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ormal life (2004-06-22)

작성자  
   achor ( Hit: 1011 Vote: 13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1.
전국의 모든 대학생들이 방학을 맞이하여 기뻐하고 있을 이 때.
나는 어제부터 한 학기만에 다시 대학에 다니고 있는 중이다. --;

며칠 전 학교에서는 갑작스레 내게 전화를 걸어
방학 때 합숙하며 진행되는 수업이 있는데
이걸 들으면 졸업을 시켜주겠노라고 제안을 해왔다.

요즘 일이 좀 바빠 아무래도 합숙한다는 게 좀 걸리긴 했지만
지난 몇 년간 유예해온 졸업의 유혹을 결국 떨쳐버릴 수 없어
담당자와 타협에 타협을 거듭하여
합숙하지 않고, 매일 등하교 하며 수업을 듣기로 결정을 했었던 터다.
다만 수업이 서울에서 진행되지 않고,
학교 기숙사가 있는 수원에서 진행된다고 하더라. ㅠ.ㅠ

수업은 결코 녹녹하지 않고, 오히려 상당히 빡세다.
오전 8시에 아침식사로 시작되는 하루 일과는
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별다른 휴식 시간 없이 풀로 진행된다.

게다가 나를 제외하면 학교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듣는 학생은 없는 것인지
다른 학생들의 하늘을 찌르는 열정도 감당하기 힘들다. --;
하긴 나야 수업만 이수하면 졸업을 시켜준다고 하여 완전 의무방어전을 치루는 셈이지만
다른 이들은 80만원이나 내고 추가적인 공부를 하겠다고 온 사람들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물론 나도 돈은 냈다. ㅠ.ㅠ)



2.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 지긋지긋한 학습의 연속에 약점을 하나 찾아냈다.

수업 이수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총 7과목으로 구성되는 이번 수업은 6개 이상을 통과해야 하고,
각 과목은 세 번 이상 결석시 탈락된다.
또한 시간표는 매일매일이 같고,
각 과목은 매일 1시간 수업이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진행되는 마지막 수업만은 2시간짜리다.

즉.
내가 만약 마지막 과목을 포기한다면
나는 저녁 식사 시간 뿐만 아니라 2시간이나 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매일 시간표가 같으니 언제나 마지막 수업은 똑같을 것이고,
그 마지막 수업을 포기한다 하여도 나머지 6개 과목만 통과한다면
이번 과정을 이수해 내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란 결론.

나는 첫 날부터 내 이러한 이상을 실천하였고,
이틀이 지난 오늘까지 별다른 문제는 없는 듯 하다.
모두들 밤 9시에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에 합숙하러 갈 때
나는 이미 오후 5시 30분에 임의로 수업을 마치고 집에서 쉬고 있다!

다만 아침이 문제이긴 하다. --;
오늘도 늦잠 자다 지각하여 첫 수업을 참석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2번만 더 지각하게 된다면
나는 이번에도 졸업을 포기해야만 한다. ㅠ.ㅠ



3.
앞서 말했듯이 나를 더욱 난감하게 하는 건
같은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의 열정 때문이다.

나는 애초에도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었긴 하지만
내가 정상적인 3-4학년일 때는 이토록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드물었던 것 같은데
그 80만원의 압박 때문인지, 아님 시대가 학생들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있는 것인지
어쨌든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열정은 실로 놀라울 정도다.

이를테면 내 시대에는 으례 뒷자리에서 잠을 자는 학생이 몇 있곤 했는데
지금은 내가 유일하다. --;
졸려서 자는 게 강사에게 좀 미안한 감은 있을 지언정 그리 쪽팔릴 건 없는 일이었는데
혼자 자고 있으려니 종종 주위의 뜨거운 시선 때문에 깨어나곤 한다. --;

뿐만 아니다.
수업이 시작되고 강사가 좀 늦게 들어온다면 원래 학생들은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 몇 분 안 되는 시간이나마 어쩐지 번 것 같아 나는 마냥 행복하건만
이 인간들은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강사가 안 들어오고 있다고 신고를 하지 않나,
강사대기실에 직접 찾아가 강사를 데리고 오기까지 한다. --;

적응하기 힘들 수 밖에 없다. --;



4.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6반으로 나뉜 이번 학생들 중에
오랫동안 선망해 마지 않던 무용과 학생들이 모조리 우리 반이라는 사실. ^^;
뭐 그래봤자 각 과에서 차출된 학생들이 모이다 보니 한 과에서 여러 명이 올 수는 없었기에
무용과라 해봤자 2명이 고작이긴 하다. --;

오늘은 그 중 최고의 날이었다.
12명으로 구성되는 각 반은 여학생이 세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이었는데
오늘 4명씩 구성한 조편성에서 나는 운 좋게도
무용과 2명과 미술학과 1명의 여학생 세 명이 모두 포함된 조의 일원이 됐던 것이다!
곧 나는야 청일점. --v

뭐 영화에 대해 조끼리 토의를 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우리는 그것과 상관 없이 각자의 이야기를 나눈다.
그 귀여운 여학생들은 내 나이를 듣곤 까무라친다. ㅠ.ㅠ
그간 동갑 정도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댄다. --v

막내로 살아온 데다가 어린 여자 아이들을 만나온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나로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좀 난감해 진다.
나이답게 좀 근엄해야 할 것 같은데
역시 내 성격은 아니다. --;

그래도 덕분에 좀 친해져서
친구 하나 없이 혼자 심심해 하는 나를 위해
이후에도 옆자리를 맡아주거나 숙제를 보여주는 등
좀 놀아주기도 하여 나는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



5.
나이라는 것이 그저 숫자일 뿐이라고 여겨보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 내게 있어선 커다란 벽이 아닐 수 없음을 절감한다.

나는 학교에서 혼자 뒤에 앉아 잠만 자는 조용한 학생일 수밖에 없다.
나보다 몇 살이나 어린 학생들과 농담을 하거나 장난을 치기엔
어쩐지 좀 비참한 기분까지 들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기억하고 있는 내 과거의 행적 중 한 가지가
내가 20대 초반이던 시절 나와 비슷한 나이의 여자 아이가 20대 후반의 남자를 만났다고 했을 때
그런 아저씨, 뭐가 좋다고 만나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던 일이다.

나는 지금 그 아저씨의 입장에 서 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있는 나는
어쩐지 행동에 무게가 있어야 할 것 같고, 생각에 깊이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아마도 내가 20대 초반에 그러했듯이,
지금 나와 수업을 같이 듣고 있는 학생들이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실제로 나는 예전과 달라진 게 별로 없다.
나는 여전히 행동은 유아적이고, 생각은 유치할 뿐이다.

나이란 것은 그저 숫자일 뿐이지만
나만의 힘으로 그런 타인의 관념까지 바꿀 수는 없을 일이기에
나를 옭아맬 수밖에 없는 듯 하다.

그러니 최선은,
역시 나이에 맞게 살아가는 것.

언젠가는 나이를 먹어서도 최신가요를 모두 섭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 나이에 맞게, 평범하게 사는 게 최선이 아닐까 싶다.
상대적 젊음에 대해서는 시늉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6.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이빨을 닦고 학교로 달려간다.
학교가 끝나면 헬스장에 들려 열심히 운동을 한다.
운동을 마친 후 사무실로 돌아와 저녁을 먹으면 슬슬 잠이 오고,
잠들어 깨어나면 다시 아침이다.

요즘 내 일과는 너무나도 건전하고, 너무나도 생산적이며, 너무나도 노멀하다.
정말 오랜만에 이런 평범한 삶을 살아보는 나로서는
내 자신이 의아하기도 하면서
사실 또 한편으론 어떤 면에서는 뿌듯한 감정까지도 느껴진다.

내가 바라던 삶이 결코 아닌데
어쩐지 잘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나는 것이다.

졸릴 때까지 버티다 피곤의 극단에서 잠드는 것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정해진 일과 속에서 빡세게 행동하고, 그리고 그 피곤함에 정해진 잠을 자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할 것이고,
그 행복을 찾는 과정에서 택한 방법이
지금의 노멀한 삶이라면
역시, 직접 겪지 않는 내가 바라본 것보다
아마 훨씬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그리고 행복할 것이리라.

그저그런 삶은 그저그런 게 아니고,
인간이 이 시대에 찾아낸 최고의 삶이 아닐 지 모르겠다.

즉. 그들이 맞았고, 내가 틀렸을 지도 모르겠다.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394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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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ri2004-06-25 00:05:20
처음엔 나도 어린동생들을 대하는게 너무 난감했지. 이게..친동생이나 사촌같은 피를 나눈 동생들과는 엄청 틀리더라고! 지금은 머... 그냥 .. 친구처럼 지내고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에겐 철없는 언니/누나 로 보일수도 .. 혹은 의외로 ... 쳇 알게뭐람; --;
직원채용시 나이제한도 엄연한 차별이자, 인재손실의 큰 원인이라고! ㅜ_ㅜ

 achor2004-06-25 01:45:23
정말이지 나는 내가 과거 그러지 못해 이제와서야 꿈꾸던 대로, 학창시절 뒷자리에 앉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잠만 자는 그런 학생이고 싶었는데 요즘은 얘들이랑 이미 친해져 버려서. --;
나는 친해지고 싶지 않았는데 아이들의 요청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친해졌다는, 그런 뉘앙스는 아니고, 그냥 조용한 학생의 매력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일 뿐야. --;
알고 보니 나랑 동갑내기도 2명이나 되고, 남자 얘들은 몇 살 차이 안 나더라고. 그리하여 지금은 뭐 잘 놀고 있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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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