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후기란 제목을 붙였지만 그 사건들을 쉽사리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쇼킹(shocking)하기에 조금은 침묵 하도록 하겠고... --;
차후를 위함과 제출을 위해 느낌이나 몇 자 적어 보고자 한다~
5일 오후 12시 15분 부산행 무궁화호를 타고
나는 부산으로 향했다.
미리 성훈에게 연락을 하고 떠났어야 했는데
너무 시간이 촉박하여 미쳐 할 수 없었고,
결국 부산에 도착해서 서로 헤매게 되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5시간동안의 입석 기차에서 내가 정리하고자 했던 것은
평등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두가지 중심가치에서 벗어나 있는 평등이긴 했지만
나 역시 차별없는 평등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우선 시작은 남녀간의 평등이었다.
지금까지는 남녀간에 완벽히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며칠 전 '남녀간의 평등은 그 차별을 인정함 속에서 완벽할 수 있다'란
생각을 접한 후부터 혼란에 빠져든 것이다.
기차안에서 접했던 사상은 플라톤의 사상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사상은
나를 더욱 허우적거리게 하고 말았다.
아테네의 지금으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시민들의 완벽한 평등원칙에 입각한 민주주의에 반하여
플라톤이 논한 '용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개념이 중요할 뿐이다'라는
귀족정치 아닌 귀족정치는
내 가치관을 송두째채 흔들어 놓고 말았다.
기회의 평등을 바탕으로 그 능력이 인정받은 소수가
다수를 이끌어나가는 지극히 우생학적인 그의 사상은
각자 소질과 능력에 맞는 본업에 최선을 다할 때
유토피아가 건설될 수 있다는 사상이었다.
물론 중세 봉건주의 시대에 그의 사상과 비슷한 사회가 실현됐으나
결론은 완전한 실패였다.
또한 플라톤 역시 그러한 유토피아의 출연에 회의적이었고,
단지 인간은 이상을 꿈꾸면서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기대였음을 인정했다.
결국 나는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 사이에서
헤매고 있고, 여행이 끝난 지금도 부끄럽지만 결론내리지 못하였다.
그런 생각 중에
졸다가 갑자기 기차에서 뛰어내리신 아저씨 덕분에
입석임에서 앉아갈 수 있었고,
옆의 할머니의 구수한 시골 인심도 맛볼 수 있었다.
(그 아저씨는 정말 황당했다. --;)
부산역에 17시 20분 무렵 도착했으며
성훈이 해운대에 있다는 음성을 듣고,
난 바로 해운대로 향했다.
그러나 이 널널한 성훈은 다시 부산역으로 온 것이다.
결국 20시 20분에야 해운대에서 만날 수 있었고,
야밤에 운동을 무진장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정준과 경인이었지만... --;
이후 소의 맛을 본 후(상당히 비쌌다 --;)
정동진으로 출발하려 했으나
열악한 성훈이 기차 시간표를 잘못 아는 바람에
이미 기차가 떠난 것을 확인했고, 다음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서울이나 부산이나 별다름이 없었다.
하루에 한끼씩 햄버거로 연명을 했던 우리는
롯데리아에서 무엇이 다른가를 얘기했으나
버스 색깔이 다르다나 버스 표지판이 다르다 따위의
여전한 썰렁함만 느끼고 말았다.
또한 서울과 부산의 별다름이 없었듯이
우리의 널널함 역시 별다름이 없었다.
이리저리 부산역 근처에서 언제나처럼 빈둥거리다가
우연히 근방 4km근처에 '대청공원'이 있다는 게시판을 보고
무작정 그곳을 향했다.
경찰서에 들어가서 길을 묻기도 하며
겨우 찾아갔으나 핫~ --;
공원이 완죤 산 위에 있었다.
배낭을 짊어지고 4km 등산을 한 후에
대청공원 정상에 오를 수 있었고,
6월 6일 현충일을 맞이하여 '충혼탑'이란 곳에서 묵념도 할 수 있었다.
아쉬움이 있다면 조금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개방을 안해 놨기에
핫~ 입구를 넘어가고 말았당~ --;
한눈에 들어오는 부산시내와 바다와 'HANJIN'이라 써있던 그토록 큰 배는
등산을 한 보람을 가져다 주었다.
그룹 '여행스케치'는 4집 앨범을 준비하면서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여행을 통해 음반을 만들면서 '해내네해네'란 용어를 만들어 냈다.
그룹 '미친자쉭들'은 널널함을 타파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여행을 통해 널널함을 극복하면서 '딩고딩고딩고딩'이란 용어를 만들어 냈다.
하핫! (색마 성훈... --;)
우리는 다시 대림전문대 전산과 96학번에서
부산대 국문과 97학번으로 변신을 했다.
그리곤 지하철을 타고 부산대 앞으로 이동을 했으며,
'로바다야끼'란 결코 생소한 명칭의 가게로 들어가
넘쳐나는 찝개다시에 그간 캠에서의 돈들이 허무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지역연고를 뛰어넘어 진로를 극복해 낸
부산 최고의 소주 '시원소주'를 맛보았으며
항상 배낭에 상비하였던 '곰바우' 역시 우리를 보내는데 큰 공헌을 했다.
결국 성훈은 완전히 뻗어
우연히 알게된 그 가게 아르바이트 생의 집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었으며
거제전문대 96학번으로 지금은 휴학중으로
부산에서 써빙을 하며 부산사람들 생각과 가까워지려 한다는
그 친구의 얘기 중에 보였던
서울예전 휴학중이라는 그 카운터 누나는
실로 대단했다. --;
조그만 그 아이의 자치방에서 밤을 보내고,
강릉행 무궁화호 열차에 7일 9시 18분에 탑승했다.
여행을 통해 알게된 정말 좋은 친구였다.
이번 역시 옆에 앉았던 사람들의 많은 쇼를 보았으며,
8시간 30분이나 걸려 17시 44분 무렵에
강릉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간이 늦어져서 정동진을 포기한 채 경포대로 이동했으며,
예상과 달리 사람은 꽤 많았다.
여전히 바닷가에서 뒹굴거렸고,
밤바다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며 귀에는 음악소리가 고요히 흘러나오던
그 날의 느낌은 결코 잊고 싶지 않다.
난 씨오랜 포기를 결심했다.
모의고사 시험지를 비롯한 수많은 종이를 태워
잠시나마 캠프파이어를 해보기도 했다.
사실 이번 여행은 성훈 덕분에 상당히 부유하게 시작된 여행이었는데
문두에 말했던 '소'의 지출이 너무도 커서
결국 방값마저 없게 된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모 평소 아무데서나 잤으면서 몰 그러느냐라고 묻는다면
사정이 있었음을 말해도 되냐? 성훈아? 으하하~
(색마같은 것 --;)
결국 전화박스, 오락실 등 열악하게 추위를 피하다가
결국 들어간 곳은 낯선 건물 속이었다.
문이 열려있던 건물에 그냥 들어갔더니
'휴게실'이란 문패가 걸려있던 방에는
우리를 위해서 아늑한 쇼파를 마련해 둔 것이다.
무단침입 속에서 단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아침이었고,
웅성대는 사람들의 소리를 뒤로하고 우리는 튀었다. --;
그렇게 우리는 다시 8일 7시 35분 강릉발 시외버스를 타고
동서울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대단원의 여행을 마치게 되었다.
사실 여행을 통한 감흥은 기대치 이하였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 수많은 경험들은 결코 이번 여행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준다.
그 누구도 결코 이번 여행을 잊지 못할 게다. 으하하~
또한 느낀 것은
어떤 사건에 대한 내 감흥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후에 다시금 말하겠지만 모든 부분에 있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