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척도서관 (2010-01-30)

작성자  
   achor ( Hit: 4256 Vote: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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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고척도서관고척도서관

1.
쇼핑이 예정돼 있던 날이다.
아내는 쇼핑가는 길에 가까운 공원에 들려 산책이나 하자며
인터넷으로 이곳저곳을 찾고 있다.

추운 날씨에 멀리 가는 것도 부담스러워서
서둘러 가까운 고척도서관이 어떠냐며 제안을 해본다.



2.
내게 있어서 고척도서관은 추억의 장소다.

이상혁.
기억이 맞는 지 모르겠다.
시간은 옛 친구의 이름마저도 가물가물 할 정도로 흘러 있다.

노는 것 좋아하고, 장난끼 많았던 그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 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공부에 열심히 였다.
그러나 성적은 노력만큼은 아니었던 것로 기억한다.

이후 더욱 열심히 하여 육사에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던 것 같으니
어쩌면 지금쯤 멋진 군인의 모습일 지도 모르겠다.

그 친구와 함께 였다, 내 고척도서관의 추억은.



3.
중학교 2학년이었을 게다.
스트리트파이터2가 나온 게 그 때였으니.

상혁과 나는 주말이면 으례 가까운 고척도서관을 찾곤 했다.
딱히 공부를 하고자 했던 건 아니었고
당시 나는 책을 좋아했다.

물론 읽는 것도 좋아했지만
가득 쌓여 있는 책의 모습을 보는 걸 특히 좋았었는데
고척도서관의 열람실은
그 중학생에게 있어서 엄청난 지식의 보고이자 보물섬이었다.

그 시절엔 하루에 한 권씩 읽는 게 목표였다.
내 주된 타겟은 TV 드라마가 된 원작 소설이었는데
인간시장, 여명의 눈동자, 원미동사람들, 행복어사전 등이 그것이었다.

그 시절 나는 꽤 오랫동안
하루에 한 권이라는 나름의 목표를 달성해 냈었다.



4.
당시의 고척도서관은 야외에 휴게실이 있었다.
4면 중 3면은 열람실의 외벽이었고, 나머지 1면은 키보다 훨씬 높은 철조망으로 된 형태였는데
우리도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야외 휴게실에서 쉬고 있던 어느 날 아침
상혁은 전날 TV에서 상영한 영화를 봤냐고 내게 물어왔다.

Stand By Me.
상혁이 어찌나 감명에 찬 모습으로 말했던지
흥분하며 말하는 상혁의 모습도, 보지 않은 그 영화의 제목도 아직 기억에 선명할 정도다.

아마도 어린 놈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어설픈 모험을 찾아 떠나는 그런 류의 성장영화였을 것인데
중2라는 나이에는 딱 적당한 자극이 됐을 법도 싶다.

상혁은 연신 최고의 영화라며 흥분에 찬 어조로 이야기를 해댔고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모험과 도전은 그 시절 내게 있어서도 의미 있는 가치였기에
우리 또한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심을 했다.

결과적으로 그 모험이라는 것은
철조망으로 된 외부 휴게실의 1면을 넘어
오락실로 가서 당시 엄청난 인기였던 스트리트파이터2를 하고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5.
20년만에 찾은 고척도서관이었지만
옛 모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제는 100원의 입장료가 없어지기도 했고,
외부 휴게실의 철조망도 사라졌지만
고픈 배를 채워줬던 싸구려 우동의 시원한 맛도 여전했고,
열람실의 위용도 그대로였다.

고층빌딩 없이 고요한 주택들 사이에 둘러 쌓인
작은 휴식처, 고척도서관의 모습은
시간 속에 멈춰 있는 것만 같았다.



6.
그렇지만 20년이라니...
너무 오래됐다, 20년은.

많이 살았구나, 생각했다.
20년 전의 추억과 마주서는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시간은 흘러갈 것이다.
이제 30년, 40년의 추억과도 마주서야 할 것을 알고 있다.

거대한 삶의 흐름이 느껴진다.
아직 기억이 생생한 스무 살의 기억도
이제 곧 아주 오래된 기억이 되어갈 것이다.

왠지 모르게 슬프면서도 한편으론 그런 게 인생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어온다.
상혁을 비롯한 옛 추억 속 인물들의 건승을 빌어본다.

행복하길 빈다.

ps. Stand By Me는 아직까지도 보지 못했다. 영화가 있다면 보내다오.

- achor


본문 내용은 5,400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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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