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속의 그녀 (2003-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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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1854 Vote: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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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D      개인

상훈은 인간의 미래가 어떻게 한 순간에 뒤바뀔 수 있는지 실증적으로 표현해 냈다.

그는 술에 얼큰히 취해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던 중
단지 넘어졌을 뿐인데
광대뼈가 주저 앉아 버리는 참사를 겪어 버렸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내가 한때 입원하기도 했었던 고대구로병원으로 달려갔다.

그의 상태는 내 예상보다 심각했다.
어떤 병원에서는 머리를 둥글게 잘라낸 후 머리뼈를 들춰내곤 안면의 광대뼈에 나사를 박는다고도 하던데
자기네는 눈 주위를 조금 잘라서 벌린 후 나사를 박는 방식을 이용할 거란
의사의 다소 거추장스러운 자화자찬을 들어야할 만큼 심각한 정도였다.
어찌됐건 젊은 혈기에 술 한 번 마시고 넘어진 일 치고는 완벽히 부당한 결과임을 의심할 여지 없다.

자. 일단 그의 성공적인 수술과 쾌유를 빌겠고.
그리고 나 역시도 술 좀 작작 마셔야겠다는 일반적인 깨달음을 간직한 채.

이것은 어제의 일이고,



어제 준우는 병문안을 마친 후 간단하게 신년회 겸 해서 마신 술자리에서
초등학생 시절 내가 좋아했던 여자아이를 얼마 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영민이는 그녀의 현재 모습을 KBS 홈페이지를 통해 볼 수 있다는 조언도 덧붙여 줬다.

지금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KBS의 리포터가 되었나 보다.
오늘 아침 KBS 웹사이트에 접속, 실명 인증을 거치는 회원가입까지 해가며
나는 6시 내고향,이란 프로그램에 여러 차례 출현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했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그녀는 당대 최고의 퀸카였다.
어젯밤 모인 우리들 사이에서조차
그녀를 만났다는 사실이나 그녀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게
마치 그녀와의 남다른 연이라도 되는 양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그 시절 만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수렴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현재 모습을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보았던 것이다.



몇 년 전인가 아이러브스쿨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을 때
나는 옛 동창들을 만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예외가 있었으니
그녀는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닌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같은 독서실을 다녔던 경험이 있는,
그녀의 말로는 내가 고등학생 시절 그녀에게 연애편지를 썼다고 주장하는 친구였다.

사실 여자에 관심이 전혀 없던 고등학생 시절
내가 그녀에게 연애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녀에게 관심은 있던 편이니 어쩌면 장난식으로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든다.
나는 그 시절에도 남자애들과 있으면 잘 알지 못하는 여자 아이들에게 말이나 쪽지를 건내는 장난을 치곤 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아이러브스쿨, 내 고등학교 전체 모임에 들어와서
큼지막하게 내 이름을 적어가며 나를 찾았고,
나는 꽤나 감동하여 신촌의 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그녀를 만났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좋지 못했다.
그녀는 내 긴 머리와 흉칙한 외모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했고,
나 역시도 그녀의 깜찍했던 고등학생 시절의 모습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실감한 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만난 자리에서는 차도 마시고, 밥도 먹으며 옛 이야기 속에서 연신 웃음이 흘렀지만
그 이후 우리는 단 한 번도 연락을 주고 받지 않았다.



미디어플레이어 속에서 내 초등학생 시절 첫 사랑은
명확한 발음으로 어느 지방의 날씨가 어떠며, 사람들이 어떠며, 또박또박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초등학생 시절 첫 사랑의 현재 모습을 보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그간 흔히 봐왔던 한 명의 리포터다운 리포터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이미 많이 변해 버린 그 얼굴 속에서도
옛 모습이 남아 있기는 했는데
그렇지만 그녀를 보지 못했던 지난 15년 내가 추구해온 쌈박걸과는 거리가 이미 생겨버린 편이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어느날 어떤 여자를 아주 쉽게 만났는데
어딘가에서 어떤 남자는 그녀를 한 번 만나보는 게 아주 큰 열망일 수도 있겠구나.
반대로
나는 이곳에서 그 초등학생 시절의 첫 사랑을 만나는 게 아주 큰 열망인데
어느 누군가는 그녀를 아주 쉽게 만나고 있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



난 고등학교 시절부터 마리화나에 중독되어 있었다. 구하
기 어렵게만 느껴졌던 그 마약이 사실은 바로 곁에 있는, 아
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 이후 난 완전히
중독되어 버렸던 게다.

대학교 입학 후 첫 미팅...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아이는 무척이나 호기심 많은 아이였기에 마약을 권하
는 내 검은 손길에 쉽게 유혹당했다.

마약에 취해 횡설수설 하는 그 애 얘기 속에는 한 남자가
등장했다. 6년 동안 그 여자 아이를 쫓아다녔다는 그 남자
아이.

여자 아이는 마약에 취해, 내 품에 안겨 그녀의 순결을 주
었다.

난 그 남자 아이를 생각했다.
그 아이가 그렇게, 6년이란 시간을 바쳐가며 얻고 싶었던
그 여자 아이의 입술이 이렇게 쉬운 것임을 안다면 그 남자
아이는 얼마나 허탈해 할까...

- MUFFIN 1.MARIHUANA 중에서...



어쩌면 그녀를 만나서 지난 번 그랬던 것처럼
오랜동안 간직하여 왔던 환상이 깨질 지도 모르겠다.
TV를 통해 본 그녀의 현재 모습은 더욱 그 가능성을 현실화 시켰다.

그러나, 그럼에도.
초등학생 시절, 나를 사로 잡았던 그녀의 현재를
한 번쯤은 직접 보고 싶다.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8,020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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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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