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퇴장 (2009-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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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1656 Vote: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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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D      개인

1.
점심시간이 지난 조금 나른한 오후.
그는 차 한 잔 마시자며 나를 찾았다.

언젠가의 늦은 시각, 유흥주점 가자던 그의 청을, 좀 냉정하게 거절한 탓이던지
혹은 업무적으로 다소간의 마찰을 피할 수 없던 탓이던지
그간 좀 서먹해진 느낌이 있었다.

한때는 종종 차 한 잔 하던 사이였지만
오랜만이었다, 차 한 잔 하자는 그의 제안은.

나는 라떼, 그는 시원한 맥주다.
나도 한 잔 마시고 싶지만 참는다, 그래도 아직 근무시간이니.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궁금해 하던 차.
그의 첫 마디는 충격적이었다.

그는 회사를 그만 뒀다고 말했다.

그의 이직에 대한 대비는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괜찮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거나 재직 중인 그의 선배, 동기들을
나 역시도 같이 만나왔던 터다.

그렇지만 그래도 회사를 관뒀다는 그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가 혹 이직하며 내게 회사를 같이 옮기자고 제안해 온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온 내가 아니던가.



2.
내가 처음 이직하여 모든 게 낯설었던 시절.
그는 대학선배라며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었다.

직속선배나 다름 없었다.
그의 출신학과는 통계학과였지만
내가 입학했던 경제학부는 경제학과와 통계학과가 합쳐진 학부였다.

그 덕분에 내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했던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사회 여기저기에서 이미 성공해 있는 그의 선배, 동기들을 만나며
좋은 인맥을 쌓는 데 큰 도움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주변의 평이 좋지 않은 걸 알게 된 것도
그를 처음으로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회사의 나를 좋게 생각하는 주변 사람들은
내게 그와 어울리지 말라고 진심으로 충고해 주곤 했었다.

나 또한 그와 어울리며
사람들이 말하는 그의 단점을 느끼기 시작해 갔다.

그는 적어도 이 공간에서는
타인들과 어울리는 데 서툴렀다.

그는 자신의 넓은 시야를 갖고 있었지만
타인의 말을 듣는 데에는 인색했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변화를 요구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이 어린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단점을 말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 데다가
또 유일하게 단점을 말해온 그의 상사와 갈등하던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의리만큼은 지키고자 노력했었다.

그의 앞에서는 좋은 얘기만 한 채
그의 뒤에서는 험담을 일삼는 이들도 많았지만
나는 그들에 동조하여 그를 욕하지도 않았고,
또 그에게 그들의 숨겨진 행실을 이야기 하지도 않았다.

방관자.
일종의 방관자적 위치를 나는 취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도 그에게 직언하지 않았기에 나라도 기회가 될 때마다 그의 단점을 이야기 하고자 노력은 했지만
그런다고 변화할 그가 아니라고 무의식 중에 느꼈던지
귀를 열어둔 채 모든 힐난과 비난을 투명하게 그냥 흘러보냈었다.

그것이 나로서는 최선이었으리라.
그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내게 적대감을 가졌던 이도 있었고,
앞에선 웃고, 뒤에선 욕하는 비겁한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가 내게 보여줬던 호의에 의리만큼은 지키고 싶었고,
그가 떠난 지금까지도 그래왔다고 자부는 한다.



3.
그의 퇴장은 쓸쓸했다.
그는 한없이 고요하게 사라졌다.
그의 말하지 않은 고독이 내게도 전해져 온다.

너무 재미 없는 얘기겠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 했던 1년이 조금 못되는 시간을
기록해 두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부디 그의 건승을 기원한다.
그의 그간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그가 진심으로 잘 되길 기원한다.

-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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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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