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블피쉬 (2009-01-22)

작성자  
   achor ( Hit: 2347 Vote: 6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가급적 야근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지만
오묘하게도 결심 직후부터 계속 야근이다. -__-;
반나절 내내 이어진 그룹IR 리뉴얼 제안PT를 평가하고
지하로 내려가 저녁을 먹는다.

밥을 기다리며,
담배필 짬도 없던 오후였기에 한 대 피고 왔더니만
직장동료가 난데 없이 럼블피쉬를 아냐고 물어온다.

당삼 알지.

럼블피쉬가 옆 자리에 있댄다.
어디어디?

어랏. 정말 럼블피쉬가 옆 자리에서 밥을 먹고 있다. -__-;


지난 번 대성 사건도 있고 하여
이번엔 꼭 사인이라도 받을 생각에 펜을 빌려 일어선다.

그래도 스포츠신문 인터뷰를 통해 본 건 있다.
애네들, 밥 먹을 때 사인요청 받는 걸 싫어한다더라.

딱 보니 아직 밥은 나오지 않았다.

혹시 럼블피쉬 아니세요?
네. 맞아요.
사인 하나...
"지금 밥 먹잖아요. 이따 오세요."

아놔. -__-;


물론 밥을 먹는 순간은 아니었지만
식당의 식탁 앞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포괄적인 식사의 과정이라 볼 수는 있겠다.
나 같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밥조차 맘 편히 먹지 못한다면 그네들 삶도 인간다운 삶은 아닐테니
맘 넓은 나는 너희를 이해하노라.

그렇지만,
이런저런 생동감 있는 약속으로 젊은이는 다 빠져나가 버린 야근시간,
회사의 지하 식당에서 밥 먹고 있는 너희에게 사인을 요청할만한 회사원은
아직 젊고 싱싱한 나 정도 밖에 없단 말이다.

내가 너희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너희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 드넓은 지하식당에서 너희를 알아본 자는
나와 내 직장동료, 단 둘 뿐이었음에도
너희, 좀 오만했던 건 아닌가.

너희가 식당에 오지 않았다면 내가 너희를 만날 까닭도 없었겠거니와
그러기에 식당에서 사인을 받는 행위가 발생할 수 있다면
바로 밥이 나오기 전인 지금이 적절한 타이밍이다.
식당에 있는 것만으로도 식사의 과정으로 확대 해석 해서는
나는 결코 너희의 사인을 받을 수 없다.

럼블피쉬가 아닌 소녀시대가 사인을 거절했다면
어쩌면 단지 소녀시대와 말 한 번 해본 것만으로도 큰 만족이 됐을 지도 모른다. -__-;

물론 인기가 행위 판단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
인기 없는 연예인은 겸손해야 하고, 인기 있는 연예인은 오만해도 되는 법은 아니다.
내가 럼블피쉬의 진정한 팬이었다면 더 이치에 맞았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오만할 필요는 없다.
타인에게 오만할 수 있는 게 너희의 영역이라면 내가 너희에게 비호감을 표하는 것도 내 영역인 게다.

역시 언젠가 TV에서 본 적이 있다.
진짜 팬 아니라면 사인을 요청해도 안 해준다던 신해철의 이야기를.

당시 맞는 말 같다고 생각했었으면서도
내가 오늘 그런 오류를 범했다.

내 탓이다.



그러나 잊지 마라.

30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 식사번호표 뒷면에 사인 하나 받으려고
쫄랑쫄랑 연예인 앞에 섰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자신이
쪽팔려서 이러고 있는 건 정말 아니다. ㅠㅠ

- achor


본문 내용은 5,814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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