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책을 말하다 (200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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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녁을 먹으며 9시 뉴스를 보았고,
그리곤 담배 한 대 피우며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던 중이었다.

TV 속에는 화려한 배우들이 별로 재미 있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를 펼치고 있었는데
대개 이럴 때면 TV를 꺼버리곤 다시 컴퓨터 앞으로 갔지만
오늘은 그 화려함 속에서 독보적인 딱딱함이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KBS1 TV에서는 이제 막 TV, 책을 말하다,란 프로그램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철학자라고 소개된 탁석산이란 사람이 진행자로 나왔는데
아마도 그 철학자라는 단어가 나를 끌었던 것도 같다.

나는 요즘 시대에 어떤 사람이 과연 철학자일 수 있을까 잠깐 생각을 해봤고,
아마도 철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이지 않을까 결론내렸다.
보통은 이럴 경우 철학박사 혹은 무슨무슨 대학 무슨무슨 과 교수 라는 용어를 쓰겠지만.



2.
프로그램은 연말 특집으로
2004, 올해의 베스트셀러를 다루었다.

한때는 나 역시도 책 읽는 걸 좋아했던 적이 있기에
이미 책과 거리가 멀어진 지금의 시대에는
어떤 책들이 인기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계속해서 나를 TV 앞에 붙어있게 했다.

프로그램은 첫 번째로 다빈치코드를 소개했다.

얼마 전 읽은 책이었다.
미국은 소설마저도 헐리웃 영화처럼 만들어지는가 보다 하며
약간의 경멸과 약간의 재미로 읽어냈던 다빈치코드다.

패널에는 개그맨 최영만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분명 개그맨다운 엉뚱함으로 사뭇 진지하기만 한 다른 패널들과는 완전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지만
오히려 밉다기 보단 자칫 딱딱하기 쉬운 프로그램에 독특한 재미를 주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든 것은
사회자 탁석산의 재치였다.

그는 최영만과의 대전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유연함을 갖고 있었으며,
또한 문화를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갖고 있던 것이었다.



3.
그를 본 것도 처음이었고, 또한 이번에 본 시간도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에게 매료되어 버렸다.
그는 내가 잊고 있었던 커다란 깨우침을
그 짧은 시간 안에 가르쳐 주었다.

패널 중 한 명은 아마도 순수문학을 사랑하는 이였나 본데
그는 오늘 소개된 베스트셀러들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보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베스트셀러라는 게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역시
순수문학과는 거리 먼, 좀 어쩐지 경박하고 가벼워 보이는 재미 혹은 실용 위주의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탁석산은 그의 그러한 시선을
아주 재치 있게 돌려낼 줄 알았다.
그는 대중소설이라 할 지라도, 또 실용서적이라 할 지라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소중한 진리를 실천적으로 잘 보여주었다.

그것은 모든 문화는 고저질을 가릴 수 없이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는 내 생각과 일치할 뿐더러
그럼에도 어쩐지 상업적인 냄새 물씬 나는 책들보다
순수문학을 보다 우월하게 바라보고 있던
내 원치 않던 선입견을 제대로 지적해 주는 일이었다.

나는 책을 많이 읽었을 그가 그런 시선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환호했고,
또한 생각과 달리 그렇지 못했던 내 자신을 반성했다.



4.
그렇지만 실망감은 여전하다.

2004, 올해의 베스트셀러로는
다빈치코드와 연금술사, 냉정과열정사이, 아침형인간,
선물, 집없어도땅은사라, 평생성적초등4학년에결정된다 등이 선정되었다.

몇 년 전과 다름 없다.
역시 베스트셀러는 그렇고 그런 책들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아침형인간이나 집없어도땅은사라, 평생성적초등4학년에결정된다 등은
그저 시대를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책들이니 일단 냅두자.
이런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에 슬퍼하는 일도
일단은 냅두고,
사회에 대한 의식 보다는 나 하나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관심 많은 이 책들의 독자에 대한 비난도
일단은 냅두자.
어차피 이런 책들은 내년엔 안 팔릴 게 분명하니.

그렇다면 다빈치코드와 연금술사, 냉정과열정사이, 그리고 선물이 남는다.
그나마 냉정과열정사이에 한 표 준다.

다빈치코드는 잘 포장된 지식으로 꾸며진 헐리웃액션물이고,
연금술사는 어린왕자의 아류 같은 유치한 이야기,
선물은 진부하고 누구나 알고 있는 그저 그런 이야기.

냉정과열정사이를 이야기 하며
바나나와 하루키, 류 같은 일본 작가들이 인기를 끌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내가 책을 읽던 20세기 후반에도 그랬는데
지금도 그런가 보다.
바나나와 하루키, 류 같은 일본 작가들.
요즘도 그들이 먹히는 시대인가 보다.

한국에서는 탈고전적인 일본 소설이 인기가 있는데
일본에서는 고전적인 한국 드라마가 인기가 있다는 게 오묘하다는
패널들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패널들의 다소간 비난 섞인 발언 속에서도
탈석산은 이 책들의 의미를 제대로 집고 있었다.

나는 패널들과 같은 관점에서
탈석산의 시선에 대단함을 느낀다.

역시 정말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편견과 아집, 오만이 없다.



5.
1시간동안 즐겁게 보았다.
특히 일본작가들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내 지난 날의 향수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간 책을 잘 읽지 못한 데 대한 스스로의 변명은 있었다.
나는 분명 책을 많이 읽던 시대엔 신문을 많이 읽지 못했었다.
어차피 동일한 시간을 투자하여 무언가 읽을 수 있다면
누군가는 책을 읽는 것이고, 누군가는 신문을 읽는 것일 뿐이라고 변명했다.
나는 책을 읽지 않는 시절엔 대신 신문을 많이 읽었었고,
그 땐 오히려 신문 읽지 않는 사람을 경멸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책도, 신문도 둘 다 많이 읽지는 못하고 있다.
나는 과거의 나에게 경멸 당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귀여니의 소설이 1위를 하는 세상이다.
무엇이 과연 가치일 수 있는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결국은 내가 얕고 짧았던 것이다.
역시 정말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편견과 아집, 오만이 없다.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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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qi2004-12-24 07:21:49
단순히 책을 많이 읽었다고 편견과 아집, 오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
오히려, 책을 읽고 자신의 것으로 그를 체화할 때에야 비로소 균형적인 시각이 생기는 법.
그런 면에서 탁 선생이 훌륭하다는 것이제.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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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