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부터 피곤해서 잘 기억은 안난다. 영선 누나 주려고 향수 가게
에 들어가서 향수를 고른다. 무얼 사야할지 잘 모르고 일단 들어왔
다. 레몬 향기가 나는데 이게 왠지 모르게 좋았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향수 냄새들을 맡아 나가는데 맘에 딱 드는 거-아마도 레몬
향기-는 없다. 조급해진다. 일일이 다 냄새 맡기도 귀찮아진다. 대
충 맡아 나가는데 별로 마음에 드는 게 없다. 한 두 순배 정도 돌
아가며 냄새 맡다 보니 복합적으로 조급한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드는
데 자꾸 잊어버린다. 무슨 생각인지 잘 모르겠다. 아, 이렇게 냄새
를 맡다 보면 코가 피곤해지거나 향수 냄새에 익숙해져서 냄새를 제
대로 못맡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점원이 뭐할 거냐고 묻길래 친구
한테 선물할 거라고 대답한다. 문닫을 시간(5시)이 되어가서 점원이
급해 하는 것 같다. 그렇게까지 조급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편안하지
도 않다. 레몬향에 끌렸다고 생각하고 색깔이나마 비슷한 향수를 사
려고 했는데, 점원이 그걸 다 치워버렸다고 말한다-내가 고르기 직전
에 진열대에 그 향수가 있던 자리가 비워져 있고 그걸 알고 난 뒤에
그 향수를 사기로 결정하고 아쉬워했다-. 결국 대충 보라색 향수를
사서 포장해 달라고 한다. pcs처럼 생긴 향수병에 희진이가 5시 05분
이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나는 그가 이 가게의 단골이라고 생각한다.
포장을 해주는데 선물용 포장지를 해주지 않고 아무 박스에나 대충
싸준다. 나는 향수나 깨끗한 포장, 선물의 집 같은 것들, 그러니까
내가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 당했다고 생각했던 고등학교 당시 친구
들의 문화와 영영 거리가 멀 줄 알았다. 향수나 포장은 아마 내가
그들 안에 포함되는 문제와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때문에 아무 박
스에나 포장해 줬을 때, 나는 실망하고 약간 낙담한 것 같다. 계산
을 하는데 희진이가 옆에 선다-그가 향수 가게 문닫을 시간 너머에
가게에 들리겠다고 pcs처럼 생긴 가게 향수병에 문자를 보냈으므로
나는 그가 여기 단골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희진이에게서 연상하
는 그런 내용과 달리 꿈의 희진이는 살이 많이 찌고 무언가 불쾌한
감정을 유발한다. 이 불쾌감은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을
남에게 투사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왔던, 그런 것이다. 그의
남자 친구들과 인사를 한다. 왠지 낙담된 분위기에서 그들과 만났으
므로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어진다. 경북대에서의 느낌과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