에 가게  됐고, 그 아이는 여자 중학교로 가
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갈라진 후부터 난 신을 믿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 아이와 지나친 적이 단 한 번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헤어진 
지 3년쯤 되는 어느 여름  오후에 난 중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그 사이에 우리는 서로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 단 한마디의 
말도 건네지 못했다.  그 3년이라는 시간동안 적어도 난  그 아이를 줄곧 
생각했지만 연락 한  번 못했고, 또 너무나  급작스런 지나침이었기에 난 
당황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3

"아~ 현진! 아~ 아! 너 정말 대단해! 아아아~"

지금 내 배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여자는 틀림없는 지현이다. 그녀가 그 
동안 나 아닌 그 어떤 남자와 잤건 그건 상관없다. 적어도 지금 순간만큼
은 내 여자이고, 나로 인해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는 게다. 그녀의 유두는 
이미 검붉어 져서 그녀가 얼마나  많은 남성들과 관계를 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질의 조임도 벌써  느슨한 편이었지만 역시 
그 어떤 것도 상관없다.

난 그녀에게 내 동정을 주었다.  그녀는 내가 어린 시절 느꼈던 모습과는 
너무도 많이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난 그 새로운 모습에 더욱 끌리
게 되고 말았다.

그녀의 변한 모습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전위'였다. 그녀는 마치 세상의 
모든 통념을 깰 듯 항상 급진적이었고, 그녀의 행동 곳곳에는 '반발'이란 
딱지가 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사회에 대한 반발,  고정관념에 대한 반
발, 그리고 선입관에 대한 반발.

그녀는 음악과  술, 그리고 섹스를 좋아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항상 'Cherry Pink'란 칵테일  바에 갔다고 했고, 언제나 마티니를 마
셨고, 또 언제나 Sex Pistols의  음악을 신청했다고 한다. 분위기에 어울
리든, 어울리지 않든. 또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그녀에게 접근했던 
남자들은 모두 그날 밤은 그녀와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고도 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는 창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그로 인
해 어떠한 금전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녀
는 단지 섹스를 즐길 뿐이었다. 다시 말해 마치 그녀가 음악과 술을 좋아
했듯이 단지 섹스를 좋아한 것이었다. 다만 섹스란 것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왜 그녀가  자위에서 만족을 찾지 못했는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다. 모든 걸 혼자 하기엔 너무나도 외로웠던 것일까?

지현과 나는 함께 살고 있다.  그렇다고 결혼한 것은 아니고 '동거'란 걸 
하고 있는 게다. 우리의 생활은  재미있기만 하다. 그녀는 너무나도 전위
적이어서 결코 사회의 일반적인 관습을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덕분에 내 
요리 솜씨가 늘었긴 했지만...

우리의 생활을 간단하게 말해 보자면,  우리는 모두 13시쯤 일어난다. 그
리곤 간단하게 함께 샤워를 하고,(아침  샤워만큼 시원한 게 없다는 것을 
난 지현과 동거한 이후 알게 되었다) 적당한 요릿집에 아침(일반적으로는 
점심이겠지만)을 주문한다. 그리곤 맛있게 함께  식사를 한 후 각자의 일
을 하게 된다.  난 글을 쓰고, 지현은 그림을 그리고.  저녁은 하고 싶은 
사람이 하게 되어 있다. 내가 하고  싶으면 내가 요리를 하고, 지현이 하
고 싶으면 지현이  하고. 물론 둘 다 하기 싫다면  역시 주문을 하고, 둘 
다 하고 싶다면  함께 요리를 한다. 극히 운이 좋아서  서로 요리를 하고 
싶었던 날이면, (푸식~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항상  즐거운 저녁 요리 
시간이 되곤 한다. 그렇지만 특별히  그 즐거움을 위해 저녁 요리를 하려 
하지는 우리 둘 다 않는다. 그것은 코를 삼켜 버린 콧구멍과 같기 때문이
다. 저녁을 먹고는 2-3시간동안 함께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또 대화를 
한다. 이 시간은 우리가 섹스를 나눌 때만큼이나 소중한 시간이다. '우리
가 함께 살아가고 있구나'를 가장 실감나게 해 주는 시간이니 말이다. 그
리곤 밤이 되면  우리는 격정적인 섹스를 한 후 잠이  들고, 그렇게 다시 
하루는 시작된다.

주말엔 빨래나 청소를 위한 시간이 특별히 배려된다. 그렇지만 보통 빨래
는 모두 빨래방에 맡기는 편이고, 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 서로 대충 하
고 싶은 만큼만 한다. (물론 하기 싫은 경우라면 결코 하지 않는다)

우리의 생활은 이렇다. 물론 그 동안의 내 삶은 지현의 삶과 너무도 달랐
었다. 그렇지만 난 어느새 지현의  삶에 동화되고 말았고, 이제는 상당히 
편리한 방법임을 느끼고 있다. 무엇에도  전혀 얽매이려 하지 않는다. 최
대한 실현시키려는 자유! 그것이 지현 삶의 테마이다. 그 테마는 역시 섹
스에도 적용되어 때때로 지현은 나 이외의 여러 남자친구와 자고 오곤 한
다. 나 역시 그럴 수 있지만 난 아직 지현 외의 여자친구는 없다.





     4

삶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전 왜 이 세상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요?

어린 시절부터 전 항상 그랬습니다.
삶의 의미를 생각할 때면 결론은 항상 자살로 매듭지어지곤 했죠.

제 전부였습니다.
제 영혼이었고, 제 육체였고, 제 환경이었고, 제 자신이었죠.
전 어느새 그렇게 너무나도 깊게 익숙해 져 버렸나 봅니다.

익숙해 진 것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군요.
전 미처 몰랐습니다.
이렇게 슬프고, 가슴이 매이는 일이었다니...

제 자신을 잃어버린 이 세상은 제게 더 이상 어떤 의미도 주고 있지 않습니다.
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이렇게 흐느적거리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삶이겠습니까?

이렇게 전 이별을 말합니다.
그녀처럼 아무 말 없이 떠나가기엔 제 가슴이 너무 여리군요.

그럼... 다음 세상에서의 만남을 기약하면서...

ps. 지현! 널 영원히 사랑해.

                                       하얀새가 푸른하늘로 날아가는 날, 용현진
[2] 女













     1

그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내가 그를 본  지 정확히 내 시력 곱하기 내 음
모의 수만큼의 날이 흐른 뒤였다.  물론 난 그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의 
연락이라니! 그건 너무 의외였다. 그 땅땅만한 페니스를 갖고 있던 그 아
이로부터의 전화라니... 나 원 참!

아, 먼저 말해 두겠는데 내 입은  정화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나를 비난
할 사람이라면 당장 여기서 읽는 것을 그만  두는 편이 좋을 게다. 내 입 
못지 않게 성질 또한 정화되어  있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 나이가 어리다
거나 혹은 심신이 부자연스럽다거나... 그 따위 것들로 읽지 못하게 막을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
은 사람의 자유 의지일 뿐이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말이다.

난 Sex Pistols를 좋아한다. 난  때때로 그들이 1973년에 자주 가곤 했던 
그 부띠끄 'SEX'를 상상하곤 한다. Newyork Dolls의 매니저였던 Malcom과 
Vivian이 운영했던 그 옷가게.  너무 화려하여 세상사람들이 경멸하고 있
을 때 내가  뛰어가서 그 옷들을 모두 품는 상상을  하곤 한다. 1973년의 
일을 말이다.

그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도 난 Anarchy  In The Uk를 들으며  그 부띠끄 
SEX를 상상하고 있었다. 막 빨간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가슴이 완전히 드
러나는 미스스커트 원피스를 잡으려는 찰라 전화벨이 울린 것이었다.

"뭐야?" 내 전화 받기는 항상 이런 식이다.
"예?" 새끼 놀라긴!
"뭐냐고!"
"저...기... 거...기..." 그는  내 의외의 반응에 깜짝  놀랬나 보다. 후
훗. 그 귀여운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니까.
"나 지현이거든. 넌 누군데?"
"아... 지현이 맞구나.  깜짝 놀랐어. 휴우." 그렇게 우선  숨을 돌린 후 
그는 말을 이었다. "나 현진이야. 초등학교 동창말야. 나 기억할 수 있겠
어?"

용현진이라니! 이건 정말 깨는 일이었다.  하필이면 이 오후의 여유를 즐
기고 있을 때 초등학교 동창으로부터의 전화란 말인가! 난 초등학교 동창
들은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시절의 난 내가 아니었기 때
문이다. 부모님과 선생님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조각된 내 모습을 조금이
라도 생각하게 된다면  난 내 부끄러움에 온몸을 칼로  그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물론 내가 현진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괜찮은 평을 받았고,  또 학업이나 운동에서도 뛰어났으며 무엇
보다도 내게 잘 대해 주었다. 조금 틱틱거리기는 했지만...

"이번 주말 시간 좀 내줄 수 있겠니?" 현진이 물어 왔다.
"글쎄...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한 번 만나 보고 싶어서." 현진의 부끄러워하고 있을 모습을 
생각했다. 쿡!
"그래. 그럼 토요일에 대학로에 있는 'SPIXX'로 6시까지 나와."

난 가볍게 약속을 한 후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어차피 삶은 만남의 
연속인데 그 누구를 만나는 그리 차이나는 건 없다.

그렇게 토요일이 되었고, 난 지난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현진에게 확
실히 변해 버린, 아니 다시 찾은 내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11월에 조금 추운 감도 들었지만  난 검정색 미니스커트에 하얀색 탱크탑
을 걸친 후 검정색 쟈켓을  덧입었다. 자극적인 보랏빛이 섞인 붉은 루즈
를 바른 후  파란색 아이섀도로 조금 화장을 한다면  현진이가 내 변화를 
알아채겠지.

난 30분 일찍  도착했다. 물론 특별히 할 일이 없던  것이 그 이유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남자가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 난 내가 먼저 기다리고,  내가 먼저 일어나고 싶은 것뿐이었다. 뭐 
나쁜 일은 아닐 테니... 또 설사 조금 나쁜 일이면 어때...

6시가 되기 10분  전쯤 현진이가 카페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특별히 부분  하나하나가 잘 생긴 건 아니었지만 대강 
모아 놓으면 그런대로  구조가 맞는, 굳이 욕하고 싶지는  않은 얼굴, 그 
초등학생 시절의 모습 그대로였다.

난 가볍게 손을  들어 현진에게 표시했고, 현진이가 날 처음  봤을 때 그 
웃음 속에서도 굳어진 얼굴이란... 결코 웃음을 참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참 오랜만이네." 내가 먼저 말을 건넸고 현진이 받았다.
"응. 그 동안 잘 지냈어? 길거리에서 봤으면 몰라보겠는걸."
내가 가볍게 웃는 동안 주문을  받으러 종업원이 왔기에 홍차 2잔을 시켰
다. 무표정한 그 종업원의 얼굴과  검정색 바지가 교차되어 내 눈을 스쳐 
지나갔다.

"예전보다 많이 섹시해 졌는걸."
"너도 예전보다 더 멋있어 진 것 같아." 뭐 거짓말은 아니니.

그렇게 우리는 지난 시절을 얘기했다. 그리 말이 잘 통할 것 같지는 않았
는데 의외로 대화가 됐다. 나와  대화가 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기에 
난 많은 얘기를 해줬다. 대화가 안 되는 사람과 앉아 있는 것만큼 고통스
러운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면 가벼운 웃음을 유발하는 소리들만 
해주면서 그들의 웃음을 난 속으로  비웃어 주곤 한다. '그래. 니들은 그
렇게 가볍게 살아가라.' 난 거만한 존재이다.

우리는 'SARA TOGA'라는 분위기 있는 술집으로 2차를 갔다. 난 말이 통하
는 사람을 만나면 함께 술을 마시며 얘기를 하고 싶어진다. 그럴 때면 난 
행복감을 느끼곤 하는데, 다만 문제가 있다면 나와 얘기가 통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 난  갑자기 정종이 마시고 싶어졌다. 종업원은 정
종은 준비가 안 됐다고 했기에(그  어느 술집에 정종을 준비해 놓는단 말
인가!) 난 직접  정종을 한 병 사 왔다. 현진은  조금 놀랐다는 반응이었
고. 마시고 싶은 술을 마시는 게 뭐 어떻단 말인가!

내 기억으로도 현진은 그리 우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약삭빠른 사람 
역시 아니었고. 항상 웃은 얼굴로  친구들을 대해 줘서 인기가 좋은 편이
었는데 꽤 개구쟁이였던  탓에 때론 나와 티격태격할 때도  있었던 것 같
다. 무슨 일 때문에 그랬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BRAHMS의 Allegro  non troppo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술이 조금 취해서 
그런지 난 그 음악이 듣기  역겨워졌다. 그래서 'China Town'이란 분위기 
있는 중국요릿집으로 3차를 갔다. 완벽하기  위해서는 그 사소한 무엇 하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는 안된다.

함께 대학로 거리를 거닐면서 China  Town으로 이동할 때 난 슬며시 현진
의 팔에 팔짱을 꼈다. 현진은 술이  조금 취했는지 별 반응이 없었고, 나 
또한 그냥 그러고 싶었기에 별다른 의식이 들지는 않았다.

원체 내가 술을 좋아했던 탓에  내 주량은 그리 적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주량이 쌘 탓도  있지만 매일 운동을 통해 근육을  강화시키듯이 난 매일 
술을 마심으로써 내 주량을 강화시켜 왔다.

China Town에서 '竹葉淸酒'와 '百歲酒'를  마시고 있을 무렵 현진은 술이 
취했는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뭐 나도 머리가 도는 느낌이 나는 
정도니 현진은 당연하겠지. 맹세코 난 태어나서 그 누구에게도 술을 함께 
마셔 먼저 뻗은 적은 없었다.

벌써 시간은 자정 무렵이었고, 난 계산을 한 후 현진을 데리고 택시를 타
고 우리 집으로 왔다. 침대에 누워 잠든 현진을 보고 있으니 괜찮다는 느
낌이 들었고, 강간을 하고 싶어졌다.
     2

"지현아! 우리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뭐 할까?"  현진은 설거지를 하면서 
내게 물어 왔다.
"글쎄...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난 고궁에 가보고 싶어. 우리 같이 고궁에나 가자."
'크리스마스에 고궁이라니... 얘가 나랑 같이 살더니 더 전위적으로 변했
다니까.'
"난 겨울에 밖에 나가는 거 별로야. 추워."
"앗! 왜? 내가 따뜻하게 안아주면 되잖아."
"그래도!" 내가 거부를 하려 하자 현진은 슬며시 다가와 나를 안았다.
"내가 이렇게  따뜻하게 해 준다니까." 현진은  내 귀에 대고 속삭이면서 
슬며시 나를 안고 침실로 갔다.
"아무리 그래도 추운 건  딱 질색이야." 난 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곁에 남자가 있으면 난 즐겁다.

현진은 나를 침대에 눕히더니  내 입에 부드럽게 키스를 해왔다. 나도 부
드럽게 그의 입술을 맞이하여 우리의 혀가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있을 때 
현진의 손은 내 티셔츠 안으로 침입하여 내 가슴을 농락하고 있었다.

"아..."
내 짧은 탄성이 그를  더욱 자극시켰는지 그는 조금 거칠어졌다. 나 역시 
흥분되어 그의 셔츠를 벗기고 있었다. 난 몸을 돌려 그를 침대에 눕힌 후 
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곤 그의 허리띠를 풀른 후 바지와 팬티를 벗겼다. 
그의 페니스는 크게  발기해 있었다. 난 입으로 부드럽게 애무해 주었고, 
애무가 끝나자 이번엔 그가 내 옷을 벗긴 후  내 음부를 애무해 줌으로써 
보답했다. 그리곤 우리는 몸을 합쳤다. 그의 굵직한 페니스가 내 질에 들
어왔을 때 난 그 누구의 것보다도 행복해 지곤 했다. 물론 크기나 테크닉
면을 따지자면 호겸이나  선웅정도가 훨씬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는 누구보다도 충실했기 때문이다. 

12월 11일, 크리스마스는  아직 십여일이나 더 남았는데 어느새 거리에서
는 벌써부터 캐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걷는 연
인들 사이에는 추위도 느껴지지 않을 것 같이 보였다.

그 때 난 갑자기 겨울바다가 보고 싶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난 떠났다. 12월 23일에. 현진이 그렇게 나와 지낼 계획을 세우던 
크리스마스를 이틀 남겨 두고 말이다. 난 내가 하고픈 일이 있으면 그 무
엇에도 구애받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 때는  그것이 영원한 안녕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
다.

언젠가는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3

내가 현진의 자살 소식을 접한 것은 현진이 죽고 난 뒤 며칠 뒤의 일이었
다. 어떻게 내 위치를 알았는지 경찰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현진이 죽었다
는 소식을 알려줬다.

난 그리 놀라지 않았다. 모두들 언젠가는 죽기 마련인 것이다. 현진의 굳
어 버린 얼굴을 보고도, 또  서해바다에 그의 뼛가루가 뿌려지는 것을 보
고도 난 울지 않았다.

아직 내겐 남은 운명이 있다. 그래서 난 그냥 개의치 않고 살아가기로 결
심했다. 뭐 인생은 그런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말이다.


<에필로그>

이크...
11월말에 할 일이 없어서 끄적이고 있었는데 지금에서야 대충 마무리 지으려 한다.
무엇이든 매듭지어 놓는 일이 좋으니 말이다.

내 첫사랑 지현이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푸하~ ^^
그런 전위적인 여자가 내 앞에 나타나 나를 한순간에 사로잡아 줬으면 좋겠다.

행복한 사랑의 포로여... *^^*


                                                                        건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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