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린 킬링필드를 얘기하며 그 야만성을 얘기한다.
> 하지만, 우리 역시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
> 우익이란 이름에 행해진 많은 일들...
> 난 도대체 우익이란것이 진정나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 이땅위에 있는 수많은 우익 단체들...
> 과거의 우익단체들과 연관된지 모르겠다만
> 사실 우익단체란 것들이 과거 친일파들이 아니던가..
> 결국 기회주의자들이 아니던가.
> 정말이지 정의가 바로서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사는게 고통스럽다.
> 곧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이 문제도 다루겠지...
>
킬링필드 대한민국!
한국전쟁 시기 군경과 우익단체의 민간인학살, 7천쪽 ‘국회 증언청취록’
을 통해 본다
그것은 차가운 기록이다. 사실감 넘치는 동영상 자료는커녕 흔한 사진 자료
한장 없이, 무덤덤할 뿐이다. 40여년 동안 까맣게 잊혀진 채 지하실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7천쪽짜리 종이뭉치는 이제 비로소 한줌 햇살을
받았지만, 두서없는 진술을 한자 투성이의 난필로 흘려쓴 기록은 뜻 한줄
풀기조차 쉽지 않다.
11일 동안의 조사, 그리고 망각
그러나 그것은 뜨거운 기록이다. 어렵게 한줄 한줄 읽어내릴 때마다 드러나
는 진실은, 그것이 비록 빙산의 일각만을 슬쩍 건드리고 지나가는 수준일지
라도, 읽는 이를 분노와 경악으로 숨막히게 하는 거대한 비밀정원 안으로
한걸음씩 이끌고 들어간다. 말하자면 그것은 차가운 지각 아래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마그마다.
“저는 당시 국민학교 3학년이었어요.… 집 뒤에 바위가 있는데 와보니까
아이들이 머리가 깨지고 해서 죽었어요.… 저도 떠밀려서 들어갔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니 총소리가 안 나고 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산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아이가 하나 울면서 꺼내달라고 해요. 저의 육촌동생이었습니다.
논바닥에 놓으니 다리를 일곱 군데나 맞았습니다. 그뒤 병원에서 죽었어요.…
죽은 시체에다 불을 놓아서 모두 오그라드는데, 우리 집안 식구도 다 타고
그래요. 혼자 어린 힘으로 억지로 다 꺼냈어요. 그러나 어머니만은 못 꺼냈
어요.… 사흘 뒤에 가보니 어머니는 불에 타서 얼굴을 못 알아보고 찾을 길
이 없었어요.”
기록은 1960년 6월3일 경북도청 상황실이라고 적고 있다. ‘국회 양민학살
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이하 진상조사특위)의 경북지역 민간인학살사건
피해조사에서 문경사건의 어느 피해자가 증언한 내용이다. 문경사건은 1950
년 12월24일 오후 1시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에서 소속을 알 수 없는
국군 무장병들이 민간인 86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사건 발생 10년 만에 이
뤄진 조사였지만 피해자가 그때 일을 기억하기는 어렵지 않았으리라.
물론 기록에는 학살사건 이후 피해자가 겪었던 고통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 피해자는 진상조사특위가 만난 수많은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진상조사특위는 그해 5월23일 3개 반으로 구성돼 5월31일부터
6월10일까지 11일 동안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조사작업을 벌인 뒤
6월21일 진상보고서와 피학살자 증언청취 속기록, 피해신고서 등 7천여쪽의
기록을 남기고 짧은, 그러나 역사적인 활동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망각
속으로 곧바로 사라졌다.
외도중노루 500명, 애월면 400명, 모슬포 600명, 서귀포 700명, 성산포 60명,
구좌면 행원리 130명, 금영 동북리 86명…. 1960년 6월6일 제주도의회에서
열린 피해조사에서 한 증인이 제주도 일주도로변 마을 50곳을 조사해 증언한
학살의 규모는 “밝혀진 것만 3천명이고 실제로는 훨씬 더 많다”라는 것이
었다. 그러나 주식시세표처럼 숫자로 표시되는 학살의 규모는 기록을 읽는
이에게 더는 새로울 게 없다. 다만 학살수법의 다양한 변주만은 순간순간
새롭다.
“당시 외도 지서구역에는 사람이 못 다녔다. 화장하는 냄새 때문이었다. 그
당시 항문에 병을 찔러서 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아무개라는 자가 폭도로
활약한다는 이유로 그 부모와 동생, 생후 2개월된 갓난애를 비롯해 12명을
경찰의 명령으로 특공대가 죽창으로 죽였고, 도산마을에서는 20명을 죽이면
서, 부녀자들에게 이걸 쳐다보라고 한 뒤 안 쳐다보는 사람을 또 죽였다.
군인과 서북청년단원들이 처모(장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서 정조
를 맺게 한 뒤 총살시킨 일도 있다.”(증인 고순화)
증인 김평중씨는 4·3 항쟁 당시 제주도에 횡행했던 대살(代殺)을 증언했다.
“남편이 산에 올라갔으니까 아내가 나오라, 부모가 산에 갔으니까 아들이라
도 나오라, 또 본인이 없다면 아무라도 나오라고 해서 상보리 이개동에 있는
통역길에서 48명을 죽였다. 개별적으로 죽인 대살자는 훨씬 많다.” 국어
대사전에 ‘대살’은 ‘살인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이라고 나온다. 제주도
에서의 ‘대살’은 ‘가족을 대신 죽이는 행위’를 뜻하는 신조어인 셈이다.
하기야 그때까지는 그런 식의 죽음을 설명하는 낱말이 필요없었는지 모른다.
사람 목숨으로 돈장사를 한 흔적
사진/ 1960년 ‘국회 양민학살사건 진상 조사특별위원회’가 11일동안 조사
활동을 벌이고 남긴 증언 청취록. 7천여쪽에 이르는 관련기록은 40년 넘게
묻혀 있었다.
한국전쟁 전후에 국군과 경찰, 우익단체의 손에 죽어간 사람들은 어떤
부류일까. 이른바 ‘양민’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는 그때 읍장이었다.
동시에 내 친동생이 피해자다. 내 동생은 반공청년이었다.” 경남 통영시에
서 6월1일 열린 피해조사에서 김광호씨는 “경비사령관은 공연히 이 지방에
서 재산이나 있는 사람을 막 잡아들였고, 나중에 들은 바로는 돈을 얼마
주기로 하고 풀려나왔다는 사람도 있었던 것으로 봐서, 경비사령관은 이
일로 돈을 벌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고 증언했다.
사람 목숨으로 돈장사를 한 흔적은 다른 곳에서도 감지된다. “마땅히 죽을
사람이 살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 6월5일 경남지사실
에서 열린 피해조사에서 경남 김해시 진영읍에서 온 증인 김영욱(당시 전국
피학살자유족회 총무 겸 금창지구유족회 회장)씨는 “진영에서는 비상대책
위원들이 반대파들, 그중에서도 독립촉성회 간부들을 죽인 것이고, 소라도
팔아서 돈이 나올 것 같은 사람은 잡아 가두었다”며 “그러나 가둬놓고도
가족들이 등한히 한 사람은 못 나왔다”고 말했다.
대학을 나왔으면 죽었고 ‘충신’이었어도 죽었다. “8월19일 저녁 경비사
령관 박태승과 헌병대장 오덕선한테 끌려갔다. (먼저 잡혀간) 주인(남편)이
취조를 받고 있었는데 ‘대학 나왔으니 빨갱이 아니냐?’ 하고 때렸다.
당시 주인은 충무공관광협회 회장이었다. 그들이 ‘그래 너 충신이다’
하면서 때리자 주인이 큰대자로 쓰러졌는데, 헌병이 양동이로 물을 부었는
데도 의식이 없었다. 그러자 그날 새벽에 실어다 버렸다.”(통영시 증인
탁복수) 어쩌면 역사는 흘러가는 게 아니라 반복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비사령관과 헌병대장이 법정에 섰다면, 그들도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주장했을까.
국군과 경찰의 약탈행위
탁씨는 “25일 동안 그 안에 갇혀 있으면서 150명 정도 사형되는 걸 본 것
같다”며 “새벽 1시쯤 되면 일어나라고 해서 둘씩 짝을 지어 30명씩 데리
고 나가 총살하고 바다에 수장했다”고 진술했다. 탁씨는 밀고자가 후한을
없애려고 자신마저 죽이려 했는데 그나마 아기가 있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탁씨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다. 학살의 대상은 언제나
‘남녀노소’였다. 더구나 학살의 그림자는 돈있는 읍장의 가족이나 대학
나온 관광협회 회장을 비켜가지 않았을 뿐, 돈없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훨
씬 넓고 짙게 드리워 있었다.
기록은 산불처럼 한반도 남쪽 골짜기 이 구석 저 구석으로 옮겨다니고 있
다. 진상조사특위는 6월2, 3, 4일 경남 산청, 함양, 거창 등 지리산 자락
일대 ‘빨치산의 고장’을 돌아다녔다. 기록은 한국전쟁 당시 그곳에선
국군과 경찰이 죽일 사람을 선별하는 대신 살릴 사람을 선별했음을 보여
준다. 한때나마 그곳은 삶보다는 죽음이 더 보편적이고 죽음보다는 삶이
더 예외적이었던 것이다.
민치재씨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방곡이라는 동네에 68호가 있었는데,
51년 정월 초이튿날 아침 군인들이 동네를 포위하고 ‘좋은 얘기가 있으니까
노소간 싹 모이라’고 했다. 빨갱이 하는 놈들은 이미 다 도망가버리고 양민
들만 모인 것이다. 처음엔 강연회 한다고 선전을 해 모아놓고 뺑 돌아가며
기관총을 걸어놓고 사격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논바닥에 피가 못자리 물잠
겨놓은 것 같았다. 방용에서 291명, 가현에서 111명이 (그런 식으로) 죽었
다.”
죽일 사람과 살릴 사람을 가르는 기준은 매우 간명했다. “신원 지서 박대성
주임이 들어와 ‘여기 빨갱이 가족이 누구냐’ 하더니 나오지 않자 ‘경찰
가족과 군인 가족, 서기 가족만 나와라’고 했다. 그런데 경찰·군인 가족이
아닌 사람들도 많이 나왔다. 박영보 신원면장이 ‘웬 경찰·군인 가족이
이렇게 많으냐’며 ‘모조리 다 죽여버려라’고 했다. 밤이 돼서 다시
경찰·군인 가족을 추려냈다. 나는 경찰 가족이라고 핑계대고 밖으로 슬쩍
나왔는데, 얼마 있다가 총소리가 나고 불을 얼마나 처넣었는지 연기가
집더미처럼 일어났다.”(거창 신원면 증인 정소용)
학살 규모를 미리 정해놓고 학살에 들어갔다는 의혹을 살 만한 증언도
등장한다. 거창 주민 최병철씨의 증언이다. “현장에 가니까 눈을 감고
엎드리라고 했다. 그러고는 사람을 뽑아내는데 남자는 전부였다. 심지어
절름발이까지 뽑아냈다. 공포를 쏘더니 눈뜬 사람도 ‘빨갱이’라며 끌어
냈다. 지서 주임이 국군 장교에게 ‘그만 뽑아도 되지 않느냐’고 물으니
까 국군 장교가 ‘상부에 500명이라고 보고 들어가 있는데 더 뽑아야 한다’
고 했다.”
그곳 주민들은 국군과 경찰이 약탈자이기도 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학살
당시 숨어지내다 자신의 어머니에게 상황을 전해 들었다는 최씨는 “국군과
경찰이 빠져나가 동네에 와보니 소와 돼지, 식량, 옷가지를 모두 가져가고
40호쯤 되는 동네 가옥들이 완전히 불타 있었다”고 말했다. 가해자들에게
여성은 성적 노리갯감이기도 했다. 한 여성은 “밤이 야심하니까 처녀들을
뽑아서 불러냈다. 불려나간 여자들은 2시간쯤 지나 돌아왔다. 불려가서
당했다고 했다. 세상에 말도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 또 새벽에 불러냈다”
고 진술했다.
학살 내사하자 ‘거짓진술’ 강요협박
사진/ ‘겁에 질린 사냥감.’ 한국전쟁기 국군에 붙잡힌 빨치산 포로들.(century)
거창 민간인학살사건은 한국전쟁 당시에도 사회적 문제가 돼 부분적으로
진상조사 작업이 시도됐었다. 그러나 그 작업이 조직적인 은폐와 조작
속에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는 사실이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당시 향토방위대 대장이었으나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른바 ‘부역자
토벌’작전에 휩쓸렸다고 주장한 임아무개씨. “(학살이 있고 나서 얼마
안 돼) 거창경찰서 사찰 주임 유아무개한테서 전화가 오기를 ‘군이 여기서
저지른 비행을 내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며 ‘증거를 들고 들어오라’
고 했다. 국방장관, 내무장관, 법무장관이 전부 장갑차 타고 신원면으로
갔다고 했다. 나를 불러서 조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돌아갔다. 얼마
뒤 유 주임이 ‘인원이 너무 많으니 180명으로 줄이라’고 했다. 비밀리에
조사한 게 517명이었다. 결국 나는 증인으로 못 들어갔다.” 임씨는 “아마
군 위에서 군을 조종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학살로 처와 자식을 잃은 김철수씨는 거짓진술을 하도록 협박을 받았다.
“피난을 가 있는데 순경이 와서 거창서로 날 데려갔다. 문 앞에서 기다
리는데 다른 순경이 유 주임 사택으로 나를 데려갔다. 유 주임이 ‘신원
면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는데 영감이 말을 잘못하면 산 사람도 다 죽는다’
면서 ‘500명 죽은 것을 200명 죽은 것으로 말하고 아이와 부녀자는 안
죽었다고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도 다 죽인다’고 했다.” 증인
서기를 거부했던 김씨는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고 유 주임 사택을 빠져
나왔다.
학살 현장에서의 왜곡과 은폐를 거친 거창사건은 경남 진해시 진영읍 사건
등과 함께 51년 대구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됐으나 학살 책임자에 대한 실질
적 처벌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진영에서 이뤄진 피해조사에서 증인들은
“당시 학살 책임자들은 1심 구형이 전부 사형이었는데 지서 주임만 사형
당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10년 징역형을 받은 뒤 김종원 당시 계엄민사부장
에게 3천만원을 갖다주고 한달도 안 돼 형집행정지로 나왔다”고 주장했다.
80년 광주의 학살 책임자들도 면죄부를 받은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학살
자의 뒤끝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나빠보이지 않는다. 1960년 진상조사특위
활동 당시, 증인들은 형집행정지로 나온 생존자들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처벌
을 요구한다. 이에 대한 특위 위원들의 대답은 매우 원칙적이다. “일사부재
리라는 게 있어서 어렵다.” 그러나 훗날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던 정언명제도 결국 뒤집어지지 않았던가.
학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사진/ 2000년 5월 경남 산청군 와공리 유골 발굴 현장. 이곳에서만 400여구
가 수습됐다.(전주신문 윤성효)
기록은 방대하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넘겨도 머리 속을 맴돌던 몇 가지
중요한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학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11일 동안
의 피해자 조사만으로 전국에서 동시에 이뤄진 학살의 책임자를 가리는 건
애초 불가능했을 터이다. 또한 책임자는 현장 바깥에 있었을 터이다. 더구
나 조사는 처음부터 진실의 절반에 눈감고 있었다. 그래서 조사의 최대
목표도 절반의 성공에 맞춰져 있었는지 모른다.
“내 아버지는 보도연맹 간사장이었다. 나는 군대에 있었다. 아버지는 처형
당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전력으로) 재판에서 29일을 언도받았다. 아버지
는 빨갱이로 죽은 게 아니다. 아버지는 억울하게 죽었는데, 나는 그것 때문
에 취직도 안 된다. 해명해달라.”(경남 거제 김아무개 증인)
“어쨌든 보도연맹이다. 빨갱이라고 낙인찍힌 사람이다. 그때는 국가비상사
태였다. 29일 언도받았으니 죄가 안 된다는 얘기는 우리에게 통하지 않는다.
왜 다른 곳은 서류가 따로 돼 있는데 이곳은 보도연맹과 양민이 뒤섞여
있는가. 이런 사람들 전부 휩쓸어넣으면 취급하기 곤란하다.”(한 특위 위원)
양민은 누구였을까. 보도연맹은 누구였을까. 그들을 제대로 구분할 잣대는
있었던 것일까. 또 그들 가운데 진정 죽음으로 갚아야만 할 죄를 지은 사람
은 몇이나 됐을까. 기록은 끝내 말이 없다. 그리고 진상조사 뒤로도 학살의
역사와 뒷처리의 역사는 어슷비슷하게 되풀이돼왔다. 이제 그 미완의 기록을
완성해 해답을 찾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