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목] 서울 뒷골목 이야기(3) - 연세, 그리고 이화...

작성자  
   오만객기 ( Hit: 293 Vote: 39 )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창천교회에는 경호원들이 나타난다...
소문에는 영부인께서 이 교회를 다니시는 탓이라는데...
그래서 출발시간을 부득불 09시로 잡았지만...
정작 그 날은 경호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3일째 서울바닥을 걸어다니느라 거의 난 폐인의 수준이었다...
금요일에는 종로통을...
토요일에는 안암골을...
그리고...

연세대학교 정문을 출발한 것이 09시 30분...
정문에서 세브란스 쪽으로 빠져 알렌관을 지나 백양로를 역으로 내려온 뒤...
음대를 거쳐 루스채플과 광혜원을 바라본 다음 다시 이과대와 생과대로...
그리고 그 뒤에 있던 옛 언더우드 씨 저택, 일명 마법의 성을 지나...
산길을 타고 학교로 내려와 외솔관과 종합관, 그리고 위당관을 거쳐...
빌링슬리와 연희관을 바라보며 본관으로 내려와 그 앞에서 학교를 조망...

연세대학교 본관, 즉 언더우드관 문 앞에서 학교를 본 적이 있는지?
백양로를 타고 신촌을 굽어볼 수 있는 환상적인 조망...
단순히 중심도로를 타고 양쪽으로 뻗어나간 학교의 구도 때문이 아니라...
이 곳의 지정학적 위치의 절묘함에 대한...
그리고 그 절묘함 속에 담겨있는 여말 선초부터 현대까지의...
역사적 함수관계에 대한 애잔한 느낌까지...

언더우드 상...
1927년에 처음 만들어지고, 1948년에 다시 만들었으며 1955년에 또 만든...
그리고 상 기단석에 남아있던 탄흔...

일제 말, 그네들 식 표현으로 대동아 공영을 위한 성전(聖戰)을 치르기 위해...
이 땅에 있던 쇠붙이란 쇠붙이는 죄다 끌어다 비행기를 만들고 배를 만들 때...
이곳에 있던 동상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연희고지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인천 상륙 이후 계속되는 미군의 정신없는 폭격으로 인해...
동상이 끝내 박살나고 말았던...
그리고 지금...

언더우드관 앞의 조경...
그리고 연희관 앞의 조경...

1970년대까지만 해도 비어있는 공간이었던 이 곳에서...
사람들은 수업과 토론을 병행했다...

1970년대 당시의 학교 건물 구조...
본관인 문과대를 중심으로...
광복관의 법대와 백양관(당시 상경관)의 상대...
용재관에 있던 중앙도서관과 그 옆의 대강당...
연희관에 있던 공대와 이과대...
그리고 청송대와 연세숲...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건물 밖에서 수업과 토론을 병행했고...
그러면서 자유롭게 세상에 대한 분노와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고...
사람들은 모여 밖으로 뛰어나가곤 했다...

언제부턴가 그런 공터에 하나 둘 나무가 심어졌고...
학생들은 그 나무에 염산을 뿌리고 뿌리를 잘라버리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곳에는 조경공사가 진행되었고...
지금은 더 이상 그곳이 또 하나의 교실이었음을 찾을 수 있는...
그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지만...

세월이 지나 모든 이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게 되면서...
새내기라 불리는 사람들은 옛 사람들의 분위기를 몸으로 재현하게 되었다...
연희관 앞 터의 잔디밭이나 언더우드관 앞 빈 터, 혹은 중도 앞에서...
짜장면을 먹고 있는 그들의 모습 속에는...
상황은 달랐지만 그 공간에서 서로를 알아가던...
1970년대의 대학생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던 게다...

광혜원, 연희전문, 연희대학을 거쳐 다시 연세로...
세브란스 병원과 연세대 사이의 묘한 간극...
그리고 그 사이를 메운 듯 메우지 못한 연세 음대와의 또 묘한 간극...

굳게 닫힌 철문 너머의 광혜원...
그리고 그 속에 죽어있는 이 땅의 역사...

1997년까지 청송대에 남아있었던 가재...
한 때는 연세숲의 계곡이라 불리던 이곳에 남아있는 모습이란...
물론 지금은 가재를 더 이상 볼 수도 없지만...

언제부턴가 점점 밀려올라가기 시작한 학교...
그리고 그 속에서 표출되기 시작한 주도권 싸움...
본관에서 밀려난 문과대학과 더 이상 갈 곳 없는 곳으로 밀려난 생과대...
그리고 그 속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시작한 상대와 사과대...

서로 맞지 않는 건물 디자인과 위치 속에서 느껴지는 이 땅의 급작스런 팽창...
그리고 격동의 1970~80년대...

위당관과 종합관에서 느껴지는 1996년 여름의 한계...
그리고 아직도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

기숙사...
정말 갈 곳이 없는 땅에 만들어진 기숙사에서 느껴지는...
지방학생에 대한 연세대학교의 태도...
그리고 그 속에서 보이는 서울 중심주의...

그렇게 우리는 걸어걸어 연세대를 넘어 무악산으로 향했다...
무악정에서 굽어보는 연세대학교와 신촌, 그리고 서울시내...
왜 조선은 이곳을 포기할 수 없었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그리고 무악산 꼭대기...
군 통신탑과 옛 YBS 송신탑, 그리고 봉화대...
꼭대기에서 보이는 마포나루와 서울시내...
그리고 연세와 이화...

산은 그렇게 이어져 있었다...
1996년 여름...
전설처럼 전해 오는 몇몇 학생들의 대장정은 빈 말은 아니었던 게다...
분명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종로까지 산은 그렇게 이어져 있었으니까...

봉원사...
한국 태고종의 거찰...
연세에 밀려 산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오욕의 역사...
대처승...

아직도 봉원사 주위에 남아있는 일본식 가옥과...
새마을 정신이 굳건히 새겨진 새마을 기념비...
그리고 지금도 개축이 계속되고 있는 사찰 내부...
종교와 정치, 그리고 자본의 함수관계...

이화여자대학교...

벨로르는 한 때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땅에 국회의원의 절반이 여자가 될 때까지는 여대가 있어야 해..."

맞는 말이다...
이 땅에는 필경 여대가 필요하다...
제대로 된 여대가...

장로교의 언더우드가 연세를 세웠다면...
감리교의 아펜젤러는 이화를 세웠다...
(이대 옆에 있는 대신교회나 연대 앞 창천교회는 모두 감리교 교회임...)

한 명의 첫 졸업생...
그리고 Ewha Woman's University...

고황경 박사...
일제 치하 수많은 지식인들이 친일행각을 필 때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너희도 쓰는 고(高)씨를 왜 개명해야 하느냐'며 창씨개명을 거부...
아베 총독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던 여걸...

김옥길 박사...
김동길 교수의 누님...
1979년 10월부터 1980년 5월 17일까지 문교부장관에 있었으며...
(김옥길 박사는 스스로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학생들의 정당한 민주화 요구는 수용할 필요가 있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은...
그리고 암으로 투병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아이들과 함께 했던 의인...

이화여대를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난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
조선 여성의 기개, 그리고 그를 이어받은 한국 여인의 강인함...

이화여대는 후문에서 정문까지의 직선거리가 불과 5분 정도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이화는 오각형의 학교구조가 보여주듯...
독특한 학교 문화를 구성했다...

외륜과 내륜...
이 땅에서 소수일 수밖에 없었던 여성...
여성 지식인으로서의 지난했던 삶...
그것을 버텨내기 위해 이들이 선택한 길...

연세에서 내려다보았던 연희2,3동의 고급주택가와 아파트...
그리고 이화에서 내려다본 북아현동의 서민주택가...
웬만해서는 들어가기도 힘든 연세대학교 유치원과...
갓 세워진 건물에 들어있는 이화여자대학교 유치원...

음대 옆에 세워진 중앙도서관...

연세는 건물과 건물을 통로로 잇는 방식을 즐겨썼다면...
이화는 건물의 출입구를 다양하게 만드는 방식을 활용했다...
공간활용의 차이는 곧 문화의 차이...

학생회관과 학생문화관...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오늘, 한국 여대생의 지난한 삶...

멀리서도 너무나 선명히 잘 보이는 '이화여자대학교'가 새겨진...
연세에 김우중기념관과 삼성관이 있고 고려에 아산이학관이 있듯...
이화에도 SK텔레콤관이 있다...
건전한 자본주의와 공생해야 하지만...
자본주의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 땅의 대학...

김활란 박사...
용재가 그랬고 인촌이 그랬듯이 학교를 지키고자 친일을 했다지만...
덕분에 이 땅의 여성 지식인들이 감내해야 하는 그 질곡을 아실는지?

해시계...
그리고 기념비...
유관순의 기개와 이화의 힘...
아!
정녕!

외부인이 쉽사리 찾을 수 없는 구조...
그리고 그리 할 수밖에 없었던 질곡의 역사...

해설문 하나 없이 잔디밭 중간에 놓여진 조상(彫像)...
그리고 결코 찾을 수 없었던 이화 여성의 모습...

차안과 피안의 다리, 이화교...
기차길을 사이에 두고 정문을 지나며...
정문 앞 망부석 앞에서 있었을 수많은 이야기를 뒤로 한 채...

이대 운동장에서 공을 차던 남학생들...
테니스코트에서 테니스를 즐기던 남자들...
그리고 다정히 교정을 누비는 커플들...

고대와 이대, 그리고 연대...
그리고 서울대...

이대생이 꾸미고 다님을 비난하지 말라...
이 땅의 여성이 아니라면...
이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다...

9시간 정도의 산보를 마치고 신촌의 야경을 즐기게 되었을 때...
다시 두 학교를 나란히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화에는 엄청난 힘이 숨어 있었다...
이 땅을 호령하고도 남을 조선여인의 기개가...
바다를 건너 세상을 놀라게 할 고려여인의 자존심이...
겉으로는 부드러우나 속으로는 강인한 한국여인의 힘이...

어쩌면 그 힘이 제대로 분출되었다면...
이화는 한국 제일의 사학이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한국 제일의 여대를 넘어서...)

이 땅의 오욕과 굴절의 역사가...
이른바 힘있는 대학을 곳곳에 분산시켰음에도...
이화와 연세만은 어쩌지 못했던 것처럼...

결국 앞으로도 두 학교는 공생과 도모를 계속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허생의 표현을 빌린다면...
"잘 되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 못해도 반도를 뒤흔들만 하오..."

하지만...
그같은 바램이 이루어지기 너무나 힘들어진 세상...
그리고 2001년 여름, 한국 땅 서울...

p.s.

사실 이화는 벨로르와 함께 가고 싶었던 코스다...
자부심 강한 이화인에게 직접 학교설명을 듣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 더 이 땅을 잘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혹 이 글을 보는 이 중에 내 글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고자 하는 이 있다면...
기꺼이 자유게시판에 글을 올려주길 바라며...


본문 내용은 8,596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Post: https://achor.net/board/c44_free/29039
Trackback: https://achor.net/tb/c44_free/29039

카카오톡 공유 보내기 버튼 LINE it! 밴드공유 Naver Blog Share Button
Please log in first to leave a comment.


Tag


 28156   1482   652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   댓글들에 오류가 있습니다 [6] achor 2007/12/0856364
15787   [두목] 변명이랄까... 오만객기 2001/06/14229
15786   [두목] 병역비리... 오만객기 2001/05/03292
15785   [두목] 불효자는 웁니다... 오만객기 2001/04/16282
15784   [두목] 불효자는 웁니다... 오만객기 2002/02/14344
15783   [두목] 사건 개관... 오만객기 2001/03/21212
15782   [두목] 새해 복 많이 받아... 오만객기 2002/02/11413
15781   [두목] 서울 뒷골목 이야기(3) - 연세, 그리고 이화... 오만객기 2001/08/21293
15780   [두목] 소풍 정모 오실 분들께... 오만객기 2001/10/23294
15779   [두목] 소풍 정모에 대해... 오만객기 2001/10/21296
15778   [두목] 속고 속이기... 오만객기 2001/06/01218
15777   [두목] 송년모임 회비에 관해서... 오만객기 2001/12/25514
15776   [두목] 송년회 합시다... 오만객기 2001/12/03412
15775   [두목] 수강철회, 그리고... 오만객기 2001/04/21284
15774   [두목] 술, 담배, 도박, 여자, 커피... 오만객기 2001/03/31221
15773   [두목] 스물 다섯번째 생일을 맞으며... 오만객기 2001/07/29231
15772   [두목] 슬슬 엠티갈때가 된거 같은데... elf3 2001/02/06207
15771   [두목] 시간표와 돈... 오만객기 2001/03/07280
15770   [두목] 신뢰의 상실에 관하여... 오만객기 2001/06/03222
15769   [두목] 아가씨... 오만객기 2001/11/29321
    648  649  650  651  652  653  654  655  656  657     

  당신의 추억

ID  

  그날의 추억

Date  

First Written: 02/26/2009 00:56:26
Last Modified: 08/23/2021 11:4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