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격 (200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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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1686 Vote: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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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D      개인

불합격

대학 1,2학년 시절에는 나도 좀 운치가 있었다.
저 사진 속 수풀 속으로 들어가면 작은 벤치가 하나 나오는데
그 공간이 바로 내가 학교에서 혼자 책을 읽거나 잠을 자기도 했던 그곳이다.



1.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나는 분주해 지기 시작했다.

9시 수업을 위해서는 7시 30분이면 출발을 해야 했는데
나는 7시가 되어서야 정말 여유가 없음을 깨닫고,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기 시작했던 게다.

1시간 여.
조금 남아있던 졸업논문과 준비해야할 프리젠테이션 두 개 중 한 개만을 준비하여
허겁지겁 출발한다.
당연히 무엇이든 내용의 빈약함이야 말할 나위 없겠다. --;



2.
빈 자리는 교수님 바로 앞 자리 뿐이다.
나는 그런 자리를 정말 싫어하지만 어쩔 수 없다.
조용히 가 앉는다.

교수님은 내가 오자마자 하시던 말씀을 마치고 내게 프리젠테이션을 요구하신다.
지난 3-4주간 모든 학생들의 프리젠테이션을 마쳤지만
그 누구의 도전도 일절 용납치 않는 내 독보적인 게으름 덕택에
여태 프리젠테이션을 하지 않은 사람은 나 하나 뿐이었다.



3.
용민과 수업시간에 장난을 즐기던 대학 1학년 시절 이후
오늘처럼 수업 내에서 주목을 받은 적은 처음이다.

혼자 발표을 했던 것도 그렇거니와
교수님은 나와 친하지도 않으시면서 연신 '순우야, 순우야' 하시며
가위바위보 따위를 시키곤 하셨다. --;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그런 사소한 남들의 주목을 받는다는 게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고등학교 수업시간, 구석 뒷자리에서 엎드려 자던,
있는 듯 없는 듯한 학생의 모습을 꿈꾼다.



4.
수업이 끝나고 거리에서 한 학생을 마주쳤다.

그녀는 내게 갑작스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고,
나는 정말 당황했다.
학교에서 내게 아는 척을 할 여자는 전무했기에.

순간 나 역시도 고개를 잠시 숙이긴 했지만
그녀가 지나가고 나서야 나는 그녀가 나와 어떤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 내가 발표를 했던 그 수업을 함께 듣는 학생.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누군가 학교에서 아는 사람이 새로 생겼다는 게 괜찮은 기쁨이었고,
또한 그가 여자라는 점은 더욱 큰 기쁨이었다. --;

마치 소설이나 영화처럼.
나는 다음에 그녀를 다시 만나 그 때는 인사가 아니라 차나 식사를 함께 하고,
우리는 그렇게 친해지며,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오!

그러나 현실은
다음, 다음 주면 수업은 종강일 것이고,
나는 이번 학기를 끝으로 학교를 떠난다. --;



5.
수업이 끝나자 마자 정규네로 가서 오후에 또 예정되어 있는
졸업논문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한다.

논문만 제출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조교는 지난 밤 내게 전화를 걸어 교수님 앞에서 발표할 문서도 준비를 해오란다.
미친. --;

급하게 준비를 하고 있던 찰나.
지난 이틀, 잠을 못 잤던 여파가 고스란히 밀려오기 시작했다.
졸음이 오는 것도 문제였지만 어깨가 뻐근해 온다.
의식은 혼미해져 가고, 사물은 조금씩 그 형체를 잃기 시작한다...



6.
헉. 젠장.
깨어나 보니 14시 30분.
15시, 수원에서 발표를 해야 했는데 늦어버린 게다.

역시 조잡하고, 허전하며, 빈약할 문서가 될 것을 예상하며
10여 분만에 발표 문서를 만들어 내고, 바로 수원 학교로 출발하기 시작한다.



7.
좆됐다.
내 발표는 형편 없었고, 교수님은 너무나도 엄격하셨다.

내 졸업논문은 불합격 처리 되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다른 이들은 대충 잘도 졸업하는 것 같다만
내겐 졸업을 향한 여정이 어찌 이토록 험난하기만 하던가. !_!

교수님은 내가 한 마디 하면, 세 마디를 질문하셨다.
그것도 굳이 지적하고 넘어가지 않아도 될 법한 일들에 지독히 의도적으로 말이다.

학칙에 의하면 오늘까지 졸업논문이 통과되어야 하는데
나는 그것에 실패한 것이다.
교수님은 이번 토요일에 다시 발표를 하라 하셨는데
과연 교수님은 자신의 힘으로 학칙을 변경하여 나를 졸업시켜 주실 수 있을 것인가!



8.
저녁에는 웹스. 사무실에서 형님을 만나 앞으로 나아갈 길을 의논하였고,
나는 공부하는 것을 포기했다.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839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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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2003-06-07 18:54:27
4. 준비된 바람둥이 같으니라구~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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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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