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일요일 오전의 외출

작성자  
   achor ( Hit: 162 Vote: 1 )

1

무척이나 흐린 날씨였다.

언제라도 포근하게 느껴지는 일요일 아침에
한강변에서 요트를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나마 기분이 풀렸었는데
다가올 결과를 생각하니 이내 다시 우울해졌다.

그리하여 비디오나 볼 생각에 집으로 향했으나
문득 요즘 책을 별로 읽지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무작정 서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왠지 좋아하지도 않는 시집이 읽고 싶어
시집 코너로 갔더니만
20대 중반의 여인들 여러 명이서 모여
시끄럽게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들을 뒤로 하고 오랜만에 안경을 낀 채
이 책 저 책 살펴보다가
한국 최초로 번역된 독일 시인 브레히트의 시집도 발견하였고,

아... 또!
좋아하는 작가, 박일문의 시집도 발견할 수 있었다.

'병영일기'라는 시집이 그의 유일한 시집인 줄 알았는데
1979-1993년까지 시 모음집인 '함께 보낸 날들'을
발견했을 때 난 환희를 느낄 정도였다.

60년 성석제, 61년 박일문 등
60년대 産 상주 태생들의 글을 조금 보다가
다시 소설책 코너로 가서 무라카미 류를 살펴보았다.

지난 시절 'In the miso soup'의 감흥이 아직 남아있기에
기회가 닿으면 꼭 다시 그의 책을 읽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내 눈길을 끈 책은
그가 24살 때 일본문단을 휩쓸며 등단했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였다.

24살이란 나이...
비단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세상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20대에 무언가 시작을 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난 조금은 조급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한명회나 강태공을 되새기며
너무 조급해 하지는 말자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었다.

그렇게 몇 권의 책을 구입하고 돌아오니
중국에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일요일에 편지라니, 의외였지만
꽤나 반가운 편지였다.

그녀 또한 나와 같은 나이에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렇지만 역시 조급해 하지는 않겠다고 되뇌었다.

동화책 이면의 이야기는 역시 비극적임을
난 알고 있으므로...










2

내가 아직 스무살 무렵의 젊은 나이였을 때
나는 일탈과 전위에 몰두해 있으면서도
늘 또다른 세계를 갈망하고 있었다.

내 눈에 비치는 세상은 더없이 낯설었고,
권태와 無의 심연에 깔린 살얼음 위를
나와 동년배들은 걸어가고 있는 듯했다.

검은 새.

어떤 검은 새의 날개가 늘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따라다니는 듯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갈 가능성을 언제나 갖고 있었다.

이 사회가 자랑하여 마지않는 성공이라든가 물질적인 부의 축적은
우리에게 아무런 설득력도 갖고 있지 못했다.
더구나 정치적인 구호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어떤 친구는 마약과 섹스에 빠져들었고,
어떤 친구는 사이버 세계에 몸을 던졌으며,
어떤 친구는 전위 예술 같은 것에 젊음을 탕진했다.

그러나 문득 그러한 것들의 환상에서 깨어날 때면
우리는 바다 멀리까지 헤엄쳐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처럼
덧없는 모래사장에 지친 몸을 나무 둥치와도 같이 쓰러뜨리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는가?
더러는 감옥에 가고,
더러는 정말 인도로, 그 정신적인 환영의 세계로 도망치기도 했지만
사회는 달라지지 않았고, 우리 자신만이 달라졌다.

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는 패배했다.
검은 새가 우리를 집어삼킨 것이다.

그때 나와 내 동년배들은 어디로 갈 수 있었는가?
탈출구가 어디에 있는가?
알베르 까뮈의 말대로

"누가 우리를 위해 증언해 줄 것인가?
우리의 작품인가, 아니면 대체 무엇인가,
단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그러나 사랑은 침묵이다. 우리는 모두 남모르게 죽어간다"











空日陸森 Fucking 우레 건아처


본문 내용은 9,783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Post: https://achor.net/board/c44_free/21315
Trackback: https://achor.net/tb/c44_free/21315

카카오톡 공유 보내기 버튼 LINE it! 밴드공유 Naver Blog Share Button
Please log in first to leave a comment.


Tag


 28156   1482   408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   댓글들에 오류가 있습니다 [6] achor 2007/12/0856066
20423   [롼 ★] 시스템점검 elf3 1998/05/20167
20422   [주연] 정장. kokids 1998/05/20205
20421   [짭~*] re : 29102 . 아처 . rhee77 1998/05/20211
20420   [짭~*] 토욜에 비온대자너. rhee77 1998/05/20210
20419   (아처) 세 남자 이야기 achor 1998/05/20199
20418   (아처) 사회의 문턱에 서서... achor 1998/05/20210
20417   색마를 응징하기 위하여 수정판 이다지도 1998/05/20204
20416   (아처) 색마를 응징하기 위하여... achor 1998/05/20214
20415   [롼 ★] 성년의 날.. elf3 1998/05/19161
20414   (아처) 문화일기 73 CONSPIRACY THEORY achor 1998/05/19167
20413   (아처) 1998년, 성년의 날 achor 1998/05/19183
20412   [시삽/무까끼] 죄송~ 칼사사 회원분들께.. loangram 1998/05/18181
20411   [부샵3] 칼라 5월정모입니다^^ limdo 1998/05/18159
20410   [지니]소풍... 후발대도 가능하면... 한아로 1998/05/18195
20409   [q/참가] 소풍이여. ara777 1998/05/18159
20408   [퍼온글]타이타닉 속편 한국영화 결정. 우하핫. 유라큐라 1998/05/18154
20407   [svn] 소풍~ 참가~ aram3 1998/05/17161
20406   (아처) 일요일 오전의 외출 achor 1998/05/17162
20405   [덧니걸]땅끝에서면 바다가... 유라큐라 1998/05/17159
    404  405  406  407  408  409  410  411  412  413     

  당신의 추억

ID  

  그날의 추억

Date  

First Written: 02/26/2009 00:56:26
Last Modified: 08/23/2021 11:4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