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2시, 창 밖 날씨와는 다르게 따스한 햇살로
나른해지는 시간이었다. 난 슬며시 눈까풀이 내리 앉는 것을
느끼며 머드 속에서 必殺雷擊을 쏘아 대고 있던 중이었다.
그 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성훈이었다. 지금 강원
도에서 동계 훈련을 마치고 백령도로 돌아가는 길이랬다.
"지금 나올 수 있냐?"
술 한 잔 하자는 약속이 있었지만 대답이 필요 없는 물음
이었다.
이렇게 내 98-99 겨울바다 여행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번
엔 기회를 놓쳤구나,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인천행 열차에 몸을 싣고 추억의 월미도로 향했다. 월미도
나 영종도, 용유도는 그리 멀지 않기에 참 좋았다. 아무 것
도 해야 할 일이 없던 시절에는 겨울바다가 생각나면 그저
몸만 떠나면 됐었다.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었고, 특별히 고
려해야 할 것도 없었다.
드디어 낯익은 인천 땅에 도착했지만 내게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면회시간이 17시까지. 겨우 1시간 가량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서둘러 택시를 잡아탔다.
면회실에서 군바리들이 그 구린 깔깔이를 입은 채 족구하
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성훈이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
다. 그 모습, 여전했다.
다들 여자친구가 면회 와서 초콜릿을 주던데, 흐흐, 불쌍
한 성훈을 위해 쪼만한 초콜릿을 하나 마련해 줬다. 그 때
정준으로부터 또 전화가 왔는데, 여전히 "나 쪼꼬렛 도!
!_!".
그렇게 셋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다들 돌아온 느낌
이었다. 96년 강했던 우리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이제는 병장이 되어 거만해진 성훈을
본 후, 허허, 시간이 다 되어 떠날 수밖에 없었다. 굳은 악
수를 하며 마지막을 정리했다. 세상에는 말이 꼭 필요하지
않음을 새삼 느꼈다. 굳은 악수, 그걸로 우리는 모든 걸 이
야기하였다.
그리곤 난 홀로 월미도로 향했다. 버스를 기다리던 중에
난 아주 커다란 선박을 보았는데 그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
다. 그 웅장함이 나를 기죽였을 뿐만 아니라 저 바다 건너
세상의 모습을 내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가슴속의 뜨거움
을 일깨워 주는 동시에 나태하고 무계획적인 날 비난하는 것
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월미도에 도착, 한 발자국씩 다가설 때마다 조금씩 바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난 긴장하고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겨울 바다가 이제 곧 나타난다...
바뀐 건 거의 없었다. 그 커다란 개도 그 자리, 그대로 있
었고, 현란한 음악에 귀 따가운 DJ가 있는 놀이시설도 그대
로였다. 그리고 바다도 거기,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찰랑찰랑 부서지는 파도에 끝없이 펼쳐진 바다, 그 위에
고요히 떠 있는 선박... 마음에 평온의 빛이 찾아 드는 느낌
이었다. 저 세상 끝까지 이어질 것만 같은 바다를 지나면 광
활한 대륙이 나타나겠지... 다시 가슴속에서 커다란 고동소
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바닷바람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노을이 엷게 깔리는 바다
의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 온몸이 떨려 왔
고 눈에서는 눈물이 찔끔 흘러내렸지만 기분은 참 좋았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모든 스트레스와 압박들이 한순간에 해소
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이럴 땐 여자와 함께 있으면 참 좋은데... 그 때 문득 여
자 생각이 났던 게다. 지금까지 바다는 항상 여자와 동행했
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금의 상황은 내 수치였던 게
다. --;;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허허. --; 주위를 돌아보니, 젠
장할, 커플들의 물결이었다. --+ 음, 그 와중에서도 기어이
난 혼자 온 여자 한 명을 발견해 냈다. 허허.
아직 앳돼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성숙한 중학생이거나 어
린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였다. 음. 껄떡방법 확인 완료!
"혼자 왔니?"
난 그 아이에게 다가가 물어 보았다. 흐흐, 그 아이는 긴
장, 혹은 두려운 눈빛이 역력했다.
"누... 누구세요...?"
마침 사진기를 준비했었는데 사진이나 찍어 달라고 접근했
던 게다. 음하하, 역시 성공! ^^*
그렇지만 성공이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 그 아이
는 고삐리 특유의 어설픈 섹시함도 없었고, 또 그렇다고 수
줍은 미소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내 준비마저도 허
술함이 많았었다.
월미도에는 [르네상스]라는 좋은 여관이 있다는 정보는 이
미 알고 있었지만 경비 35,000원이 내 수중에 있지 않았었
고, 또 그 다음 날이 St. Valentine's Day가 아니었던가! 껄
떡거림이 발렌타인데이까지 이어진다면 그건 성스러운 날에
대한 모독이었다.
음, 다음을 기약해야지, 허허. 날씨가 워낙 추워 어디든
들어가길 바랬던 그 아이를 내버려둔 채 나중에 연락이나 하
라며 돌아왔다. 세상은 너무 쉽다는 오만한 생각이 들었다.
허허. -.-
꽤나 괜찮은 하루였다. 그리운 친구, 성훈을 만났을 뿐더
러 보고팠던 겨울바다도 마음껏 보고 왔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