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s Over (2002-09-01)

작성자  
   achor ( Hit: 1953 Vote: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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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이것은 여름이 끝날 때면 내가 항상 듣는
rialto의 summer's over.



계절이 바뀔 때면 어김 없이 비가 온다.

이 명제는 애초에 존재하였거나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정의할 것이다.

어렸을 때 3부터 시작하여 세 개씩 끊어 계절을 구분하는 법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 계산법에 의하면 9월 1일. 오늘부터 가을이다. 가을.



일본에서 돌아온 그 날은 술에 완전히 넉다운이 되고 말았고,
그 다음날부터 지난 금요일, keqi의 졸업식까지는 풀타임으로 멤버들과 합숙하며 밀려있는 일들을 해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그간 나는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vluez는 며칠 전 os를 Windows XP로 바꿨는데
덕분에 vluez 컴퓨터에 설치해 두었던 TV카드의 적절한 드라이버를 구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나는 TV를 볼 수 없었고, 한국이 태풍 혹은 집중호우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치도 못하고 있었다.
단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나는 일본에서 꽤나 건실하게 살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이불을 개고, 세수도 하고, 이빨도 닦았으며, 어디든 출발하였다.
돌아와서는 샤워를 하고, 입은 옷을 세탁하거나 잘 정돈해 두었으며, 적정한 시간에 잠들었다.
게다가 이것들을 단 하루도 빠짐 없이 해냈기에 나로서는 근래 보기 드믄 진귀한 일상이었다.

그 시절 한국에 돌아가면 지금처럼.
성실하게 살지는 못할 지언정 좀 정돈이라도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다시 한국에서는 여전하다.
대충 멤버들과 엉켜 잠들고, 눈 뜨면 일을 했다.
어떤 이는 외출이 없거나 손님이 없을 경우 하루에 한 번 세수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

나는 멤버들이 없던 이번 주말.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일본에서도 마켓에서 그날 저녁거리를 사오는 재미는 솔솔하였는데
그것은 한국에서도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저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고, 카드 하나 달랑 들고 길 건너 롯데백화점 지하 마트로 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은 여전히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나는 굳은 의지로 기어이 실행해 낸다.

쇼핑카트를 들고 마켓을 질주한다.
오징어도 담고, 조개도 담고, 양파도 담고, 1.5L짜리 콜라 2개도 담고... 뭐 그런 것들을 차근차근 살펴보며 담는다.

이 역시 일본에서 생각했던 것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나는 두 가지를 꼭 사야겠다고 결심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변기닦기와 망치였다.

나는 나를 비롯한 우리 멤버들의 변으로 주체할 수 없이 지저분해져만 가는 내 변기를 그간 지켜보기 안스러웠다.
이미 내 욕실은 떨어져 버린 세면대가 1/4 가량을 잠식하고 있는 황폐한 공간이긴 하지만
왠만큼 참을성 강한 나조차도 참기 힘든 단계까지 내 변기는 누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또한 모든 틈이란 틈에는 어김 없이 끼어져 있는 내 옷들을
벽에 걸어놔야겠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왔다.
이미 벽걸이형 옷걸이는 준비되어 있었지만 문제는 망치나 못이 없다는 데에 있었다.

자. 이것들도 담자.

돌아와 아주 오랜만에 빨래도 하고, 밥도 한다.
바다 한 번 못 간 이번 여름을 저주하며, 내년 여름을 위해 운동도 한다.
샤워도 하고, 신문도 읽고, 음악도 듣는다.

괜찮다. 일상적이다.



그러나 9월이 되었다는 건 결국 괜찮지 못했다.

나는 청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여름이 간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슬퍼하였지만
그 깊이는 해를 거듭할 수록 커져가는 느낌이다.

여전히 돌아올 여름은 존재하지만 24살의 여름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그 명제는
나의 모든 힘을 앗아가 버리고 있다.

가을이 되면
2학기가 시작될 것이고,
낙엽이 질 것이며,
사람들이 긴 팔 옷을 입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보다 조금은 세상이 조용해질 지도 모르고,
검은 긴 머리의 순수해 보이는 여자아이가 내게 길을 물어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는 진리는
다시는 24살 여름을 되찾을 수 없다는 그 명제다.

계절이 바뀔 때면 어김 없이 찾아온다는 그 비 이야기는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당연하다.
비는 계절이 바뀔 때만 오는 것도 아닐 뿐더러 비가 오고 난 이후 기온은 떨어질 수밖에 없기에.
그러기에 다시 찾아올 수 없는 24살의 여름이 더욱 슬프게만 느껴지는,
그런 가을의 첫 날이다.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8,117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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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kima2002-09-03 01:55:52
고마워. 너의 일상이 정돈된 탓인지 그 반대인지는 모르지만 덕분에 오늘 지각하지 않았거든. ^^*

 achor2002-09-03 02:23:13
우리는 2001년 1월에 Rialto를 만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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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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