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5년의 긴 여정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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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당신은 커서 무엇이 되고 싶습니까, 하며 나
이에 걸맞지 않는 질문을 던져준다면 나는 여전히 첫째는 음
악가요, 그 둘째는 소설가라고 답변을 할 것이다. 언젠가 나
는 글쓰는 일을 참 좋아했었더랬다.

그러나 이제는 글을 쓴다는 게 그리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
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싫은 것은 글을 쓰고 난 후에 다시 읽
어보는 그 순간이다. 언젠가 나는 내가 쓰고 난 글에 만족했
던 적도 있었더랬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건 그런 의미다. 먹는 게 없으니 뱉어
낼 것도 없는 건 당연한 이치.

5년 전에 나는, 제대 후의 삶은 없을 거라 단정하고 있었
다. 그 시절 내가 무엇보다 사랑했던 나의 (감히) 탐미적이
고, (감히) 쾌락적이었던 삶의 자유는 군대를 거치곤 난 이
후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 대
신에 해야만 하는 일은 하는 게 두려웠던 게다. 그냥 그렇게
사회의 범인처럼 살아가는 것이.

며칠 전 선영과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다. 선영은 내가 주
섬주섬 늘어놓는 이야기에서 나의 변절을 발견하곤 놀란 표
정을 지었다. 어쩌면 나는 선영과 5년 전에 친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5년 전 나는 돈도, 건강도, 학점도 갖고 있질 못했지만 대
신 무엇보다 커다란 자유와 무엇보다 원대한 꿈과 자신감,
용기 뭐 그런 것들을 갖고 있었다. 그 시절 또래들과는 달리
내 삶을 내가 선택했고, 내가 일구어 나갔다는 것은 아직도
나의 큰 자랑거리이다. 물론 사실은 단지 철저한 운명론자로
서 주어진 내 운명대로 나아갔던 것뿐이었지만.

그리고 내겐 아주 좋은 여자친구가 있었더랬다. 우리는 이
제 막 졸업을 하고 성인이라는 위치에 서 있었지만 아직 어
리고 많은 것에 미숙하였었다. 그렇지만 그러기에 우리는 더
욱 좋았다고 회상한다.

그 시절에도 나는 여전히 좋은 남자친구는 아니었다. 언제
나 친구들과 술에 취해있기 일수였고, 그렇지 않다면 다른
여자아이들과 내 허름한 자취방에서 비디오를 보거나 음악을
듣곤 하였으니. 그렇지만 그 아이는 나를 많이 생각해 주었
었다. 내 사소한 말 한 마디에도 감동 받고, 깊은 신뢰를 가
지고 믿어주는 그 아이는 내 자신감의 원천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군대를 가기 얼마 전 나는 그 아이와 헤어졌다. 그
시절 나는 그 아이를 위한 배려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무렵
유행하던 어느 대중가요처럼.

난 내가 말할 때 귀 기울이는 너의 표정이 좋아. 내 말이
라면 어떤 거짓 허풍도 믿을 것 같은 그런 진지한 얼굴, 네
가 날 볼 때마다 난 내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
져. 네가 날 믿는 동안엔 어떤 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이런 날 이해하겠니?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1997년 12월 23일 나는 첫
번째 입대를 한다. 거리에 흘러나오는 캐럴을 들으며. 나는
마치 죽으러 가듯 찹찹한 심정이었다.

그리곤 병역특례가 확정되어 군대에 대한 억압을 떨쳐버리
는 것 같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나와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았던 IMF의 영향을 받게 된다. 내가 가기로 했던 그 컴퓨
터 회사는 IMF로 부도가 났다고 했다.

1998년 9월 7일, 두 번째로 군대에 가기 전까지도 내 삶은
특별히 달라진 게 없었다. 주식을 많이 하셨던 아버지는 IMF
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으셨고, 그다지 많은 대화를 해본 적
없는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 일들은 내 삶처럼 가까이
들려오지 못했다. 나는 그저 첫 번째 입대로 팔아버린 我處
帝國 대신에 친구 자취방에서 비슷하게 살아가는 게 고작이
었다.

그렇게 긴 여정을 마치고 나는 다시 여기에 섰다. 나는 다
시 학생으로 돌아갈 것이고, 자유를 얻을 것이다. 이제 나는
내가 가고픈 곳을 갈 수 있고, 내가 하고픈 일을 할 수 있다
는 이야기. 모든 것을 잃을 것만 같았던 그 시간과 공간에
나는 서있는 게다.

물론 그 시절 생각했던 것처럼 내 삶이 완전히 뒤바꿔버린
건 사실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하릴없이 거리를 거닐지 않
고, 비디오를 보거나 기억하지 못할 만큼 매일 술을 마시지
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 시절 잘못 생각했던 한 가지. 내가
달라졌다고 삶이 훼손된 건 아니라는 것.

그리하여 선영의 배신감은 합당치 않다. 시간은 삶을 변화
시키기 마련이고, 또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도 당연하다. 나
는 이제 학생시절 구석자리에 앉아 항상 잠을 자던 그 친구
처럼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세상을 관조하고 싶다.

고막을 울리는 음악 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고, 오직
개성만을 강조하는 사회, 사회정의 그리고 질서, 공동체 의
식이 무시되는 사회가 싫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말이 싫
고, 규율로 대표되는 법의 준수보다 엽기, 일탈이 대중성을
얻는 문화가 싫다.

그렇지만 지난날의 내 모습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나는 과
거를 후회하지 않겠다는 걸 삶의 좌우명으로 하고 살아간다.
나는 그 순간에 최선을 다했을 내 과거를 사랑한다. 후에 후
회한다 하더라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똑같이 그
렇게 행동할 게다. 그것이 당시로서의 내 최선이기에.

5년이 흘러 나는 다시 비슷한 자리로 돌아간다. 다시 학교
에 다니며 친구들을 만날 것이고, 다시 수업을 들을 것이며
어쩌면 다시 비디오를 보고, 전날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술
을 마실 지도 모른다. 또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나 새로운 사
랑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5년에 걸친 길고 긴 여정을 끝낸 지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나는 병역의 의
무를 마쳤다,는 명제만이 확연하게 내 정신 속에 새겨져 있
을 뿐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 나는 언제나처럼 과
거를 그리워할 것이고, 추억할 것임을 알고 있다.

어느새 5년이 흘렀다. 그 긴 여행을 통해 나도 변했고 세
상도 변했지만 어쨌든 시간을 그렇게 흘러버렸다.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았던 시공에서 나는 지금,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느끼지 못한 채 이렇게.
그저 과거를 추억할 뿐이다.
그것이 긴 여정을 끝낸 내가 또다시 남겨놓는 내 삶, 흔적
의 모든 것이다.

이 순간 서른이 되어있을 내 모습에 모든 것이 다시 끝날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내가 서른이 되고 만다면 아무 것도
훼손되지 않고 단지 내가 변해있을 거란 사실이 왠지 서글프
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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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은 8,817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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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2/26/2009 00:56:26
Last Modified: 08/23/2021 11:4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