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디어 아이디가 살아났습니다. *^^*
퇴원했을 때처럼 게시판의 첫 글의 제목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곤 '편견으로부터의 자유'란 제목으로 결정을 지었습니다.
누군가처럼 저 역시 20대 초반에 제가 갖고 있는 모든 편견으
로부터 자유롭고 싶었고, 구치소에서 하나하나 생각들을 적어
나갔던 공책의 제목 역시 '편견으로부터의 자유'였습니다. 불
행히도 구치소에서 외부로 그 공책을 갖고 나올 수가 없었음이
아쉽군요. 앞으로 저는 '편견'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할 예정
입니다. 제가 이미 갖고 있는 고정관념과 선입관, 그리고 편견
은 모조리 각개격파해 나갈 생각이니까요. 그것만이 진정한 자
유로 이르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자유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랍니다.
* 검찰의 재조사에 대비하여 본 글은 완전한 허구임을 밝힙니다.
사실 achor는 처분한 후 achor1을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오
늘 여러 일들을 처리하러 갔던 은행에서 achor 아이디로 상당한 액
수의 돈이 계좌이체되어있음을 발견하고 금전적 유혹을 이기지 못해
다시금 achor를 살리고 말았다. 그 돈으로 난 우선 우리 학교 이름
이 크게 써있는 가방을 샀다. 이번 사건을 통해 난 우리 학교의 덕
을 톡톡히 봤기에 그것은 학교에 대한 내 보답이요, 하나의 예의라
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오랫만에 다시 보게된 이 아름다운
세상을 그 자랑스러운 가방을 맨 채 마구 돌아다녔다.
이 글은 이번 사건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글이다. 구치소에서 겪은
많은 에피소드들은 간혹 떠벌리겠지만 사건에 대한 언급은 쉽게 할
수가 없다. 그 이유조차 너희들에게 말할 수 없는데 조금이나마 끄
적어본다면 이번 사건은 결코 일어날 수 없던 의외의 결과를 발생시
켜 검찰쪽에 많은 원성을 사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측의 조사과정에
서 '칼사사'의 존재가 드러난 이상, 또 서울지방법원 서부지검의 검
사들의 자존심을 완전히 구겨놓은 결과로 일단락 짓게 된 이상 혹시
나 모를 검찰의 조사는 두렵기만 하다. 그러기에 이 글은 완전한 허
구임을 우선 밝힐 수 밖에 없는 게다.
1997년 7월 23일 23시 30분 경 신촌에서 방황
1997년 7월 23일 23시 40분 경 마포경찰서 소속 기동대의 5-6명의 경
찰들에게 체포
1997년 7월 24일 09시 00분 경 마포경찰서 유치장에 수감
1997년 7월 31일 서부지검을 통해 영등포구치소로 이송
1997년 8월 09일 기소 1차 연기
1997년 8월 14일 피해자와 합의
1997년 8월 16일 15시 30분 경 기소취소로 출감
7월 23일 난 진호와 포항행 심야좌석 표를 예매한 후
18시 30분 경 정목, 정원과 성균관대학교 앞에서 만나
정원으로부터 저녁으로 카레덮밥을 뜯어냈다.
그리곤 잠시 아처제국(자취방)에 들려 휴식을 취한 후
여러 과정을 거쳐 신촌에 도착했다.
신촌에서 방황하고 있던 중에 피해자의 신고로
마포경찰서 소속 기동대에 의하여 체포되어 마포경찰서로 이동했다.
당시 피해자와 피의자의 진술이 상이하였으나
피해자의 진술이 우리측의 진술보다는 월등히 신용이 있었다.
물론 피해자의 진술을 우선시 하기도 하였으나
대학생이라는 신분의 우리였지만 우리의 겉모습은
그 누가 봐도 일반적인 대학생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빨간 머리에 나시티를 걸치고, 힙합바지와 치렁치렁한 여러 개의 목걸이,
여러 개의 잡다한 반지, 그리고 귀찌 등
이런 모습으로는 그 누가 봐도 우리의 말은
피해자의 말보다 신용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마포경찰서에서 24일 아침을 맞이했고,
9시 경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
연락을 받고 오신 부모님께서 여러 모로 손을 쓰려 하셨으나
피해자의 작은 아버님께서 고위 경찰이신 덕에
우리측의 힘이 들어가기도 전에
검찰로 사건이 넘어가 버렸다.
일단 검찰로 사건이 넘어가면서 상당히 힘든 게임이었다.
게다가 많은 부분의 사건이 그렇듯이
피해자와의 합의가 우선 되어야 하는데
변호사의 말에 의하면 피해자의 어떤 피해의식 때문에
결코 합의를 안 해줄 태세였다.
또한 우리 역시 그런 피해자와는 굽혀가면서
합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마 우리는 유치장과 구치소에서 시간을 보내면 되었지만
그 외부에서 부모님과 변호사는 실로 피를 말리는 싸움이었다.
우리의 죄가 최소 7년, 최대 무기의 중형의 죄였기에
합의가 되더라도 전과를 남기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때부터의 싸움은 완전히 뒷힘의 싸움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피해자의 연줄은 정말 대단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고위 경찰을 비롯하여 변호사, 심지어 감사원까지
줄이 닿아있던 피해자와의 싸움은
변호사가 "대통령이 부탁해도 안된다"라고 포기하였듯이
가망성이 희박하였다.
변호사가 포기하자 부모님이 적극 나서기 시작하셨다.
다행히 연줄이 닿았던 검찰쪽 최고직인 검찰총장 덕분에
극히 이례적인 일로 검사까지 교체되며
무죄의 압력을 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14일 출감이 예상되었으나 그 때 다시
피해자 쪽의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사돈이 변호사였던 피해자쪽의 방해로 인하여 다시 출감이 지연되었고
다시금 우리쪽의 압력이 가해져
겨우 16일 우리는 출감할 수 있었다.
1. 경찰의 조사에서는 '칼사사'를 피할 수 있었으나 검찰의 조사에서
는 '칼사사'가 밝혀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achor Co.는 드러나지 않
았으므로 아직 achor Co.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안심해
도 된다는 점을 밝힌다.
2. 현재 전두한 전 대통령의 변호를 맡는 등 국내 최고의 변호사 사무
실에서 변호사를 구했지만 변호사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포기해 버리
고 말았다. 그렇지만 실력으로 안 되니 보통의 변호사답지 않게 몸
서 새벽까지 따라다니고, 무릎꿇고 눈물로써 호소했던 이율 변호사
님께 무척이나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3. 그 누구보다도 애을 쓰신 분은 다름아닌 부모님들이시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건 해결을 위해서 고생하신 부모님들께 그 어떤 말로
도 고마움을 표시할 수는 없을 게다. 난 독립해서 내 힘으로 살아가
고 싶었으나 독립 이후 정신적인 면이나 물질적인 면이나 더욱 부모
님께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된 내 모습이 부끄럽다.
4. 서부지검은 우리 사건으로 상당히 상태가 안 좋아졌다. 무죄가 먹
혀들지 않자 검사가 바뀌기도 했고, 이미 압력으로 무죄가 결정된
사건을 허수아비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맡으려 하지 않았던, 또한
절대 기소취소가 불가능했던 사건을 가능하게 만든 사건이었으니 말
이다.
5. 유치장에서의 무료했던 것과는 달리 구치소에서는 정말 많은 것들
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내가 살고 있던 세계와는 다른, 그동안 간접
적으로 밖에 접할 수 없던 세계를 직접 접할 수 있었고, 많은 친구
들과 여러가지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범죄나 여성 등 세상을
보는 안목 또한 보다 넓어졌다고 확신하고 있다. 개인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내겐 충분히 일생에 있어서 경험해 볼 만한 경험이었다
고 생각하고 있다.
6. 구치소에서의 생활이 결코 부끄럽지는 않다. 난 당당하게 그 누구
에게도 내가 구치소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고, 내 삶에 있어서 이런
경험이 있었음이 다행스럽다. 다만 나를 위해 나보다도 더욱 애를
쓰신 주위 사람들께 미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