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이 시대의 선생이 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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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157 Vote: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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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선생은 참 힘든 일인가 보다.

선생이란 신분은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또 편안함을
앗아버리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는 내게 말했다.

권선생, 자네의 머리모양은 선생으로선 적합하지 않네.
그리고 자네의 옷 차림새도.
선생이라면 모름지기 단정해야만 한다네.
그렇지 않으면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니
학생들이 자네를 선생으로 보지 않을 걸세.
우리 같은 학원에서 아직 졸업도 안 한 사람을 쓰는 일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니
잘 좀 협조해 주게나.

협조. 음. 협조.
이곳에서 '협조'란 단어는 '강요'란 말과 동의어인가 보군.

물론 내게 최후의 자유가 없는 건 아니다.

됐습니다.
저는 댁 같이 외향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사람과는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댁의 기분은 이해합니다.
어느 누가 선생의 껄렁껄렁함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댁을 탓하기 보다는
이 시대, 바람직한 선생에 대한 기대,
그 공통적인 이미지를 원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걸어나오면 그만이다.

아,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젠장할 자본주의...
아무런 대안없이 젠장하기만 한 자본주의...

난 아무런 산업의 주체도 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요즘 난 일에 치여 죽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뿐.
이제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난 다시 며칠 전처럼
무슨 일을 할까,
무슨 일을 해야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걱정해야할 지도 모른다.

무언가 해야만 할 텐데
아마도 지금처럼 별 능력 없는 내게
이처럼 좋은 기회는 없을 게다.

당신의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질문을 받고 그제서야 고민하여
며칠 전 찾아낸 내 사소한 좌우명 비스무리.

후.회.하.지.않.도.록.살.자.

참 평범하군. --;



그는 내게 다시 물었다.

자네는 고등학교 3학년 과목 중 무엇에 가장 자신있나?
수학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경제입니다.

그는 애초에 내게
언어영역과 사회탐구영역을 맡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 대답에 잠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자넨
수리영역과 과학탐구영역을 맡아주게나.

나는 인문계생.
학교에서 작문과 세계지리를 배운 인문계생.
수학II라든가 물리, 화학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제 그는 내게
고3 수학과 과학을 맡아달라고 요구한다.

아무래도 난 인문계생으로선
별 호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보다.





반발하고 싶지 않았다.

두리뭉실한 다른 과목보다
정확한 값이 딱 떨어지는 수학이 난 마음에 든다.

수학이 갖고 있는 최대의 매력은
바로 그거다.

다른 과목처럼 보다 나은 답이 있지 않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정확한 규칙에 의해서 한치의 오차없이 깔끔하게 떨어진다.

보다 나은 표현이 있지 않을까,
이 사람이 무엇을 의도했는가,
이보다 오래된 무언가가 있을 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이거야.

진실이 아닐 지도 모르는 것을
남들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언젠가 시간이 충분할 때 말할 생각이지만
난 세상의 커다란 진실을 알고 있다.
善이 선하지 않고, 惡이 악하지 않다는 것.
神은 내게 이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진실을 가르쳐 줬고,
그리고 이제서야 세상에 알려도 좋다는 허락을 하셨다)




난 선생이 되고픈 마음은 전혀 없다.
선생은 아주 평범한 직업 같아서 싫다.
이 세상에 수없이 존재하는
너무도 획일화된 소시민 같아서 싫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난 학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은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평범한 내 모습에 만족하기도 한다.

남들보다 크지도 않고,
남들보다 작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내 키.

다시 보고 싶을 만큼 잘 생기지도 않았고,
다시 보고 싶지 않을 만큼 혐오감을 주지는 않는
그저 평범한 내 생김새.

때론 내 존재가 아무한테도 느껴지지 않기를 바란다.
곁에 있으면서도 아무도 내가 있는 걸 모르는
학창시절 조용히 뒷자리에 앉아 잠만 자던 그 친구.
그렇게 혼자만의 세상에서
단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무엇이 그리도 잘났는지
투철한 전투적 역량을 선보이며 떠들지 않아도 좋고,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고충을 안으려는 듯
타인의 학대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아닌.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듯
그렇게 투명하게 살고 싶을 때도 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여, 관념이여, 감각이여
내 몸을 투영해다오...

그리고 내게 가르쳐주렴.
네가 알고 있는 세상의 진실을.
아무도 모르는 세상의 비밀을.

난 이제 선생으로서 너희들에게 그걸 가르쳐줄께.

아 참, 난 학원강사지.
그걸 깜빡했네그려.

이제 5개월 남았네.
그 때까지 몇 점이나 올릴 수 있겠나?

이런 건 싫은데...
선생이 될 수밖에 없다면 커팅이 되고 싶었는데...

너희들이 모두 대학에 가지 못해도 좋아.
단지 너희들이 무엇이라도 생각할 수만 있다면 좋겠어.

정말이지,
이 시대의 선생(정확히는 학원강사)은
참 고충이 많구만.

그렇지만 걱정 안 해.
내 불성실함과 불규칙함,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공복감이
날 금새 떠나가게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으니까.

98-9220340 건아처


본문 내용은 9,305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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