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누리 (2004-09-17)

작성자  
   achor ( Hit: 708 Vote: 3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1.
잠에서 깨어난 정오 무렵.
폭우를 품어낸 며칠 전을 잊기라도 한 듯 날씨는 오늘따라 유달리 따스하다.
언제나처럼 담배 한 대 입에 물곤 메일함을 열어 본다.

중요한 메일이 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개 유용할 것도 없고, 쓸모도 없는 메일들로 가득 차 있는 그 속에
오늘은 나우누리로부터 도착한 한 통의 메일이 들어있었다.

나우누리.
아. 언제적 나우누리던가.



2.
메일은 2004년 12월 31일을 끝으로
메가패스와 연계된 서비스 상품의 종료를 알려주었다.

몇 해 전 메가패스 이용자에게 나우누리 무료 이용 혜택을 주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을 통해 나우누리를 여전히 접속할 수 있었는데
이제 그것이 끝이라는 이야기였다.

내가 오랜만에 나우누리에 접속해 본 이유는
끝이라는 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어떤 본연적인 아쉬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3.
나우누리는 여전했다.
SunOS 5.6 버전도 예전과 같았고,
그 VT모드의 소박함도 아직 간직하고 있었다.

특별히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자동으로 쳐지는 각각의 명령어들은
그간 내가 얼마나 나우누리에 몰입하여 왔던가를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한 증거였다.
나는 예전에 정말 나우누리의 광적이었던 것도 같다.

나우누리 칼사사에 가본다.
2003년 10월 7일 란희의 글을 끝으로 시간이 멈춰있다.
생각보단 오래 지나진 않은 느낌이다.
고작해야 일 년.

대화방에 가본다.
나 이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대학생이었던 시절에는 엄청난 사람들로 바글바글 하던 이곳이
이제는 나 이외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고요한 곳으로 변해 있다.

항상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로 넘실거리던
열린광장이나 우스개 등 각종 게시판 또한 시간은 멈춰져 있다.

시간은 흘렀고, 문화는 변했다.



4.
나는 나우콤,이란 명칭으로 시작된 나우누리와 처음부터 함께 해 왔다.
고등학교 1,2학년 무렵으로 기억되는 그 시절 나우콤은
별다른 재미도, 흥미도 없는 그저 그런 곳이었는데

나우누리로 명칭을 바꾸고, 무료나 할인혜택을 통해 대학생을 적극 유치한 이후부터는
많은 것이 바뀌게 되었다.
젊고, 건전하며, 새로운 지식이 넘쳐나는 젊음의 광장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된 것이다.

그 시절에는 채팅을 통해 어딘가의 누구를 만난다고 해도
지금의 인터넷 번개와는 달리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도 않았고,
느린 속도에 부족한 정보량이었지만
내가 궁금했던 많은 질문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백과사전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나우누리를 통해 칼사사를 만났다.

근 10년이 다 되어가는 아직까지도 그 연이 이어지는
96학번 모임 칼사사.
어쩌면 칼사사가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을 갖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5.
-pf i
-achor (권순우, 비공개)
-현재 서비스 사용중입니다.
-나는 나우누리 이용료 따위는 전혀 아깝지 않다.

내 프로필에는 저렇게 쓰여져 있었다.
몇 해 전 인터넷의 거센 폭풍 속에
고락을 함께 해오던 친구들이 나우누리를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남겨 놨던 프로필로 기억한다.

당시에 나는 나우누리를 떠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내 젊음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나우누리의 추억을 위해
월 만 원의 이용료를 내는 것은 결코 아까울 것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 둘 나우누리를 떠나가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그들에게 네 추억을 위해 고작해야 한 달에 만 원 쓰는 것이 그렇게 아까운 것이더냐,
외치고 싶었던 그 심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 난다.

몇 년 전 일이던가.



6.
시간이 흘렀다고 나도 변했다.

어젯밤 한 옛 친구가 전화를 걸어
나는 1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고, 그런 친구는 네가 유일하다며 옛 추억을 늘어놓았는데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는 영원히 변치 않는 바다와 같길 희망했었다.
영화 동사서독 속에서 사막의 한 가운데 홀로 고고히 시간이 멈춘 듯 존재했던 그 곳처럼
사람들이 세파에 지쳐 돌아왔을 때
예전 그 모습을 여전히 간직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기를 꿈꿨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다고 나도 변했다.



7.
아직 결정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나 역시 이제 나우누리를 하지 않을 것 같다.
추억을 위해 월 만 원 쓰는 게 뭐 그리 아깝다고 소리쳤던 나 역시도
조용히 뒷모습만 남친 채 떠나갔던 친구들처럼 이제는 떠나게 될 것도 같다.

당시에는 내 모든 것만 같았던 20대 초반의 추억들이
이제는 서서히 잊혀져만 가고,
내 모든 열정과 꿈이 담겨져 있던 것만 같았던 나우누리는
외롭고 적막하기만 하다.

좀 번거롭긴 할 것이다.
나는 결코 나우누리를 그만 둘 생각이 없었기에
내 중요한 모든 메일은 나우누리 계정으로 되어 있으니
그걸 다 바꿔줘야 할 것이다.

이렇게 나우누리를 결국은 떠나게 될 걸 알았다면
내 메일을 쓸 걸 그랬다.

정말 몰랐다.
나 역시도 결국은 나우누리를 떠나게 될 거란 사실은.



8.
결국.
시간은 흘렀고, 나도 변했다.
그 뿐. 달라질 건 별로 없다.
좀 귀찮긴 하겠지만.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296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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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rina2004-09-17 22:13:10
흑 ... 난 여전히 그 기억들이 생생한데 ... ㅜ.ㅜ

 Keqi2004-09-29 12:21:46
결국은 그런 거지, 언젠가는 싸이도 그렇게 될까 두려운 게야. 정말로.

 achor2016-06-27 00:56:06
시간이 흐른 지금, 네 두려움은 현실이 되어 있네.
이 또한 오래 전 일.
언젠가는 facebook도 그렇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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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