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Rap이 들려온다. 아무런 빈틈이 느껴지지 않는
다. 팽창할 대로 팽창해버려 곧 터질 듯이 매끈한 풍선의 표
면처럼 그 빠른 비트 속에 찔러 넣을 손가락을 위한 배려는
애초부터 고려하지 않았나 보다.
내가 그날 도희의 전화를 받을 때도 지금처럼 귀청을 쩌렁
쩌렁 울리는 Rap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라고? 잘 안 들리거든. 잠깐만."
노래방을 나와 후미진 구석에서 "이제 됐어.", 하며 다시
수화기를 들었더니 그 속에는 도희의 목소리가 있었다.
"아, 도희구나. 너무 시끄러워서 하나도 안 들렸었어."
"노래방이었나 보네? 그럼 지금 바쁜 거야?"
"아니, 할 일 없어서 노래방에 있는 건데 뭐. 그런데 왜?"
도희는 밤 12시에 만나자고 했다. 서울역 시계탑 앞에서.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밤 12시든, 낮 12시든 우리가 달라
질 건 하나도 없다. 우린 시간에 우리가 맞추기보다는 시간
이 우리에게 맞춰지길 바라고 있었다. 하루 24시간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싶었다. 아침에 자고 저녁에 일어나고 싶었
고, 야참을 점심으로 變名해주고 싶었다. 다만 문제라면 박
정희시대 이후의 또다른 통금, 자본주의! 일하기 싫어하는,
학생과 실업자 그 가운데 끼인 사람에게 야밤의 택시비는 쉽
게 감당해낼 수 없는 고충이었던 게다.
도희와 난 有名無實한 사이였다. 가끔 전화통화 속에서는
애인보다도 더 다정하게 굴곤 했지만 사실 실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까닭이 외적인 모든 것을 완전히 배제한
채 내적인, 순수한 사랑만을 신봉하는 허잡은 여고생의 감수
성도 아니었고, 가벼운 만남과 헤어짐을 경계해야한다던 고
등학교 윤리교사의 고리타분함도 아니었다. 다만 특별히 시
간을 내어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서로
중 누구라도 만나고자 한다면 언제라도 만날 준비가 되어있
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자정, 서울역의 모습은 쓸쓸했다. 갈 곳 없는 거리의 부랑
자들의 쓰러진 모습도,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하릴없이 길거
리를 쏘다니는 양아치, 젊은이들도 도시의 어두운 이면을 보
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12시가 조금 넘어 몸에 달라붙는 검정색 원피스를 입은 키
큰 여자가 서울역 시계탑으로 다가왔다. 난 도희의 얼굴을
알지 못했지만 그녀가 도희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지속적인 외침, 섹시함의 덕목을 갖춘 여자는 그 넓
은 서울역 광장에서 그녀뿐이었기에.
"도희 맞지?", 난 피던 담배를 훌쩍 던져버리곤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응. 너 아처?"
"맞아. 반가워."
우리는 그렇게 반갑게 대면식을 하곤 우리가 어디로 향하
는지도 모른 채 그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러 명이 함께 만났을 땐 그다지 할 이야기가 없으면 아
무 말 않고 침묵해도 되지만 단 둘이 만났을 땐 그게 통하지
않는다. 충분히 친하지 않은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를 땐 어색
한 기운이 스며들어 서로에게 불편해지곤 한다. 그래서 나
도, 도희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모를 말들을 연신
쏘아댔다.
우리는 시간을 용서해도 시간은 우리를 용서할 수 없었던
지 자정, 우리가 편안히 들어갈 만한 곳은 서울역 근처에 거
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용산경찰서까지 걸어가게 됐다.
경찰서를 보니 왠지 움츠려졌다.
"너 구치소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지?"
"응. 그래서 짭새들만 보면 괜히 피하게 돼."
민생치안을 위해 오늘도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우리의 자랑
스런 경찰들. 그렇지만 그들의 또다른 이면, 맹목적이면서도
일방적인 강요를 충분히 겪는 나로서는 그들이 왠지 싫었다.
그들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말이다.
善을 집행하고자 한다면 그 집행자 역시 善해야할 것 같았
다. 善의 의미를 모른 채 규정에 의한 충실한 실행, 더 나아
가 규정에 짜 맞추기 위한 충실한 실행에 대한 노력은 善을
惡하게 만들기만 할뿐이었다.
"그렇지만 경찰은 善을 집행하는 게 아니야. 그들은 단지
法을 집행할 뿐이지."
도희의 말을 듣고 보니 딴은 그랬다. 善이 法은 분명 아니
었다. 그 말을 들으니 편안해졌다.
한참을 걸었더니 피곤함이 밀려왔던지 도희는 쉬고 싶다고
했다. 한밤에 남녀 사이에 있어서 쉬고 가자는 얘기는 충분
히 중의적이다. 일단은 말 그대로 힘들어서 쉬자는 의미가
있겠고, 다른 하나는 짙은 유혹이다. 난 그 참뜻을 이해하지
못해 혼돈스러웠다.
외모로만 따져본다면 후자쪽이 우세했다. 도희의 섹시함은
평소 性과 다분히 친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편견을 갖게 했
다. 그렇지만 편견은 편견일 뿐이었다. 세상에 섹시하면서도
섹스를 터부시하는 여자는 필요한 만큼 많다.
"그래, 그럼 조금 쉬었다 가자. 나 대학로에서 자취하는
거 알지? 내 방으로 갈래?"
도희는 내 제의에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내 추악한 외모
가 문제였는지 아님 처음부터 너무 가까워지는 가벼움을 스
스로 용납하기 힘들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녀를 재촉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재촉은 반
감을 살 때가 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한 번 말을 건
넨 후 기다리는 편이 낫다. 툭 던지는 한 마디가 더 큰 효용
을 지닐 때가 있다.
"그래, 그럼."
도희는 잠시 후 동의를 했고, 우린 택시를 타고 대학로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도희는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특별하게 하는 일은 없었지만 인터넷 속에서 자신
의 사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난 모두들 인터넷에 빠져들어
그 정보의 물결이 광케이블, 혹은 전화선을 범람해 온 세계
가 물에 가라앉으면 어떻하나,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내 방 앞에 도착했다.
내 방은 절대 깔끔한 편이 아니었다. 아마도 청소한지 2-3
달은 넉히 되었을 게다. 그러니 쓰레기며, 벌레의 사체, 빈
술병, 구겨진 담뱃갑, 널브러진 옷가지 등 세상 온갖 지저분
한 것들은 내가 모조리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내가 희생하여 세상의 더러운 것들이 사
라질 수만 있다면... 가끔은 내가 대견하게 느껴지기도 했
다.
손님을 내 방으로 초대하면서 내 지저분함을 부끄럽게 여
긴 적은 별로 없다. 오히려 그들에게 정리되지 않음이 주는
편안함을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리 헝클어트려도, 엉망으로 만들어도 그게 그거란
이야기이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다, 더이상 잃은 건 없다,
등이 주는 편안함, 뭐 그런 계통으로 생각하면 된다.
내 방을 보는 도희는 처음 다소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이내 다시 평온해졌다. 그리곤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던 키보
드 앞으로 다가가 건반을 살짝 눌렀다.
"이거, 왠 키보드야?"
"아, 나 음악 하는 게 꿈이거든. 노래 부르는 건 안 되니
까 노래나 잘 만들어보고 싶어."
도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린 후 건반을 통통 눌러보았
다. 그리곤 헛기침을 한 번 한 후 차분한 느낌이 드는 피아
노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섹시한 도희의 외모와 차분한 피
아노곡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나 예전에 피아노 치는 거 좋아했었어. 그렇지만 이제는
안 쳐.", 도희는 담담히 말했다.
"왜?"
"그냥. 별로 칠 기회가 없어서..."
도희가 한껏 피아노를 치고 나자 방안은 어색한 침묵이 흘
렀다. 그 때 내 눈에 들어온 게 낮에 빌려 놨었던 비디오였
다.
"우리 비디오나 볼까?"
東邪西毒,이란 제목의 영화였다. 우린 함께 벽에 기대어
있었지만 도희와 나 사이엔 약간의 틈이 있었다. 아주 얇은
틈이었지만 그건 확실한 보이지 않는 벽이었다. 외부에서 가
해지는 아주 강력한 힘이 아니면 그 벽은 절대 무너지지 않
을 정도로 굳건하게 느껴졌다. 내 몸이 우연히 조금 도희 옆
으로 움직이게 되면 잠시 후 그에 따라 도희 몸이 내가 움직
인 반대편으로 움직였고, 내 몸이 도희 반대편으로 조금 움
직이면 다시 도희가 내가 다가왔다. 도희와 나 사이에 형성
된 그 틈은 그렇게 더 좁아지거나 넓어지지 않은 채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던 게다.
아침은 다가오는데 영화는 끝나려면 아직 꽤 남았고... 몸
안에 커다란 늑대 한 마리씩 키우고 있는 남성들이 이런 상
황에서 엉큼한 상상을 하는 게 어색한 건 아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내 곁에 있는 도희와 자고 싶단 생각이 들
었다. 그렇지만 도희는 화면만 바라볼 뿐...
"피곤하지 않아? 벌써 4시가 되어 가는걸."
"응. 난 아직 괜찮아. 졸리면 너 먼저 자.", 도희는 여전
히 화면만 주목한 채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도희는 나와 잘 생각이 없었나 보다. 별 상관없
다. 도희와 자지 못한다고 내 삶이 기형적으로 뒤틀어진다거
나 참을 수 없는 정욕에 내 몸이 폭발할 가망성은 극히 적었
다. 게다가 난 타인의 행위에 내 의지를 끼워 넣는 걸 극히
싫어했다. 내가 그런 걸 싫어하는 것처럼 나도 그래야할 것
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참을 수가 없었다. 자든 말든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할수록 옆에 있는 도희가 더욱 섹시하게 느껴
졌던 게다.
"불 꺼도 돼?"
"응? 왜?"
"너무 밝아서 잠을 잘 수가 없어. 난 밝으면 아무리 졸려
도 잘 수가 없거든.", 괜한 핑계였다. 오히려 한 번 자면 잘
일어나지 못하는 탓에 항상 불을 켜놓고 잠들곤 했던 나인데
말이다. 그렇지만 가끔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하다고 하지 않
던가. 그 가끔이 바로 이런 때였다.
도희가 주저하는 틈을 타서 난 이내 불을 꺼 버렸다. 이미
꺼진 불, 도희는 어쩔 수 없었던지 굳이 다시 켜고자 하지는
않았다.
방안에 남은 빛이라곤 화면에서 새어나오는 옅은 게 전부
였다. 주위가 어두워지자 내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가기 시
작했다.
내 자취방은 밤이면 주위에 인적이 전혀 없는, 상업지구의
지하였다. 그러기에 친구들이 오면 밤에 방안에서 무슨 짓을
하더라도, 살림을 다 때려부수며 발광을 쳐도 우리를 제외하
곤 아무도 알아챌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다시 말해 내가
도희를 강간하고자 한다면 그녀를 도와 하늘에서 날아올 정
의의 용사는 절대 있을 수 없단 이야기. 외딴 방, 어둑어둑
한 가운데 한 남녀가 단둘이 있다! 이 충분한 분위기를 느끼
며 난 다시 갈등하기 시작한다. 강간을 할까, 말까.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본능과 이성 사이의 형이상학
적이면서도 근본적이고, 게다가 원초적이기까지 한 이 갈등
은 날 완전히 녹초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사회윤리나 도덕이 내게 문제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싸가지가 없다는 말을 줄곧 들어온 나는 원래 그따위 것들은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었다. 내 윤리는 항상 내가 정했었고,
내 사회정의 역시 내가 직접 경험해 본 후 판단하곤 했었다.
내게 강간하라고 독촉한 가장 큰 힘은 외딴 방도, 단둘이
있음도, 어둑어둑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경험에의
욕구였다.
내가 가장 신봉했던 가치는 다름 아닌 자유와 경험이었는
데 특히 경험은 줄기차게 나와 사회를 엇갈리게 했다. 경험
을 신봉하는 사람에게 무서운 일이나 못할 일은 없었다. 일
전에 구치소에 갔던 까닭도 약간은 경험에 대한 광적인 집착
탓도 있을 것인데 도희와 함께 있던 순간 역시 그와 큰 차이
나는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채 세상 사
람들 말만 따라서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규정해버리지 말자,
는 외침이 끊임없이 내 속에서 울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직
접 강간을 해보고 그게 정령 나쁜 것이면 앞으론 하지 말 것
이며, 그다지 나쁜 게 아님에도 사회에서 나쁘다고 규정시켜
놓았다면 앞으로도 상관 말고 줄기차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 도희는 나를 위한 희생양이 될 수밖
에 없다는 데에 있었다. 도희 역시 도희 나름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권리가 있었다. 그녀는 나와 자기 싫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억지로 그녀를 강간한다면 내 또다른 신봉가치, 자유와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 아니던가!
이 딜레마는 날 뿌리깊게 흔들었다. 이러고 있다간 정말
내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무엇인가 결정 내려야 한다, 그
래야만 한다!
결국 난 도희를 강간하기로 결심했다.
삶이 영화와 다른 점은 언제나 시간은 동일하게 흐른다는
것이다. 영화처럼 중요한 순간이 슬로우모션으로 변하지도
않을뿐더러 깊게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그냥 흘러가 버려 그
대로 따를 수밖에 없을 때가 종종 있다. 내가 강간하는 순간
이 그러했다.
난 갑작스레 옆에 있던 도희를 끌어안았다. 그리곤 깜짝
놀랐던지 움츠리며 "아처, 왜 그래?",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
는 도희의 옷을 거칠게 벗겼다. 까만 원피스를, 다리를 쓰다
듬으며 들어올리자 도희의 속옷이 나타났다. 그것이 나를 더
욱 흥분시켰다.
도희는 이제서야 상황을 바로 짐작했는지 마구 소리지르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왜 그래, 그러지마.", 어느새 외침은
흐느낌으로 변해갔다. 그렇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 도희는
기를 쓰고 힘을 줘도 내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런데 도희의 옷을 모두 벗겨냈을 무렵 도희는 울면서 이
야기했다.
"그러지마. 나 성폭행 당한 적 있어서 정말 이럴 때 미칠
것 같단 말이야."
이 말은 내 육욕을 모조리 사라져버리게 할만큼 굉장한 힘
을 가지고 있었다.
도희를 강간하고픈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오히려 도희
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내가 힘을 풀고 도희 밖으로 물러나
자 도희는 엎드려 펑펑 울기 시작했다.
"왜 그랬어. 나 너 믿었는데..."
"미안해..."
내겐 할 말이 전혀 없었다. 울지 말란 얘기도 난 할 수 없
었다. 그저 울고싶은 만큼 실컷 울라고 그대로 두는 것이 내
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한참을 울더니 도희는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이야기
하였다.
"나 예전에 강간당한 적이 있었어. 아는 오빠였는데 그 땐
정말 죽고 싶었었어. 그래서 나 남자랑 잘 수가 없어. 남자
랑 자려고 하면 그 때 생각 때문에 정말이지, 미칠 것만 같
아..."
그렇게 도희는 내 곁에서 완전히 떠나갔다. 내겐 그녀를
잡을 이유도, 자격도 없었다. 울던 그녀를 말릴 자격이 내겐
없었던 것처럼 난 그녀에게 어떤 강요도 할 수 없었다. 한
번 실패면 족하다. 그녀의 자유에 내 경험을 억지로 끼워 넣
으려 했기에 모든 문제가 발생했던 게다. 또다시 그녀의 자
유를 망가트릴 순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울고 싶으면 우는
대로, 그녀가 떠나고 싶으면 떠나가는 대로 난 그저 그녀가
무슨 일을 하든 바라보기만 해야했다. 그것이 그 보이지 않
는 벽을 억지로 무너트린 내 대가였다.
그 시절 난 善과 惡을 구분하지 못했었나 보다. 그 시절엔
열정이 너무 강해 무엇이든 내 손으로 직접 판단하고 싶었었
다. 그래서 많은 시행착오도 겪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무엇이 정말 善한 건지 무엇이 정말 惡한
건지 혼돈스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 난 순수한 惡이 되고 싶
다. 순수한 惡. 한 번도 짝사랑하지 못했던 사람만이 꿈꿀
수 있다는 그 순수한 惡 말이다.
98-9220340 권아처
# Ver 1.00, 1999. 8. 27. 09:50~14:30
- MUFFIN 2.RAPE-1
어디선가 Rap이 들려온다. 아무런 빈틈이 느껴지지 않는
다. 팽창할 대로 팽창해버려 곧 터질 듯이 매끈한 풍선의 표
면처럼 그 빠른 비트 속에 찔러 넣을 손가락을 위한 배려는
애초부터 고려하지 않았나 보다.
내가 그날 도희의 전화를 받을 때도 지금처럼 귀청을 쩌렁
쩌렁 울리는 Rap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라고? 잘 안 들리거든. 잠깐만."
노래방을 나와 후미진 구석에서 "이제 됐어.", 하며 다시
수화기를 들었더니 그 속에는 도희의 목소리가 있었다.
"아, 도희구나. 너무 시끄러워서 하나도 안 들렸었어."
"노래방이었나 보네? 그럼 지금 바쁜 거야?"
"아니, 할 일 없어서 노래방에 있는 건데 뭐. 그런데 왜?"
도희는 밤 12시에 만나자고 했다. 서울역 시계탑 앞에서.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밤 12시든, 낮 12시든 우리가 달라
질 건 하나도 없다. 우린 시간에 우리가 맞추기보다는 시간
이 우리에게 맞춰지길 바라고 있었다. 하루 24시간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싶었다. 아침에 자고 저녁에 일어나고 싶었
고, 야참을 점심으로 變名해주고 싶었다. 다만 문제라면 박
정희시대 이후의 또다른 통금, 자본주의. 일하기 싫어하는,
학생과 실업자 그 가운데 끼인 사람에게 야밤의 택시비는 쉽
게 감당해낼 수 없는 고충이었던 게다.
도희와 난 有名無實한 사이였다. 가끔 전화통화 속에서는
애인보다도 더 다정하게 굴곤 했지만 사실 실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까닭이 외적인 모든 것을 완전히 배제한
채 내적인, 순수한 사랑만을 신봉하는 허잡은 여고생의 감수
성도 아니었고, 가벼운 만남과 헤어짐을 경계해야한다던 고
등학교 윤리교사의 고리타분함도 아니었다. 다만 특별히 시
간을 내어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서로
중 누구라도 만나고자 한다면 언제라도 만날 준비가 되어있
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자정, 서울역의 모습은 쓸쓸했다. 갈 곳 없는 거리의 부랑
자의 쓰러진 모습도,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하릴없이 길거리
를 쏘다니는 양아치, 젊은이들도 도시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았다.
12시가 조금 넘어 몸에 달라붙는 검정색 원피스를 입은 키
큰 여자가 서울역 시계탑으로 다가왔다. 난 도희의 얼굴을
알지 못했지만 그녀가 도희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지속적인 외침인 섹시함의 덕목을 갖춘 여자는 그 넓
은 서울역 광장에서 그녀뿐이었기에.
"도희 맞지?", 난 피던 담배를 훌쩍 던져버리곤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응. 너 아처?"
"맞아. 반가워."
우리는 그렇게 반갑게 대면식을 하곤 우리가 어디로 향하
는지도 모른 채 그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러 명이 함께 만났을 땐 그다지 할 이야기가 없으면 아
무 말 않고 침묵해도 되지만 단 둘이 만났을 땐 그게 통하지
않는다. 충분히 친하지 않은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를 땐 어색
한 기운이 스며들어 서로에게 불편해지곤 한다. 그래서 나
도, 도희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모를 말들을 연신
쏘아댔다.
우리는 시간을 용서해도 시간은 우리를 용서할 수 없었던
지 자정, 우리가 편안히 들어갈 만한 곳은 서울역 근처에 거
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용산경찰서까지 걸어가게 됐다.
경찰서를 보니 왠지 움츠려졌다.
"너 구치소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지?"
"응. 그래서 짭새들만 보면 괜히 피하게 돼."
민생치안을 위해 오늘도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우리의 자랑
스런 경찰들. 그렇지만 그들의 또다른 이면, 맹목적이면서도
일방적인 강요를 충분히 겪는 나로서는 그들이 왠지 싫었다.
그들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말이다.
善을 집행하고자 한다면 그 집행자 역시 善해야할 것 같았
다. 善의 의미를 모른 채 규정에 의한 충실한 실행, 더 나아
가 규정에 짜 맞추기 위한 충실한 실행에 대한 노력은 善을
惡하게 만들기만 할뿐이었다.
"그렇지만 경찰은 善을 집행하는 게 아니야. 그들은 단지
法을 집행할 뿐이지."
도희의 말을 듣고 보니 딴은 그랬다. 善이 法은 분명 아니
었다. 그 말을 들으니 편안해졌다.
한참을 걸었더니 피곤함이 밀려왔던지 도희는 쉬고 싶다고
했다. 한밤에 남녀 사이에 있어서 쉬고 가자는 얘기는 충분
히 중의적이다. 일단은 말 그대로 힘들어서 쉬자는 의미가
있겠고, 다른 하나는 짙은 유혹이다. 난 그 참뜻을 이해하지
못해 혼돈스러웠다.
외모로만 따져본다면 후자쪽이 우세했다. 도희의 섹시함은
평소 性과 다분히 친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편견을 갖게 했
다. 그렇지만 편견은 편견일 뿐이었다. 세상에 섹시하면서도
섹스를 터부시하는 여자는 필요한 만큼 많다.
"그래, 그럼 조금 쉬었다 가자. 나 대학로에서 자취하는
거 알지? 내 방으로 갈래?"
도희는 내 제의에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내 추악한 외모
가 문제였는지 아님 처음부터 너무 가까워지는 가벼움을 스
스로 용납하기 힘들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녀를 재촉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재촉은 반
감을 살 때가 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한 번 말을 건
넨 후 기다리는 편이 낫다. 툭 던지는 한 마디가 더 큰 효용
을 지닐 때가 있다.
"그래, 그럼."
도희는 잠시 후 동의를 했고, 우린 택시를 타고 대학로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도희는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특별하게 하는 일은 없었지만 인터넷 속에서 자신
의 사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난 모두들 인터넷에 빠져들어
그 정보의 물결이 광케이블, 혹은 전화선을 범람해 온 세계
가 물에 가라앉으면 어떻하나,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내 방 앞에 도착했다.
내 방은 절대 깔끔한 편이 아니었다. 아마도 청소한지 2-3
달은 넉히 되었을 게다. 그러니 쓰레기며, 벌레의 사체, 빈
술병, 구겨진 담뱃갑, 널브러진 옷가지 등 세상 온갖 지저분
한 것들은 내가 모조리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끔 받을 때도 있었다. 내가 희생하여 세상의 더러운 것들
이 사라질 수만 있다면... 또 가끔은 내가 대견하게 느껴지
기도 했다.
손님을 내 방으로 초대하면서 내 지저분함이 부끄럽게 여
겨지진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정리되지 않음이 주는 편안
함을 가르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
무리 헝클어트려도, 엉망으로 만들어도 그게 그거란 이야기
이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다, 더이상 잃은 건 없다, 등이
주는 편안함, 뭐 그런 계통으로 생각하면 된다.
내 방을 보는 도희는 처음 다소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이내 다시 평온해졌다. 그리곤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던 키보
드 앞으로 다가가 건반을 살짝 눌렀다.
"이거, 왠 키보드야?"
"아, 나 음악 하는 게 꿈이거든. 노래 부르는 건 안 되니
까 노래나 잘 만들어보고 싶어."
도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린 후 건반을 통통 눌러보더
니만 이내 차분한 느낌이 드는 피아노곡을 연주하기 시작했
다. 섹시한 도희의 외모와 차분한 피아노곡은 어쩐지 어울리
지 않는 것 같았다.
"나 예전에 피아노 치는 거 좋아했었어. 그렇지만 이제는
안 쳐."
"왜?"
"그냥. 별로 칠 기회가 없어서..."
도희가 한껏 피아노를 치고 나자 방안은 어색한 침묵이 흘
렀다. 그 때 내 눈에 들어온 게 낮에 빌려 놨었던 비디오였
다.
"우리 비디오나 볼까?"
東邪西毒,이란 제목의 영화였다. 우린 함께 벽에 기대어
있었지만 도희와 나 사이엔 약간의 틈이 있었다. 아주 얇은
틈이었지만 그건 확실한 보이지 않는 벽이었다. 외부에서 가
해지는 아주 강력한 힘이 아니면 그 벽은 절대 무너지지 않
을 정도로 굳건하게 느껴졌다. 내 몸이 우연히 조금 도희 옆
으로 움직이게 되면 잠시 후 그에 따라 도희 몸이 내가 움직
인 반대편으로 움직였고, 내 몸이 도희 반대편으로 조금 움
직이면 다시 도희가 내가 다가왔다. 도희와 나 사이에 형성
된 그 틈은 그렇게 더 좁아지거나 넓어지지 않은 채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던 게다.
아침은 다가오는데 영화는 끝나려면 아직 꽤 남았고... 몸
안에 커다란 늑대 한 마리씩 키우고 있는 남성들이 이런 상
황에서 엉큼한 상상을 하는 게 어색한 건 아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내 곁에 있는 도희와 자고 싶단 생각이 들
었다. 그렇지만 도희는 화면만 바라볼 뿐...
"피곤하지 않아? 벌써 4시가 되어 가는걸."
"응. 난 아직 괜찮아. 졸리면 너 먼저 자.", 도희는 여전
히 화면만 주목한 채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도희는 나와 잘 생각이 없었나 보다. 별 상관없
다. 도희와 자지 못한다고 내 삶이 기형적으로 뒤틀어진다거
나 참을 수 없는 정욕에 내 몸이 폭발할 가망성은 극히 적었
다. 게다가 난 타인의 행위에 내 의지를 끼워 넣는 걸 극히
싫어했다. 내가 그런 걸 싫어하는 것처럼 나도 그래야할 것
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참을 수가 없었다. 자든 말든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할수록 옆에 있는 도희가 더욱 섹시하게 느껴
졌던 게다.
"불 꺼도 돼?"
"응? 왜?"
"너무 밝아서 잠을 잘 수가 없어. 난 밝으면 아무리 졸려
도 잘 수가 없거든.", 괜한 핑계였다. 오히려 한 번 자면 잘
일어나지 못하는 탓에 항상 불을 켜놓고 잠들곤 했던 나인데
말이다. 그렇지만 가끔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하다고 하지 않
던가. 그 가끔이 바로 이런 때였다.
도희가 주저하는 틈을 타서 난 이내 불을 꺼 버렸다. 이미
꺼진 불, 도희는 어쩔 수 없었던지 굳이 다시 켜고자 하지는
않았다.
방안에 남은 빛이라곤 화면에서 새어나오는 옅은 게 전부
였다. 주위가 어두워지자 내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가기 시
작했다.
내 자취방은 밤이면 주위에 인적이 전혀 없는, 상업지구의
지하였다. 그러기에 친구들이 오면 밤에 방안에서 무슨 짓을
하더라도, 살림을 다 때려부수며 발광을 쳐도 우리를 제외하
곤 아무도 알아챌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다시 말해 내가
도희를 강간하고자 한다면 그녀를 도와 하늘에서 날아올 정
의의 용사는 절대 있을 수 없단 이야기. 외딴 방, 어둑어둑
한 가운데 한 남녀가 단둘이 있다! 이 충분한 분위기를 느끼
며 난 다시 갈등하기 시작한다. 강간을 할까, 말까.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본능과 이성 사이의 형이상학
적이면서도 근본적이고, 게다가 원초적이기까지 한 이 갈등
은 날 완전히 녹초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사회윤리나 도덕이 내게 문제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싸가지가 없다는 말을 줄곧 들어온 나는 원래 그따위 것들은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었다. 내 윤리는 항상 내가 정했었고,
내 사회정의 역시 내가 직접 경험해 본 후 판단하곤 했었다.
내게 강간하라고 독촉한 가장 큰 힘은 외딴 방도, 단둘이
있음도, 어둑어둑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경험에의
욕구였다.
내가 가장 신봉했던 가치는 다름 아닌 자유와 경험이었는
데 특히 경험은 줄기차게 나와 사회를 엇갈리게 했다. 경험
을 신봉하는 사람에게 무서운 일이나 못할 일은 없었다. 일
전에 구치소에 갔던 까닭도 약간은 경험에 대한 광적인 집착
탓도 있을 것인데 도희와 함께 있던 순간 역시 그와 큰 차이
나는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채 세상 사
람들 말만 따라서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규정해버리지 말자,
는 외침이 끊임없이 내 속에서 울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직
접 강간을 해보고 그게 정령 나쁜 것이면 앞으론 하지 말 것
이며, 그다지 나쁜 게 아님에도 사회에서 나쁘다고 규정시켜
놓았다면 앞으로도 상관 말고 줄기차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 도희는 나를 위한 희생양이 될 수밖
에 없다는 데에 있었다. 도희 역시 도희 나름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권리가 있었다. 그녀는 나와 자기 싫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억지로 그녀를 강간한다면 내 또다른 신봉가치, 자유와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 아니던가!
이 딜레마는 날 뿌리깊게 흔들었다. 이러고 있다간 정말
내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무엇인가 결정 내려야 한다, 그
래야만 한다!
결국 난 도희를 강간하기로 결심했다.
삶이 영화와 다른 점은 언제나 시간은 동일하게 흐른다는
것이다. 영화처럼 중요한 순간이 슬로우모션으로 변하지도
않을뿐더러 깊게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그냥 흘러가 버려 그
대로 따를 수밖에 없을 때가 종종 있다. 내가 강간하는 순간
이 그러했다.
난 갑작스레 옆에 있던 도희를 끌어안았다. 그리곤 깜짝
놀랐던지 움츠리며 "아처, 왜 그래?",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
는 도희의 옷을 거칠게 벗겼다. 까만 원피스를, 다리를 쓰다
듬으며 들어올리자 도희의 속옷이 나타났다. 그것이 나를 더
욱 흥분시켰다.
도희는 이제서야 상황을 바로 짐작했는지 마구 소리지르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왜 그래, 그러지마.", 어느새 외침은
흐느낌으로 변해갔다. 그렇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 도희는
기를 쓰고 힘을 줘도 내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런데 도희의 옷을 모두 벗겨냈을 무렵 도희는 울면서 이
야기했다.
"그러지마. 나 성폭행 당한 적 있어서 정말 이럴 때 미칠
것 같단 말이야."
이 말은 내 육욕을 모조리 사라져버리게 할만큼 굉장한 힘
을 가지고 있었다.
도희를 강간하고픈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오히려 도희
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내가 힘을 풀고 도희 밖으로 물러나
자 도희는 엎드려 펑펑 울기 시작했다.
"왜 그랬어. 나 너 믿었는데..."
"미안해..."
내겐 할 말이 전혀 없었다. 울지 말란 얘기도 난 할 수 없
었다. 그저 울고싶은 만큼 실컷 울라고 그대로 두는 것이 내
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한참을 울더니 도희는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이야기
하였다.
"나 예전에 강간당한 적이 있었어. 아는 오빠였는데 그 땐
정말 죽고 싶었었어. 그래서 나 남자랑 잘 수가 없어. 남자
랑 자려고 하면 그 때 생각 때문에 정말이지, 미칠 것만 같
아..."
그렇게 도희는 내 곁에서 완전히 떠나갔다. 내겐 그녀를
잡을 이유도, 자격도 없었다. 울던 그녀를 말릴 자격이 내겐
없었던 것처럼 난 그녀에게 어떤 강요도 할 수 없었다. 한
번 실패면 족하다. 그녀의 자유에 내 경험을 억지로 끼워 넣
으려 했기에 모든 문제가 발생했던 게다. 또다시 그녀의 자
유를 망가트릴 순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울고 싶으면 우는
대로, 그녀가 떠나고 싶으면 떠나가는 대로 난 그저 그녀가
무슨 일을 하든 바라보기만 해야했다. 그것이 그 보이지 않
는 벽을 억지로 무너트린 내 대가였다.
그 시절 난 善과 惡을 구분하지 못했었나 보다. 그 시절엔
열정이 너무 강해 무엇이든 내 손으로 직접 판단하고 싶었었
다. 그래서 많은 시행착오도 겪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무엇이 정말 善한 건지 무엇이 정말 惡한
건지 혼돈스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 난 순수한 惡이 되고 싶
다. 순수한 惡. 한 번도 짝사랑하지 못했던 사람만이 꿈꿀
수 있다는 순수한 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