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두정 대한민국 (2008-02-26)

작성자  
   achor ( Hit: 2732 Vote: 73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1.
며칠 전 신림역 부근을 거닐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내 앞에는 생김새로 보자면 중학생 같은데
차림으로 보자면 고등학생 같은
여자아이들 셋이 나란히 걷고 있었는데,

짧은 치마에 짙은 화장은 그 나이 즈음의 좀 까진 애들이 하는 그런 성인의 흉내였지만
행동은 아직 아이들인지라 조심성은 없었던 게다.

셋 중 한 아이가 신발에 뭐라도 묻었는지 갑자기 허리를 깊이 숙였고,
그러자 그 짧은 치마는 엉덩이 위로 올라가 버리고 만다. -__-;


당연하게도 내가 의도했던 상황이 아니다.
난 그저 내 갈 길을 가고 있었을 뿐,
그 아이가 그렇게 허리를 숙일 것을 예측한 채 그 뒤를 걷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 때 나는 새삼 내 자신이 꽤나 도덕적인 데다가 양심적이고, 윤리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아무 사심 없던 급작스러운 순간,
나는 그 아이의 모습에서 성적인 느낌을 받았던 게 아니라
어서 가서 그 아이를 일으켜 세워주고 싶었다.

이내 이상한 아저씨가 추근된다고 치한 취급 받을까봐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튼 나는 인간 기본의 욕망보다
교육으로 다져진 인성의 영향을 더 받고 있던 게다.

나는 아직 윤리적이었던 게다.



2.
학창시절에도 은연중에 갖고 있던 두려움이긴 했지만
요즘 와서 좀 더 뚜렷해 진다.

로마를 생각한다.

부족, 국가로 시작되어 민주주의를 꽃피운 로마는
삼두정치의 과두정에서 형식적인 공화정을 거쳐
결국 제정으로 귀결되고 만다.

지금의 미국을 봐도, 우리나라를 봐도 그 역사의 반복이 걱정된다.

이미 2003년에 미국은
전체 가구의 11%가 식료품을 살 돈이 없어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빈부격차가 벌어진 상태다.
록펠러의 손자의 제안으로 사무엘 헌팅턴 등이 참여했던 삼각위원회에서는
과도한 민주주의(excessive democracy)로 민주주의가 위기를 겪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를 위해서는 절제된 민주주의(moderation in democracy)가 필요하단다.

여성이나 젊은이, 소수민족 등은 그냥 정치에 무관심하고, 온순하게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전 국민이 정치토론에 끼어들려 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는 1%의 귀족인 우리가 할테니
너희, 힘 없고 못 사는 사람들은 그냥 조용히 있으라는 게다.

이미 미국은 과거의 로마처럼
제국적, 과두적 국가가 되어가고 있다.


요즘 내가 느끼는 우리나라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모두가 더 잘 사는 방법이 있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는데
대중은 그걸 되돌려 놓았다.



3.
대선이 끝난 직후 yahon과 거나하게 술을 마셨던 적이 있다.
시기가 시기인만큼 나는 이명박 당선에 대해 거침 없이 풀어내고 있었고,
yahon은 바로 지적해 줬다.
그것은 왜곡된 공리주의자로서 과거의 내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맞다. 일치하지 않는다.
나는 왜곡된 공리주의자로서
인간은 누구나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의 우열은 없으며,
그러기에 많은 이들이 생각을 한 결과는 결국 진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것,
당연하게도 다수가 1+1=3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진리일 수밖에 없는 모순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인간의 그 현생에서의 치열함을 믿기에
그럼에도 다수가 1+1=3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3이 진리여야 한다고 믿고 있어왔다.

나는 과거에 그랬다.
이른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4.
내 생각이 잘못 됐다.
나는 인간의 기본적인 성향을 파악하지 못했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너무도 비양심적이고, 너무도 이기적이며, 너무도 비윤리적인 것이었다.

자신의 이윤과 욕망을 위해서라면
아무렇지 않게 양심을 팔고, 타인을 희생시키며, 파렴치한 짓을 마다하지 않는 게 인간이고,
그런 인간들의 이기심이 모아진 다수결은
결국 소수자들의 희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고결해야할 인간의 의사는
타인에 의해 수정되고, 지배 받고 있다.

이 시대의 언론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실을 수정하고, 편파보도 하며,
대중은 이것에 의해 사실 관계를 파악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시되어야할 인간의 기본적인 판단이
고작해야 조금 더 학벌 좋은 소수의 다른 인간에 의해 지배 받고, 수정되는 것이라면
존중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존중받아야 할 인간의 의사는
스스로 판단하고, 고심하며, 양심에 비추어 봤을 때 흔들림 없어야 할 것이 당연하다.



5.
대중은 자유주의 학자들의 바람대로 정치에 무관심하고,
언론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대중의 정신을 수정하며,
선거는 그런 무관심과 수정 속에서 기득권의 과두정 승인 제도가 되어가고 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이기적이라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양심을 파는 존재이고,
우리 대한민국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조국을 배신한 친일파의 후손에게 땅을 되돌려 주는 사법부와
땅투기, 병역비리를 일삼고 자식들은 다 외국국적인, 윤리도, 도덕도 없는 행정부와
독재와 반민주의 심판도 받지 않은 채 여전히 과두정으로 지배하는 입법부로 변질돼 간다.


요즘 들어서는
이러한 흐름이 어쩔 수 없는 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거 로마가 그러했고, 현재의 미국이 그러하듯이
우리 역시 이 인간사회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도 같다.

제정이 이어지면 민주정이 나타날 수밖에 없고,
그 민주정은 같은 인간간의 격차를 필연적으로 동반하여 과두정을 피할 수 없으며,
과두정의 1인자는 결국 다시 제정을 하게 되는, 그 무한 반복 인간사회.


덴마크에서는 목수가 의사를 부러워 하지 않는다고 한다.
수입은 의사가 더 많지만 그만큼 세금을 더 많이 내기에
결국 실수입은 어느 직업을 택하든 비슷하기 때문이란다.
그런 세금으로 국가가 기본적인 삶의 환경을 마련해 주고,
인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면 된다고 한다.

살기 좋아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삼성이 차지하는 위치보다 더 클 핀란드의 노키아는
과도한 세금이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것이기에
세금 정책을 바꿔주지 않는다면 핀란드를 떠날 것이라고 그쪽 정부를 계속 협박중이다.

목수든 의사든 누구나 비슷비슷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나라에서 삼성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80:20씩 먹던 파이가 작아져서 30:30씩 모두가 공평하게 조금 먹는다면 행복해 할 수 있겠는가?

비록 공산주의는 역사적으로 실패한 것이 명확하지만
그럼에도 지향점과 이상향은 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엔
이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비양심적이며 비윤리적인 인간의 상태로는 불가능해 보일 뿐이다.

결국 내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은
소수의 상위 1%에 의해 지배되는 과두정 국가가 되고 말 것인가.

ps.
물론 앞서 말했듯
나는 아직 윤리적이다. -__-;

- achor


본문 내용은 6,115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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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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