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he] 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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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지도 ( Hit: 209 Vote: 8 )



어젯밤의 일이다.

자정이 다 된 시간에 갑자기 새우깡이 먹고 싶다는 욕
구가 강하게 일어, 나는 잠자리를 걷어내고 가까운 편의
점으로 향했다.

언덕진 길을 오르락 내리락 몇번하다보니 편의점이 보
였고 나는 준비한 400원을 내고 새우깡 한 봉지를 샀다.
새우깡을 사서 돌아오는길,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
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술집이 많은 길을 따라 집을 올라오는데, 밤이 깊어서
끊기기 직전의 버스를 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려고 발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이런 풍경을 좋
아했기에 흠흠한 미소를 흘리며 길을 걸었다.

"저, 초면에 죄송하지만 담배있으신가요?"

희부옇게 마지막 빛을 보내고있는 어느 술집 앞을 지
나가고 있는데 어떤 사내가 내게 건넨 말이다.

나는 별 대꾸없이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 한 개비를
그 사내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무슨 담배지요?"

주는대로 그냥 받아 필 것이지 무얼 그렇게 묻는거야?
아무튼 나는 시큰둥하게 답을 해주었다.

"입생로랑입니다."

그 사내 잠시 눈을 흘긴다.

"아니,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아무튼 감사히 피겠습
니다."

나는 잠시 어이가 없었다. 그 사내는 잠시 흠흠, 하며
헛기침을 몇번하더니 술집이 즐비한 협로를 따라 어디론
가 사라졌다.

이상한 놈 다있군. 나는 다시 집을 향해 날라갔다. 조
금 걷다보니 저기 앞에 또 정체불명의 사내가 내게 접근
을 한다.

"저, 죄송한데 담배 한 개비있으면 빌립시다."

담배가 두개씩이나 줄어드는게 약간 아쉬웠지만 동방
예의지국에서 담배 한 개비 아깝다고 매몰하게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다시 주머니
를 뒤적거렸다.

"이거 무슨 담배지요?"

오늘따라 시비거는 사람이 왜이리 많지?

"88입니다."

추운 날씨에 얼른 집에 들어가 이불 깔고 새우깡을 먹
고 싶은 생각에 나는 대충 답을 해 주었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술이 머리끝까지 올라 걷지도 못하고 휘청거리는
사람과 상대를 해봐야 득될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88은 이렇게 길지 않은데?"

"88 마일드 디럭스 입니다."

"88 마일드 디럭스는 이렇게 가늘지 않은데?"

"경제가 어려워서 작게 만드는 모양이죠."

이 사람 언제까지 시비를 걸 생각인가. 가는 사람 길
막고 이게 뭐하는 추태란 말인가.

이내 그 사내는 담배 필터 부분을 유심히 살피더니 말
을 이었다.

"어라? 이거 입생로랑?"

더 이상 상대해서 뭐하냐는 생각이 들어 나는 그 사내
를 무시하고 발뒤축을 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어이! 이봐요! 이거 입생로랑 아닙니까?"

만취한 상태라서 눈에 보이는게 없는건지, 아무튼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네. 맞아요. 입생로랑입니다."

"아니. 이 사람이 때가 지금 어느 때인데? 양담배야?"

벌겋고 촛점이 안 잡히 옴팡눈을 하고 그 사내는 비틀거
리며 내게 접근하더니 이내 내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이걸
어쩐다? 취한 사람이니 내가 참아야지!

"아저씨, 왜 그러세요. 다음부턴 국산 담배 필게요. 그
냥 가는 길이나 어서 가세요."

"아니, 이 사람이 나가지고 놀리나? 나 취했다고 무시하
려나본데, 어림없어! 나 이래뵈도 M방송국 PD로 유명한 쇼
프로그램도 몇개 했던 놈이라구!"

"네, 알았으니까 어서 갈 길이나 가시죠."

"갈 길? 갈 길..."

사내는 내 어깨에 올려놓은 손을 뗄 생각은 안하고 잠시
고개를 떨구더니 곧 고개를 들고 능글능글하게 미소를 짓
는다. 그리고 퍽!

배의 통증을 겨우 겨우 참으며 나는 그 사내를 뿌리치고
배를 움켜쥐었다.

"어쭈! 한 대 맞더니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시는구만! 이
게 감히 사람을 밀쳐!"

굉장히 기분이 나쁘고 황당했지만 나는 그냥 재수가 없
으려니하고 그 사내를 멀리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시작되었다. 다시 퍽!

주변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다른 무리중 한 사람이 정의롭
게 나서서 만취한 그 사내의 뒷덜미를 강하게 내리친 것이다.

"아니, 이 사람이 보자보자하니까! 왜 괜히 지나가는 사
람을 잡고 행패야! 행패는!"

좀 떨어진 거리에서 보았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정
의로운 사내 역시 만취되어 비틀거리고 있었던것같다.

"이건 또 뭐야? 좋다! 좋아. 다 덤벼! 오늘 너네 다 제
삿날인줄 알아!"

이제 싸움은 크게 벌어질 태세다. 정의로운 사내쪽의 5~6명
과 내게 시비를 걸었던 쪽의 3~4명의 무리가 한 자리에서, 싸
움을 준비하는 두 주인공을 말리거니 부추기거니 하면서 온갖
욕설을 해대고 있다.

진정한 주인공은 이런데서 빛을 발하는 법! 나는 가까이
에 있는 전화박스안에 들어가 112를 눌렀다.

"경찰서죠? 여기 취한 사람들이 크게 싸울 것 같은 분위
기인데, 어서 와서 말려주세요!"

"네? 어딥니까?"

"여기는 어디어디인데, 거의 10명정도 되는 것 같아요!
정말 크게 싸움이 일어날지도 모르겠군요!"

얼레?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조화인고? 수화기 너머의 상
대방이 전화를 냅다 끊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발닦고 잠이
나 자슈!하는 매몰한 한 마디를 남긴 채.

정말 야멸스런 경찰관이군! 나는 다시 112를 눌렀다. 방
금 전화를 끊었던 그 사내다.

"여보세요! 여기 싸움이 일어난다는데 그렇게 끊어버리
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 사람아! 장소를 말하라고 했더니, '어디어디'라고
하면 어떻게 알아! 장난 전화하려면 짱개집에나 하쇼! 우
리는 이 나라의 방범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란 말이요!"

그랬군. 장소를 정확히 말하지 않았군.

"아, 죄송합니다. 여기 혜화로터리 있는 곳입니다. 아무
쪼록 얼른 와 주세요!"

싸움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3분 정도가 지나자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경찰차가 도착했다. 내게 시비
를 걸었던 사내와 의협심 강한 사내는 벌써 몇대를 주고
받았느지 몰골이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정의로운 사내가 더
취했었는지 아니면 원래 싸움도 못하면서 마음씨만 좋은것
인지, 아무튼 더 힘이 없어보였고 코에서도 피를 흘리고
있었다.

경찰차에서 제복을 입은 세명의 경찰관이 내리고 이 둘
을 차에 태웠다. 둘 다 서로 잘못한게 없다고 우기며 승차
를 거부했지만 말끔한 정신에 힘까지 세보이는 경찰관이
억지로 차에 밀어넣는데는 당해내지 못했다.

나도 경찰차에 탔다. 정의로운 사내가 나를 지목하면서
이 사건의 핵심인물이라고 불어버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차 안은 6명의 사람으로 꽉 차 버렸기에 나는 엉덩이를 공
중에 띄운 채 있어야했다.

경찰서에서는 결국 그 두 사내 모두 실수를 했다는 판결
을 내렸다. 그리고 30분 정도가 지나 우리는 모두 그냥 없
었던 일로 하자고 합의를 했다. 내게 시비를 걸었돈 M방송
국의 PD도 허리를 깊게 구부리며 사죄를 했다. 그러더니 한
숨 반에 눈물 반을 내며 희안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다지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사내의 얼굴을 보니 우
리 모두 경청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사내는
아직도 술이 덜 깨었는지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하기 시
작했는데, 첫 마디와 끝 마디는 모두 '억조창생' 이었다.
정말 괴상한 사내다.

"억조창생중에 한 사람! 저 강성곤은 말임다, 정말이지
대책 안 서는 놈임다. 전 정말 협잡꾼임다. 작년 여름즈음
에 말이죠, TV를 보다가 우연히 정말 예쁜 여가수들을 보
았죠. 댄스 그룹이었는데 이름은 SES 였슴다. 그 때 저는
대학 졸업반으로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죠.

저, M방송국의 PD임다. 취업 준비를 하던 그 때는 어리
석어서 SES를 보았으면 하는 바람에 또, 다른 예쁜 텔런트
혹은 유명인들을 보고자 하는 마음에 방송국에 입사를 했
슴다.

제법 학교 성적도 좋았고 방송국의 PD란 직업도 안정적
인 것 같았기 때문임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어제였슴다.

SES 맴버 중 한명인 쿠진이란 여자와 정사를 나누고야
말았던 것임다. 아는 선배를 통해 가요 인기 순위를 어떻
게든 수를 써서 조작해주겠다고 언질을 하고 그녀와 어젯
밤을 보냈슴다. 의외로 순순히 넘어오더군요.

생각해 보십쇼! 다른 사람들은 화면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수많은 남자들의 동경의 여자과 관계를 맺었으니!

물론 가요 인기 순위를 조작한다는건 말단 PD인 저로서
는 어림도 없는 일임다. 아니,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어도
순위 조작은 큰 모험이죠. 저는 그저 그녀를 한 번 안아보
겠다는 생각에 거짓말을 한 것입죠.

그런데...

그녀는 다 알고 있었슴다. 나같은 놈은 순위를 조작해줄
능력이 없다는걸 말임다. 다음 날 아침 그녀가 다 알고 있
었노라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물었죠. 그럼
왜 나와 잠을 같이 잤냐고!

그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제가 잘 생겼지 때문이라
고 했슴다! 허허허! 정말 기가 막히는 노릇이었슴다!

아무튼 저는 서둘러 옷을 챙겨입고 담당 프로그램을 준
비하기 위해 방송국으로 향했슴다. 그리고 방송국에서 그
녀의 호출기에 오늘 밤 다시 만나자는 메시지를 남겼슴다.

그랬더니 그녀는 제 호출기에 '병신'이라는 메시지만 휑
뎅그렁하게 녹음해 놓았더군요! 그래서 저도 그녀의 호출
기에 '미친년'이라고 녹음해 놓았슴다.

정말 기분이 너무 더러워서 오늘 술을 좀 과하게 마셨나
봄다. 이해해 주십쇼. 억조창생중 한 명! 저 강성곤! 치사
하고 더러운 놈이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는 놈임다!"

일단 그는 여기서 말을 잠시 멈추더니 거슴츠레한 눈으
로 나를 쳐다보며 넉살좋게 몇시냐고 물어보았다.

"새벽 한시 반입니다."

나는 짤막하게 답을 해 주었다. 그 사내는 흐음,하며 크
게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죄송함다. 대충 합의를 보았으니 저는 이만 가봐야 겠
슴다. 좀 있다 새벽 2시엔 SES중 한 명인 뿌다란 여자와 K
호텔에서 약속이 있슴다. 죄송함다."

사내는 몇번 고개를 떨구더니 금새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와 정의로운 사내, 그리고 경찰관1, 경찰관2, 경찰관3은
어안이 벙벙하게 그 PD라는 사람의 뒷모습만 쳐다보고 있
었다.


이상이 내가 새우깡을 사들고 오다 어떤 사내에게 담배
를 건네줄 때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본문 내용은 9,919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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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2/26/2009 00:56:26
Last Modified: 08/23/2021 11:4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