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어제 돌아와서 통신에서 그렇게
빨리 박정현 2집을 들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무슨 이유일지는
모르겠지만 1시간은 10분 정도의 시간만에 모두 지나가 버렸다.
......
사실 아무 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고, 문득문득 떠오르는 몇 가지의 기억들-그것이 무엇인지도 사실은
정확하지 않다-은 머리 속에 떠오르기가 무섭게 잊으려고 노력한다.
난 가끔 멋적을 때, 그리고 기억해내기 부끄러운 일들이 있으면 가끔
나도 모르게 입으로 딴 소리를 하곤 한다. - 사람들이 대부분 그런다고는
한다만 - 그럴 때면 내가 그런 행동을 취한다는 게 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래서 난 오늘 메일 박스를 보면서 곤혹을 치렀다. '오늘 왜 이렇게
중얼거려' 라며 옆에서 이상하다는 듯이 물어보면 '아.. 아냐 그냥' 하면서
얼버무리기도 하고 '뭐 살다보면 다 그래' 하면서 미소 짓기도 했다.
......
97년말부터 지금까지 저장되어있던 mybox의 내용을 지웠다. 사실 지속적으로
지워온 건 사실이지만 남겨두어야 할 것만 같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오늘을
기점으로 싹 지웠다. 지금 mybox에 남아 있는 건 몇 가지 도움이 될 것
같은 글귀들 몇 개 뿐.
......
며칠전 집에 가서 한 이년째 보지 않고 쌓아두기만 한 편지함을 힐끗
쳐다보았다. 빛바랜 편지지도 있고,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한 사람들의 편지도 가득했다. 이 편지들을 이젠 슬슬 정리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
과거를 너무 소중히 생각한 탓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난 과거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 하면서도 내 마음 한구석, 그리고 내 삶 일부분으로
그 과거를 언제나 간직하며 살았던 게다. 그래서 나의 인간 관계에도
무의식중에 내 과거와의 연결 고리를 찾으려 했던 것이고 그 과거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거부 반응을 느꼈던 것만큼은 틀림없다.
시간이 흘러 스물셋 반이 되면서 차츰 하나둘씩 깨달아가고 있다. 이제는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좋다 나쁘다는 가치 판단을 개입시킬
수는 없지만, 잠재되어 있는 그런 잣대가 좋든 나쁘든 개입되고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인 것만 같다.
......
내 친구 중 하나는 벌써 다섯살 짜리 딸을 가진 어머니이고, 또 한 친구는
내년에 결혼을 한단다. 벌써 내 나이가 그렇게 되었다는 게 무섭기도
하고 한 때 내 가치관을 지배했던 사람들이 모두들 잘 되어 각기 자기
자신의 삶에서 충실하게 지내고 있음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국민학교 시절,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도 못한채 그 자리에 서서 소변을
본 그 아이는 이미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고, 내가 첫키스를 했던
그 아이도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