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민과 있을 때면 대개 독특한 일이 생겨 삶의 색다른 즐
거움을 느끼곤 한다.
오늘, 오후 용민이 찾아왔다.
함께 점심하기로 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인간,
느지막이 일어나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단 연락을 했
다. 헐레벌떡 달려나가 짬뽕과 짜장면으로 배를 채운 후 분
수대 앞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한낮 소나기가 한차례 쏟아진 터라 공기가 꽤나 습했고,
날은 무더워 불쾌지수는 높았지만 분위기가 너무 평화로웠기
에 우리 앞에 알짱거리던 여호와의 증인도 그다지 귀찮게 느
껴지진 않았다.
이야기꺼리야 뻔하지, 또 여자 이야기. --;
우리는 옛 추억의 여인들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가슴의 허
전한 아쉬움을 달랬다. --+
오후 내내 그렇게 시간을 때우다 팥빙수나 먹자며 근처의
한 커피숍을 찾아갔다. MUFFIN이란 이름이 달린 그곳은 상당
히 모던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순백색 바탕 속에 심플한
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전화가 왔다. 오후 내내 땡깐 게 걸렸다고 밑의 애들한테
걸려온 전화였다. --+ 즉시 달려가 얼굴 한 번 비춰주고 아
예 퇴근 준비를 마친 후 다시 왔더니 용민은 고민하고 있었
다.
고민인즉, 그곳 아르바이트 생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데 연
락처를 물어볼까, 말까 걱정이라는 것이었다. 푸하하. 난 안
다. 용민은 적어도 나와 함께 있을 때의 이런 경우라면 100%
실패했었다. (그의 말로는 혼자 있을 땐 성공한 적도 꽤 된
다고 한다. 도무지 믿을 순 없지만. --;) 끊임없는 용민, 그
의 줄기찬 도전은 언젠가 빛을 발하게 될 거라 믿으며 그를
다시금 응원했다. --+
귀대 적정 시간을 훨씬 지나 수십 분을 고민한 그는 드디
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난 손을 들어 그녀를 불렀고, 용
민은 말했다.
저기요, 연락처 좀 가르쳐 주시겠어요?
예?
연락처 말이에요...
... 아, 이곳 연락처요?
아뇨. 그것 말고...
제 연락처요?
예...
...
안 되나요?
예...
푸하하. 오늘도 용민, 여전히 차였다. ^^*
그런데 그답지 않게 우울한 표정이었다. 마지막 군바리로
서의 추억을 멋지게 남겼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입대한 사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고향의 꽃순
이를 아주 닮았다고 내게 고백했다.
난 앞 사무실 민주씨를 생각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
받았다. --; 이제 그녀는 사랑도, 호감도, 아무 것도 아니
다. 오직 자존심. !_! 그녀는 내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기
고 있다. !_!
사실 그녀가 유달리 예쁜 건 아니다. 다만 개 중 내 눈에
는 최고라는 건데(너무 말라서 그녈 안 좋아하는 남자들도
많은 편이다. --;), 그녀는 너무 도도하다.
이상하게도 그녀 앞에선 내 기량을 전적으로 선보일 수가
없다. 그녀의 남성혐오증 비슷한 행동들이 날 완전히 가로막
고 서 있다. 용민의 슬픔을 곁에서 지켜보자니 나 또한 차여
보고 싶어졌다.
함께 민주씨 얘기를 하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정말
민주씨가 내 앞을 지나갔다. 헉! 너무 급작스럽게 발생한 일
이라 난 어리둥절했었는데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토
요일, 오후 2시, MUFFIN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을 하려 했을
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난 후였다. !_!
그리곤 용민은 귀대했다.
학원에 있을 때 전화가 왔었는데 흐흐, 역시 용민 귀대가
늦어져서 부대에서 온 연락이었다. 제대 이틀 남겨두고 지금
쯤 좇뺑이 구르고 있겠군. 아, 통쾌해. ^^*
우리는 내기를 했다. 용민의 MUFFIN 그녀와 나의 앞 사무
실 민주씨 중 누가 먼저 목표물을 사로 잡을 수 있는지에 관
하여. 지금 같아선 1차대전, 수현씨와 혜영씨처럼 우리 모두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끝나버릴 것 같기도 하다. --+
이틀 후면 용민은 제대다. 아스라이 1997년, 세 번의 이별
이 아른거린다. 용민도, 성훈도 이제 곧 돌아오겠지만 아무
래도 영미는 결코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