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의 첫차가 된 줄 알았는데, 구시대의 막내(막차)가 되고 싶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탁월한 핵심파악 능력이 돋보이는 가장 인상적인 발언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어떻게 그렇게 시대정신 속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평이한 말로 표현해 낼까?
사람들은 이 발언을 조롱하고 폄훼하고 악용했지만, 이 발언의 깊은 뜻은 그야말로 대변혁이다.
자신을 태워서 구시대의 잔재를 같이 태워버리고 싶다는 것이다. 얼마나 위대한 야망인가? 하지만 이 위대성은 국민들을 끊임없이 피곤하게 했다. 국민의 윤리의식에 쉼 없이 도전하는 대통령, 얼마나 피곤한가?
그렇다면, 1970년대부터 왕성하게 활동해온 OB(Old Boy) 이명박 새 대통령은 시대정신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파악할까? 경제대통령? 이 말은 선거판에서는 민생에 힘든 국민들, 노무현 대통령의 도전에 피곤해 진 국민들의 귀를 확실히 잡아냈지만,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나 대통령의 역할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좁다. 대통령이 경제대통령이 아닐 때가 언제 있는가? 대통령은 모든 분야, 즉 정치, 행정, 경제, 민생, 사회, 문화, 과학기술, 예술, 노동, 대기업, 중소기업, 복지, 서비스, 교육, 국민의 대통령이고 또 되어야 한다. 어떤 화두를 잡아낼까? 오늘 듣게 될 취임사를 기대한다.
이명박 정부 출범의 날인 오늘,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새 대통령을 ‘인물’로 비교해 보자.(글이 길어지므로 이제부터는 호칭을 생략함을 양해 바랍니다.)
이런 인물 비교는 딱 이번 한 번만 하리라 맘먹고 쓴다.
1. 가치 노무현 vs 정치 이명박
노무현은 가치를 추구하는 인물이고 이명박은 정치를 써먹는 인물이다. ‘정치란 가치를 실현하려는 수단’이라는 개념으로 보면, 노무현은 가치라는 목표에 우선순위를 두고, 이명박은 정치라는 수단에 우선순위를 둔다. 노무현이 대선에서 끝까지도 마음을 비울 수 있었던 것도, 이명박이 대통령 되기에 오랜 세월 동안 치밀하게 준비하고 집념으로 끝까지 챙겼던 것도 이런 차이 때문일 것이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안 되었어도 존재감이 지속되었겠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못되었다면 그 존재감은 어떻게 되었을까?
2. 사상가 노무현 vs. 실물가 이명박
어떤 경우에나 노무현은 사상, 개념, 철학이 앞서고 이명박은 실물, 돈, 사업이 앞선다. 그래서 노무현은 국민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이명박은 국민에게 끊임없이 ‘답안’을 제시한다. 교육의 효과로 비유해 보면, 노무현은 공자 같이 수수께끼 같은 의문으로 길게 남는 스승이고, 이명박은 합격을 보장하는 학원 강사라 할까? 실물가는 현실에서 사상가를 이기고, 사상가는 ‘이윽고’ 실물가를 극복해낼 지도 모른다.
3. 소프트웨어 노무현 vs. 하드웨어 이명박
노무현은 대통령 시절에 정책, 제도, 조직, 의사결정방식, 기록화 같은 소프트웨어 혁신에 집중했다. 강박적인 ‘과정주의자’다. 민주주의적 절차와 시스템을 세우겠다는 의욕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아직 확실치 않으나, 대운하, 수도권 규제완화, 수도권 교통정비, 새만금, 나들섬 같은 결과물이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에 집중할 것으로 예측된다. 대표적인 ‘결과주의자’다.
노무현이라 해서 행복도시, 혁신도시, 핵 폐기장 같은 하드웨어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언제나 ‘왜’ 그 하드웨어가 필요한 지에 대한 소프트웨어가 전면에 등장했었다. 국민들이 노무현 대통령이 뭐 했냐 하는 의문을 가지는 것도, 바로 ‘왜’가 앞서고 ‘무엇’이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부동산세제 도입 같은 것은 '왜 필요한가' 보다 '무엇'이 앞선 경우다. 노무현 정부의 차분한 국민적 설득과 소통 스타일도 모자랐지만, 국민의 거부감을 높인 언론의 역할도 클 것이다.)
명분을 중시하는 법조인 출신의 노무현, 실리를 중시하는 건설 CEO출신의 이명박의 차이점이기도 할 것이다. 소프트웨어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기반을 닦겠다는 태도와 당장 하드웨어를 만듦으로써 세상을 바꾸려는 태도와의 차이다.
4. 욕 노무현 vs. 칭찬 이명박
노무현 역시 인간인지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을 거론하며 칭찬에 목말라 했지만 노무현은 욕먹기 마다하지 않는 뚝심이 있었다. 일부러 욕먹기를 자청한 게 아닐까 싶은 일도 적잖다(예컨대 선거를 앞둔 기자실 폐쇄 강행 등). 이명박은 박수를 받으면 나무를 타는 것은 물론 박수를 받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 같고 박수 받을 일을 찾아내는 재능도 있다.
노무현은 칭찬 받을 때 어색해했을 정도다. 오히려 비판 받을 때 오뚝이처럼 논리로 ‘맞짱’을 떴다. 이명박은 시장 시절이나 후보 시절에 비판을 받을 때마다 적절하게(?) 두루뭉술한 어법과 애매모호한 태도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곤 했다. 긴 호흡 성향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역사의 평가를 받겠다고 했고 당대의 평가에 맞섰다. 짧은 호흡 성향의 이명박 대통령은 당대의 칭찬과 인기를 중시할 것 같다.
5. 실패 노무현 vs. 성공 이명박?
노무현은 구시대의 막차 역할을 제대로 하고 새 시대의 첫차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싶어 했지만 결국 그것을 못했으니, ‘정치인 노무현’으로서 완전 실패했다고 보아도 좋다. 뭐 때문에 그렇게 갖은 욕을 자청했던가.
외환위기, 카드대란 같은 큰 경제 위기 없이 시작하는 이명박 정부에서, 하지만 유가 상승, 해외경기 냉각 같은 대외 환경이 급박한 이명박 정부에서,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성장동력을 만들어야 하는 이 시대에, 그동안의 경제체질 개선을 뒤흔드는 경기 부양책까지 급부상한다면 어떻게 될까? OB 이명박 대통령이 꿈꾸는 '성공‘의 잣대는 무엇이 될까?
6.‘바보’노무현 vs.‘귀재’이명박
여하튼 노무현은 대통령 되기 전에도 ‘바보’였고 대통령을 하는 중에도 ‘바보’ 같이 우직했다. 이명박은 대통령 되기 전에 이미 성공의 귀재였고 대통령 되는 데도 성공의 귀재였다. 과연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중 성공의 귀재이고, 5년 이후에 성공의 귀재로 남을 것인가? 어떤 ‘국민성공’이냐, 어떤 ‘성공귀재’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이명박은 ‘바보 노무현’이 될 수 없고, 노무현은 ‘귀재 이명박’이 될 수 없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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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이명박은 ‘경상도 싸나이’다. 너무도 달라서 ‘vs.’를 붙여야 하지만 승부사적인 점에서만은 비슷하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노무현, 이명박으로 이어지는 ‘싸나이 대통령’들. 하지만 노무현은 돌연변이였다.
새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로 새로운 시작을 여는 OB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
2008년 2월 25일,
역사는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