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qi] 그냥 그런 이름의 여행기.

작성자  
   keqi ( Hit: 2051 Vote: 170 )

케사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하기에 앞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 글을 달기에 앞서,
불과 몇 분 전에 정리한 몇 달 전 여행기를 잠시 적기로 한다.

---

세상일이란 참으로 우습다.

계룡대(鷄龍臺) 영문(營門)을 나오며 다시는 충청도 땅을 밟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건만, 충청도에 공장이 두 군데나 있는 회사에 들어간 것도 모자라 몇몇 벗들도 KAIST에 입교하여 대전에 살고 있으니 지금껏 대전을 오르내린 바 여러 번.
그야말로 입과 같이 어리석은 것이 또 있을까.

단순히 역사적인 이유만을 찾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벗의 벗이니 나에게 또한 벗이 되는 이가, 차마 이름조차 부를 수 없을 만큼 그리워하는 사람을, 감히 세 치 혀로 능욕(凌辱)하여 그녀가 이 땅을 버린 지 어언 한 달 가까운 세월. 그를 징치(懲治)하지 않을 수 없었던 벗의 괴로움도 괴로움이었거니와 그 사실을 알았던 나의 참담함이야 어찌 필설로 다 풀 수 있을까마는.

따로 준비한 것은 없었다. 그저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배우고 또한 느낀 것을 가지고 가면 된다고 믿고 있었다. 알고 있는 대로 보인다. 그것이 내 스승님들께 배운 역사를 즐기는 방법이랄까.

결국 그는 우리를 외면하였다. 훗날 다른 자리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지만, 그 날의 외면을 잊을 수는 없었다. 이제 더 이상은 그를 벗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을 것만 같았고, 너무나 아파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탄생한 국가, 조선. 그러나 정치란 참으로 기묘한 것이어서 유학에 대한 해석에 따라 다양한 정치세력이 난무하고 대립하면서 왕조를 이어 왔으니. 대덕문화원과 대덕구청에서 우리 고장의 인물로 꼽은 우암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그 이야기로 들어가도록 한다.

이 땅에 성리학이 들어온 것은 고려 후기, 안 향이라는 학자가 원에서 <주자전서>를 들여와 가르치면서부터다. 이후 고교 역사책에서 한 번쯤 읽어보았을 우탁, 이제현, 이색 등의 학자들이 성리학을 받들어 학문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면서 성리학은 고려의 지식인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학문이 된다.

여말의 성리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져 전개된다. 하나는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포은 계열의 이른바 사림파(士林派)요, 또 하나는 실리와 현실을 중시하는 삼봉 계열의 이른바 사공파(事功派) 또는 훈구파(勳舊派)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계열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한 조선 왕조의 개국 과정에서 전혀 다른 처세로 나타나 구별된다. 포은 계열의 사림파에서 보면 이성계의 혁명은 불의로서 목숨을 바쳐 막아야 할 악이지만, 삼봉 계열의 사공파에서 보면 이성계의 혁명은 시중지도(時中之道)로서의 창업으로 정당시된다. 사림파는 포은 정몽주를 정점으로 야은(冶隱) 길재(吉再),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점필재(粘畢齎) 김종직(金宗直),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져 조선조 성리학의 주류를 이룬다. 또한 사공파는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을 정점으로 권근(權近) 등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이들은 현실 정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정책 개발, 저술, 문화 활동에서 두드러진 기여를 하였다. 대체로 사공파보다 사림파에 더 많은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던 이제까지의 평가는 분명히 일리가 있지만, 사공파의 역사적 의미나 그들의 철학적 가치도 결코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이 조선에서 본격화된 것은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말로 유명한 기묘사화다. 당시 대사헌 겸 세자부빈객 조광조는 과거가 경서를 외우고 시문을 흉내내는 것에 치중함을 비판하고 재능과 행실을 함께 보고 왕이 어진 신하를 뽑을 수 있는 새로운 과거제도를 택할 것을 주장, 현량과라는 새로운 과거를 도입케 하였다. 이에 따라 발탁된 사림의 소장학자들은 훈구파를 외직으로 돌리고 중종반정 당시의 공신록에서 지나치게 공을 세운 것으로 미화된 76명의 훈작을 삭탈하는 이른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단행한다. 이는 전 공신의 3/4에 해당하는 숫자이며, 사림의 급진적인 정책을 대표하는 정치적 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훈구파 내 강경파였던 예조판서 남곤, 도총관 심정 등이 재상이었던 홍경주와 함께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을 대거 ‘탄핵’하고 급진개혁과 왕권제약에 불만을 가진 중종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탄핵된 이들은 귀양을 간다. 당시 조광조를 감쌌던 명유 정광필마저 옥사를 치르면서 끝내 조광조는 사약을 받아 죽게 되었다. 이 시절 이야기는 <기묘록>이라는 이름의 책에 기술되었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왕이 되어 사림이 중용되는 듯 했지만, 8개월만에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사림은 다시금 위기를 맞는다.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을 통해 윤원형을 비롯한 훈구파들은 사림을 척살하고 훈구파 중심의 정치를 이어나간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귀양을 가면서 훈구파는 점차 그 세를 잃는다. 그리고 선조의 집권 이후 사림은 급격히 그 세를 떨쳐, 훈구파는 정치무대에서 사실상 제거되기에 이른다.
사림이 정치무대에서 주축이 되면서, 이들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황 계열의 명분론자인 동인과 이이 계열의 실리론자인 서인으로 나뉜다. 훈구파는 붕당을 금기로 여기고 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주장했으나 사림은 붕당에 왕까지도 참여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붕당을 통한 참여정치를 주장했던 터라 붕당의 형성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동인과 서인의 대립은 심각했지만 이이 생전에는 나름의 중재가 가능했다. 그러나 이이가 죽고 양 당간의 대립이 격심해지면서 정권도 뒤바뀐다. 초기 집권층이던 서인에서 동인으로 정권이 교체될 즈음 정여립의 난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았으나 훗날 송강 정 철이 역모를 꾀한다는 혐의로 삭탈관직되면서 서인은 정계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그러나 정철의 처벌수위를 놓고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이 대립하였고, 정권은 북인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임진왜란 전후로 우성전, 유성룡, 김성일 등 남인이 정권을 잡았으나, 왜란 직후 북인들이 왜란 도중 남인들이 왜와 화의를 꾀했다 하여 서애 유성룡을 탄핵, 선조가 이를 받아들여 서애를 삭탈관직함으로써 남인은 세를 잃고 북인이 집권케 된다.
북인은 다시 정치적 입장 차이에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고, 대북은 광해군,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함으로써 정치적 갈등을 빚는다. 재야의 남인은 이 무렵 서인과의 연합전선을 구사한다. 1608년, 선조는 자신의 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선위교서를 내렸으나 소북의 유영경이 이를 감추었다. 그러나 대북의 정인홍이 이를 눈치채어 곧 교서를 찾아내었고, 유영경이 바라던 것보다 더 빨리 선조가 승하함에 따라 광해군은 왕이 되었다. 물론, 광해군이 왕이 되면서 소북은 정계에서 완전히 제거된다.
한편 대북도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에 대한 폐서인 문제를 놓고 정치적으로 대립, 강경파였던 골북, 육북과 온건파인 중북으로 나뉘는데, 강경파가 정치적 주도권을 잡음에 따라 영창대군이 제거되고 인목대비는 폐서인된 뒤 가택연금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 대북은 왜란으로 인한 정치, 사회적 혼란을 수습해갔고, 왜 막부와의 협상을 통해 통상을 재개하고 왜로 잡혀간 조선인들을 되찾아오는 등 전방위 외교를 본격화한다.

명이 쇠하고 후금이 팽창함에 따라 명은 사대의 예와 임진, 정유년 파병에 대한 답례로 조선에 후금정벌군의 파병을 요청한다. 명분상 파병이 불가피하였던 바, 그러나 조선의 국세와 후금의 판세는 조선의 결정을 혼란스럽게 한다. 국론의 심각한 분열 속에서 광해군을 강홍립을 지금의 파병군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도원수로 명하여 1만 3천의 병력을 파병한다.

살리호 전역은 1619년에 있었다. 1616년(광해군 8) 누르하치의 건주여진 집단은 국호를 대금(글에선 편의상 후금으로 칭한다), 연호를 천명으로 정하고 흥경에 도읍하여 명에서 독립하였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7대 한을 내세우고 요동의 요충지인 무순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무순의 함락은 후금이라는 신흥세력이 공식적으로 동아시아 세계에 데뷔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명나라 조정에서는 후금의 요동 진출에 심각한 불안감을 느끼고 본격적으로 후금에 대응하여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살리호 전역은 이러한 명의 활동의 일환.

명은 오랑캐로 오랑캐를 잡는다는 이른바 이이제이의 방책으로 무순 함락 이후 지속적으로 조선에 병력 파견을 요청하고 있었다. 명의 요동경략(遼東經略 : 요동 사령부 총사령관) 양호(楊鎬)는 광해군을 압박하여 지속적으로 병력 파견을 요구하고 있었고 결국에는 광해군을 승복시켰다.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은 조선군 1만여명은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군대와 합류하여 명군의 전략에 따라 후금의 도읍인 흥경으로 진격해 갔다. 그러나 살리호 부근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전투 과정에서 명군은 후금에게 괴멸되었고 조선군은 심하 부근의 전투에서 후금에게 대패하여 항복하고 만다. 이것을 살리호 전역이라 부르고 작게는 조선군이 싸운 부분만 들어 심하 전투라고 부른다.

광해군의 입장 : 피폐한 군대를 호랑이굴에 보낼 순 없다.

광해군의 마음은 착잡하였다. 이미 2월 말에 조선군 1만여 명이 압록강을 넘었다는 전갈이 와 있었다. 그렇게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했건만. 부왕의 뒤를 이어 조선의 국왕이 된 이후 남쪽으로는 일본, 북쪽으로는 야인에 대한 근심을 한번도 거른 날이 없었다. 비록 나라 내부에서는 정인홍, 이이첨을 위시한 대북인들이 과격한 공안정국을 이끌고 있었지만 일단 그것은 광해군의 관심 바깥의 일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분조(조정을 나누어 유사시 정사를 대행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미니 조정)를 만들어 직접 전투를 나섰던 인물이었다. 7년이 넘는 끔찍한 전쟁 끝에 그가 얻은 것은 파병을 빌미로 끊임없이 조선과 조선 백성을 핍박하는 대국 명에 대한 끝없는 증오와 이런 전쟁이 다시는 조선에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굳은 신념이었다. 정국이 경색되고 이이첨이 비대한 권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대부를 죽여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전쟁이 다시금 이 땅에 일어나면 사대부고 백성이고 이제는 끝장이라는 비장한 각오만이 그의 머리 속에 맴돌았던 것이다.

처음에 부왕의 승하 이후 자신의 계승권을 승인하지 않아 세종대왕 이래 사용하지 않은 은광을 사용하여 은 뇌물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명 사신 접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후금이 독립하자 명은 끊임없이 병력을 파병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몇 년 전 무순이 함락되었을 때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였다. 부왕 이래 지속적으로 진행된 후금에 대한 용간활동 결과 그는 상당한 정보를 손에 쥐게 되었는데 후금이란 국가와 누르하치는 명나라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만만한 집단이 아니었다. 잘 훈련된 기병과 여진족 특유의 강인함. 그들에게는 그러한 상무정신이 넘쳐 흘렀다.

왜와의 전쟁을 치룬 조선에서 지금 가장 강력한 가상적국은 바로 후금이었다. 하지만 부왕(선조)과 그는 최선을 다해 후금을 무마시키려 노력하였다. 6진 일대에서의 무역을 허용하여 그들에게 생필품을 공급했을 뿐 아니라 벌목이나 기타 이유로 넘어온 여진인을 발견하면 후대하여 돌려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자강의 길도 모색하였다. 부왕은 전쟁 중에 명의 장수인 척계광이 쓴 <기효신서>에 상당히 매료되어 훈련도감의 지침서로 삼으라 하였으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제 가상 적국이 된 후금에 대항해서는 기존에 만들어진 <진설>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기병 중심의 <진설>과 화기병 중심의 <기효신서>에 대한 그의 식견은 병조의 일을 두루 역임한 노신들인 이항복과 이덕형도 감탄할 정도였다. 그는 일단 화기병의 육성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정치는 인사였다. 그는 노신들과 상의하여 곽재우와 같은 인물을 북병사로 파견하기도 하였고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의 수령들을 점차적으로 무관 출신으로 바꾸고 있었다. 공허한 말만 일삼는 사대부들이 전쟁 중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그는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내실을 다지고 바깥을 내다보는 작업이 서서히 궤도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을 즈음.

결국 사단이 나고 말았다. 명의 요동경략 양호가 병력 파견에 대한 본격적인 강요를 해 온 것이다. 그건 강요였다. 양호는 왜란 때 참전한 경력이 있는 만큼 소위 조선통이다. 그런 자에게 명 황실 앞에 늘어놓던 엄살이나 발뺌이 통할 리 없다. 그래서 광해군은 결심했었다. 황제의 칙명이 아닌 이상 군대를 움직일 수 없다는 사절을 보냈다. 그리고 연경으로도 우리의 사정을 전할 사신을 보냈다. 대소신료들은 난리도 아니었다. 심지어 자신을 비호한다고 자처하던 정인 홍과 이이첨조차 군대 파견에 원칙적으로 동의하며 국왕인 자신을 압박하고 있었다. 자신을 지지하는 자라고 해야 평안도 일대의 실무적인 수령들과 몇몇 견실한 관료들 뿐. 당인이라는 것들은 일제히 명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명에는 거의 50만냥 이상의 은을 쏟아부었다. 은혜는 충분히 갚고도 남았을 터, 그러나 양호는 집요했다.

거기다 정인홍과 이이첨의 지지는 더 이상 그에게 파병 거부를 할 수 없게끔 만들고 있었다. 광해군은 차선책을 제시했다. 압록강까지만 군대를 보내겠다. 더 이상의 진출은 안 된다. 하지만 양호는 단호했다. 그는 조선의 사신들이 북경으로 가는 것을 요동에서 차단하고 자신의 명령을 따르기를 종용하였다. 광해군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드디어 조선의 군대가 편성되었다. 전투병력 1만 명, 비전투병 5천5백 명, 전투병력 1만은 포수 3500명, 사수 3500명, 살수 3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징발은 평안도에서 3500명, 전라도에서 2500명, 충청도에서 2000명, 황해도에서 2000명이 동원되었다. 병력의 차출은 4도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병력을 운용하는데 드는 제반 군수물자와 비용은 8도에서 전부 지원되었다.

광해군은 누구보다도 조선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세종대왕께서 파저강의 야인을 정벌하는 데 1만 5천의 병력을 동원했을 때에는 병력이 동원되어 전쟁이 일어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백성들이 지금은 고작 전투병력 1만 명을 차출하는데도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만큼 조선사회는 허약해진 것이다. 하지만 신료들은 적극적이었다. 호조에서는 군수물자 마련을 위해 분주하였고 결국에는 소위 후금원정군이 만들어진 것이다. 광해군은 탄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파병할 경우 거기에 해당하는 최선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였다. 최소한 군대 지휘부의 인선에는 만전을 기해야 한다. 애써 키운 조총수가 쉽게 적들에게 죽지 않도록.

자신의 외교정책을 지지하면서 어느 정도의 정보수집 능력과 유연한 사고를 가진 인물인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고 평안병사 김경서를 부원수, 선천부사 김응하를 좌영장, 이민환을 우영장로 하여 지휘부를 구성하게 하였다. 하지만 광해군은 그러한 인선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강홍립을 따로 불러 밀지를 주었다. '사세를 보아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행동하라'는 것은 그가 강홍립에게 준 밀지의 내용이었다.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 1만은 그렇게 해서 결국은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 군대와 합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홍립의 입장 : 나는 내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

“장군의 의중대로 하겠소만 그렇다 하여 조선의 신민들이 장군을 존경하겠소?”

후금군 장수의 말에 강홍립은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정묘년의 난리가 끝나고 철수하는 후금의 군대 속에 강홍립이 있었다. 그는 정묘년 조선으로 들어오는 후금군의 향도 노릇을 하였다. 그리고 선왕을 폐위하고 즉위한 주상을 알현하고 돌아왔다.
조선에서는 선왕을 폐주라 지칭하는 모양이지만 선왕의 의중을 파악하여 선왕을 보필한 자신의 입장에서는 폐주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지금의 주상은 그의 가솔들의 신변안전을 보장해 주었다. 그것만으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방금 후금군 장수에게 철수 중의 약탈과 민폐를 최소화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후금군에서는 그의 말에 수긍하여 철수중의 민폐를 금하기로 했다. 그가 이런 요청을 하게 된 데에는 조선군 지휘관 정충신의 서찰에 있었다.
“황해도의 바닷가 지역에 들어간 후금군이 마구잡이로 살육을 자행하고 있소. 이미 백마를 잡아 강화하기로 하늘에 맹세된 판국에 그럴 수는 없는 것이오. 그대는 화의를 담당하여 세 치 혀끝으로 수만의 후금군을 물러나게 했으니 조선 백성 가운데 그 누가 그대의 덕에 감사하지 않으리오.”
말인즉 후금군의 행패를 막아달라는 말이었다. 제의를 받고 잠시 망설였지만 그는 즉시 후금군에 요청을 하게 되었다. 고국의 산하가 유린된 것도 치욕이지만 고국의 백성들이 더 이상의 피해는 없길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였다. 비록 자신은 어쩔 수 없이 향도 노릇을 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압록강을 건너 후금의 영토로 가는 그의 뇌리엔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강홍립은 밀지를 받자 착잡했다. 그는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는 일은 없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에게 모든 것을 건다는 주상의 눈빛은 더 이상 그가 도원수 직을 만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가솔들에게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일들에 대한 대략적인 주의를 주었다. 이제 가솔들을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1만의 조선군이 전부 그랬겠지만 어느 병사보다도 마음이 아팠다. 주상의 애매모호한 밀지를 받았지만 대략적인 의도는 알고 있었다. 사세를 보아 불리하면 일찌감치 항복하라는 주상의 뜻이 아니던가. 공연히 결사 항전하여 후금과의 마찰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주상의 판단에 의하면 필시 명나라 군대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면 조선군도 성치 않을 것이므로, 강홍립은 이런 조선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압록강에 이를 무렵 겨울철 추위는 더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군진을 따르던 우영장 이민환은 그날그날의 일들을 일지로 기록하고 있었고 용맹하기로 이름난 좌영장 김응하는 병사들을 격려하며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2월 말에 압록강을 건넌 조선군은 명군의 우익남로군인 유정 휘하에 배속되었다. 명군과 합류하자 강홍립은 명군의 대략적인 실정을 알고 아연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수 명군은 대략 7만을 헤아렸고 조선군과 일부 여진군대를 합쳐서야 겨우 10만을 이룰 수 있었다.
거기에다 유정의 말에 의하면 두송, 마림, 이여백과 같은 쟁쟁한 장수들이 요동경략 양호 아래 배속되어 이번 전역에 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서로 개성이 강하고 공명심이 많아 경쟁이 심하여 양호조차 이를 제어하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하였다.
결국 명나라 군대라 해 봐야 콩가루 군대라고 봐야 했다. 경략 양호의 전략조차 강홍립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송과 마림의 좌익군이 북으로 우회하여 후금의 수도 흥경으로 향하고 유정과 이여백이 우익으로 흥경에 들어간다는 계획인데 후금의 군대가 대략 5만이라고 추산한다면 얼마 안 되는 군대를 여기저기 분산한다는 느낌이었다. 분진합격이라 하지만 합격이 안 될 경우에는?

진격에는 많은 무리수가 따랐다. 2월 말 심한 눈보라에 압록강을 건넌 조선군 대부분의 군장이 물에 젖어 사기가 떨어졌고 험한 지형과 기병 중심의 명군의 보조를 맞추기 위해 식량까지 버리고 따라가야 하는 조선군의 실정상 전쟁을 하기엔 최악의 조건이었다. 또한 명나라의 장수 교일기, 우승은이 조선군에 배속되어 조선군의 전술적인 운용까지 간섭하여 조선군으로서는 꼼짝없이 사지로 들어가는 격이었다.
3월이 되자 명군과 후금군의 격돌은 드디어 가시화되기 시작하였다. 3월 초일에 마가채를 출발할 무렵 사기가 현저히 저하되어 있었지만 심하를 건널 무렵에는 그것이 더욱 심화되었다. 그래도 그나마 심하를 건널 무렵 조우한 후금의 기마병 600여기를 분전 끝에 격퇴했다. 그러나 부차에서 후금의 철기병 3만과 조우하게 되면서 강홍립은 어제 저녁 무렵 공명심에 먼저 출발한 두송의 부대가 후금의 철기병에게 각개 격파되었고 살리호 부근에서 두송과 마림의 명군이 전멸한 소식을 들었다.
후금군은 밤을 새워 유정을 치러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황을 접하는 와중에 선천부사 김응하가 강홍립에게 다가왔다.

“도원수, 도원수는 정황을 보아 지극히 불리해지면 후금에 항복하시오. 난 항복하고는 살고 싶지 않은 무인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우리 모두가 살아 항복한다면 나중에 황제에 대한 주상의 입장도 곤란할 것이오. 난 여기서 조선 무인의 기개를 보일 것이니 뒷일은 도원수에게 맡기오.”

김응하는 말을 마치자마자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강홍립은 3군으로 나누어 후금의 철기에 대응하였다. 선두의 명나라 군대가 후금의 철기에 버티지 못하고 궤멸되었고 후금군은 물밀 듯이 조선군 진영으로 밀려왔다.
천지를 뒤흔드는 총성과 함께 조선군 3영에서 화포가 발사되었다. 기마의 진격속도가 느려졌다 싶자 갑자기 모래바람이 하늘을 덮쳤다. 이 순간 강홍립은 패배를 직감했다. 모래바람으로 진영이 순간 흐트러지는 틈을 타 후금의 기마병들이 돌진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2개의 진영이 유린되었다.
진영이 유린되면서 좌영장 김응하의 분전은 눈부셨다. 그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면서 후금군을 긴장시켰고 결국 장렬히 순절했다. 중영을 제외한 좌, 우 진영이 무너진 조선군은 후금군에게 포위되었다.
후금군은 역관 하서국을 불러 강화를 제의하였다. 부원수 김경서가 이 소식을 전했을 때는 조선군 9,000여 명이 전몰한 후였고 강홍립은 강화에 동의하였다. 일부 병사들이 강력한 항의를 하였지만 이민환이 이들을 만류하며 묵살하였고 강화가 성립되었을 때 살아남은 조선군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였다. 그 광경을 보면서 강홍립은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지었던 쓸쓸한 웃음이 다시금 얼굴에 떠올랐을 때는 후금군이 철수하는 도중에 있던 백성들이 그들의 행패가 사라진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을 본 순간이었다.
장렬히 전몰한 김응하는 고국에서 대대적인 추앙을 받고 그의 부하였던 우영장 이민환, 부원수 김경서 등은 본국으로 귀환하였지만 그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심하의 싸움 당시 그 스스로 최선을 다하였다. 비록 고국에서는 역적이니, 먼저 후금에 항복한 비겁자라는 오명이 따르지만 그는 그의 역사적 소명에 충실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주상의 밀지대로 움직였고 지금까지 조선에 지속적으로 후금의 정보도 보내주고 있다. 이정도면 오명은 쓰더라도 살아볼 만한 인생이 아닐까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대의명분과 천륜의 도를 어기고 광해가 폭정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반정을 기획하고 칼을 씻은 세검의 예에서 유래된 세검정(洗劍亭)의 주인공 능양군 인조와 서인 이귀, 김유, 김자점, 이괄, 이흥립 등이 공모하여 1623년 음력 3월 21일, 창의문(북대문)을 통해 병력을 투입, 삽시간에 창덕궁을 점령하고 정권을 접수한다. 광해는 의관 안국신의 집에서 능양군 병력에게 체포되고, 능양군은 서궁에 유폐된 왕대비 인목대비의 추인으로 왕이 될 수 있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던 것처럼, 재야에서 서인과 남인이 연합전선을 폈고, 또한 1620년부터 무려 4년 가까운 기간에 걸쳐 철저히 준비된 쿠데타였던만큼 이를 통해 대북, 나아가 북인 세력은 철저히 척결되었다. 또한 남인이었던 오리 이원익이
영의정이 되면서 서인과 남인은 정권의 양 축으로서 견제와 균형을 이루며 인조 치하의 정치를 도맡아하게 된다.
그러나 대의명분을 앞세운 인조는 명을 상국으로 여기고 후금(청)을 배격하였으며, 요동 명군의 잔당인 모문룡을 지원한다. 본토 공격에 앞서, 배후인 조선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던 청 태종은 선제공격 차원에서 조선을 침공한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경고 차원이었던 만큼, 호란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러나 정묘년 이후에도 서인과 인조의 향명배청 정책이 갈수록 더해지면서 청은 철기병을 동원해 조선을 집중공격, 세자 내외와 신료들이 추포되었다. 남한산성에 포위된 인조는 끝내 잠실 삼전도에서 삼고구배(황제에게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으며 아홉 번 절하는 예)의 예를 취하고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무렵 우암은 봉림대군의 스승이었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기묘록』등을 배우면서 주희, 이이, 조광조 등의 사상을 배웠던 우암. 이이-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진 서인의 핵심인 기호학파의 적통이었음에도 연원적으로는 급진적 개혁정치를 주창한 조광조를 숭앙하였고, 스스로를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자로 자부하며 주자의 교의를 받들고 실천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런 그의 눈에 병자호란은 치욕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청으로 끌려가게 됨에, 그는 관직을 치우고 낙향하여 십년이 넘는 세월을 학문 연마에 매진한다.

9년이 지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돌아왔다. 그러나 정치 상황은 여전히 호란을 치욕으로 여기고 병력을 키워 청과의 전쟁을 불사하는 주전론 중심의 서인들이 우세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 청은 이미 대륙을 접수하고 연경으로 천도하여 제국의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철기병은 대륙 곳곳에 뻗어 있었으며 한족과 여진족의 관제를 정비하고 내몽골까지 접수한 뒤였다. 도저히 현실적으로 그들을 싸워 이기리라는 것은 불가한 일. 그러나 인조 스스로 조선의 백성이 모두 진토되는 한이 있어서라도 청을 무찌르리라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서인 강경파나 볼모생활 당시에 핍박을 받았던 봉림대군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선양에서 볼모생활을 했던 소현세자는 조금 달랐다. 청은 적통 왕위계승권자였던 소현세자를 왕자의 예로 대하였다. 세자 역시 청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면서 청과 조선 사이의 문제에 대해 대응하는 실권적 조정자로 상당한 권한을 행사했다. 청이 대륙을 공격할 때는 정벌군과 함께 연경에 들어가 아담 샬 신부로부터 천주교와 서구 과학문명에 관한 지식을 배워 돌아왔고, 청에 대한 정서도 호감으로 돌아섰다.
이는 서인 정권과 인조에게 있어 여러 가지로 불편한 일이었다.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와 서인의 눈에 소현세자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들의 정권을 위협하는 것으로밖에는 비쳐지지 않았다. 결국 인조의 암묵적 동의에 의해 소현세자는 조선에 돌아온 지 두 달만에 독살되고 세자비와 그의 집안은 역모혐의로 몰려 참살된다. 그리고 봉림대군이 세자의 위를 이어받아 보위를 이으니 그가 바로 효종.
효종이 강경파를 대거 기용할 때 그 역시 척화파의 일원으로 출사한다. 시무책인 <기유봉사>에서 존주대의(주자를 섬기고 의를 섬긴다) 복수설치(명과 선왕의 치욕을 씻고 대의를 천하에 떨친다)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의중에 맞아 북벌의 핵심일원이 된다. 그러나 김자점 일파가 북벌기도를 청에 밀고하여 우암과 북벌파는 모두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효종 9년에 이조판서가 되면서 약 8개월간 북벌의 총책임을 맡았으나 다음 해 효종이 급서하면서 북벌계획은 사실상 물거품이 된다.
효종이 승하하고 계모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이른바 예송논쟁이 일어나면서 남인과 서인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우암과 서인은 효종이 장자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1년만 상복을 입으면 된다고 주장한 데 대해 고산 윤선도와 남인은 효종이 장자는 아니지만 군주이므로 장자와 그 예가 동일하다고 해석하여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우암이 승리하고 고산은 삼수로 유배를 떠났다.
현종은 효종과 달리 북벌에 소극적이었고, 때문에 우암은 현종에게서 큰 실망을 한다. 서인 내부의 알력도 그에게는 스트레스였다. 정계에서 물러난 우암은 우의정과 좌의정으로 출사한 때를 제외하고는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서인의 강경파이자 효종의 스승으로 선왕의 총애를 받았고, 사림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고 있었던 터라 그의 의견을 함부로 묵살할 수는 없었다.
그의 정치, 사상적인 기반도 영향을 미쳤다. 조광조의 실치주의, 이이의 변통론, 김장생의 예학 등 기호학파의 학문 전통을 이어받은 그였지만 남인 계보인 남명 조식의 비문을 써 준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매사를 정파적으로만 움직였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갈고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린다는 修己治人(수기치인)을 정치사상으로, 백성을 기르고(부유하게 하고) 군주를 섬긴다는 養民爲主(양민위주)을 서인의 정책으로, 예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禮治主義(예치주의)를 정치이념으로 삼은 그의 사상은 왕권보다는 신권이 우선한다는 것이며 성리학 중에서도 주자학을 근간으로 삼는데, 이는 남인들이 원시유학인 육경을 중시하고 주자학 이전의 고학을 중시하는 왕권 우선의 사고를 지녔다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를 지닌다.
또한 기존의 양반 지배 체제나 노비제도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양반의 특권적 성향은 제한되어야 하고, 노비도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은 다분히 개혁적인 측면이 있었다. 이는 그의 사상이 조선 후기의 정치, 사상적 테제로 형성되는 데 큰 기여를 함과 동시에, 사림 유생들의 그에 대한 전폭적 지지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조정의 대신들도 정사에 대한 자문에 있어 누구보다 우암을 우선시하였다.
1674년(현종15), 효종의 정비인 인선왕후 사망 후 자의대비의 상복을 놓고 벌어진 이른바 2차 예송에서, 그는 9개월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1년을 주장하였는데 현종이 남인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하자, 그는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고, 이듬해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장기, 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인조는 첫째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차자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통을 계승하게 하였다. 따라서 효종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왕통은 인조-효종으로 이어졌지만 적장자(적장자가 유고시 적장손)가 잇는 유교의 예학적 관념에서는 벗어난 일이었다. 따라서, 왕가라는 특수층의 의례가 종법(宗法 : 유교에서 규정하는 종가규범)에 우선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관점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었다.
효종의 즉위와 같은 왕위계승에 나타나는 종통의 불일치를 우암은 성서탈적(聖庶奪嫡)이라고 표현하는데, 기존 적통이 끊어지고 새로운 적통에 의해 왕위가 이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는 왕위계승이 종법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를 종법 체계 내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으로, 왕가의 의례라 할지라도 원칙인 종법으로부터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관념의 표현이었다. 반면 허목, 고산 등은 천리(天理)인 종법이 왕가의 의례에서는 변칙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했다. “왕자예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라는 말로써 알 수 있듯, 효종은 왕이 된 이상 당연히 장자라는 의미였다.
서인과 남인의 왕실전례에 대한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단순한 예론상의 논란이 아니라, 그들이 우주만물의 원리로 인정한 종법의 적용에 대한 해석의 차이였으며, 이는 현실적으로는 권력구조와 연계된 견해 차이였으므로 민감한 반응으로 대립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의 헌법에 해당하는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해결되었으나, 효종의 정치적 위상은 2차 예송에 가서야 현종에 의해 사실상의 장자로 인정되면서 해결의 국면을 맡는다.

현종 말기, 남인들이 정권을 잡긴 했으나 이는 오래 가지 못했다. 신왕인 숙종은 남인을 신뢰하지 못했고 남인 역시 청남이니 탁남이니 하면서 또다른 붕당을 조성하였다. 그러던 중 영의정이었던 허적과 그의 자손들이 역모혐의로 추포되고 정권이 서인 중심으로 넘어가는 경신환국이 벌어지면서 우암은 다시 정계로 복귀한다.
이 무렵부터 서인은 우암계열과 비 우암계열이라는 두 가지 파벌로 또다시 나뉘게 된다. 1682년 김석주, 김익훈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 하고자 했을 때, 자신의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 익훈의 처벌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해 그간 지지기반이던 서인 소장파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또 제자 윤증과의 불화가 가세하면서 1683년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는 사태를 맞는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낳은 아들(후일 경종)을 원자로 할 것인가의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는데, 이때 송시열도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5년 후 갑술환국으로 무죄가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1726년(숙종42)의 병신처분과 1744년(영조20)의 문묘배향은 우암의 학문적, 정치적 권위를 인정하는 상징적 조치였다.

영조 대에 이르러 소론은 노론에 의해 정계에서 배척되고 영조가 왕권을 강화하면서 친위대 격인 노론 탕평당이 정권을 장악한 형태가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남인, 소론계를 지지한 사도세자와 영조의 정치적 알력이 사도세자를 사사케 함에 따라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을 따르는 부홍파와 반 홍봉한의 공홍파로 나뉘고, 이는 정조 대에 이르면 사도세자 관련 정책에 따르는 시류를 따르는 시파와 시류에 반한다는 의미의 벽파로 재편되게 된다.
정조는 특히 노론 청명당, 남인 청론, 소론 중론 등을 고루 기용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친위대와 반 친위대, 그리고 이들을 중재할 수 있는 제3세력을 고루 기용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신권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수 세력인 남인의 영수 채제공을 영의정에 앉혀 왕권 강화를 꾀하고 수원성 건설, 장용영 건설 등 각종 근대적 개혁정책을 통해 조선의 왕권을 성종 이전의 치세로 돌리고자 하였다.
이미 숙종 이후, 붕당은 왕의 정책에 대한 지지, 반대의 성격을 띄면서 근대적 정당 구조에서의 여당과 야당의 형태로 발전한다. 이것이 가장 잘 이루어졌던 시기는 물론 정조 치세였고, 그의 사후 순조 대에 이르러 외척이 득세하면서 붕당은 외척 씨족가문의 일당독재 형태로 변질되면서 붕당은 사실상 조선의 정치에서 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물론 고려 후기의 무신정권이나 조선 중기의 사화, 환국을 활용한 정치와는 다른, 외척을 이용한 철저한 문민 중심의 1당 독재라는 점도 특기할만한 점이고.

굳이 지금의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우암을 통해 조선의 붕당을 보고, 그 붕당을 통해 조선의 근대를 보고, 또 그 조선의 근대를 통해 지금의 우리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인데, 다만 시간이 없어 이 이야기를 더욱 잘 풀지 못함은 또한 아쉽고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는 바.

지금 우암의 정치적 고향이랄 수 있는 대전 대덕에는 이제 정부 3청사(대전 종합청사), 대덕 연구단지와 대덕 테크노밸리가, 유성에는 KAIST와 신시가지가 들어섰다. 대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계룡시에는 3군본부인 계룡대가 들어서 있고, 이제 행정수도 이전 정책에 따라 곧 대전 인근지역에 새로운 정부기관들이 대거 입주하게끔 되어 있다.
유신정권 말기,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위태로운 서울 대신 대전으로 행정 및 군사시설을 이주코자 했던 사실상의 천도계획에 따른 대덕 연구단지와 KAIST의 건설. 포항제철과 울산, 여천 석유화학단지 건설과 마산, 이리(현 익산) 수출자유지역 건설 등은 경제적 선진국이었던 북한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 가능한 남한의 근대화전략이었지만, 추진의 핵심이었던 박통의 유고로 대전 행정수도화는 백지화되고, 박통의 정치적 세력을 모두 일소한 뒤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대전 천도계획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 노태우 정권에 들어와 여러 사정으로 인해 군사시설에 대해 제한적으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계룡대. 그럼에도 계룡대 지역이 천도계획 원안에 나온 것처럼 시로 승격된 것은 불과 2003년.

그 사람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과 친구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짧은 일정으로 인한 여행의 피로감으로 쉽게 술에 취한 나는 곧 잠에 빠져 들었고, 그 사이 다른 친구들은 4년의 학부생 시절을 유쾌하게 정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잠에 빠져들었을 무렵, 나는 같은 분단국가라는 점을 강조하며 서독에 공학발전을 위한 각종 차관과 기술을 빌리던 박통의 얼굴을 떠올리며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KAIST 어느 기숙사에서 독일어 문법을 정리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전진해야 하고 이공계열의 발전만이 이 땅의 경제발전을 이루는 밑거름이라 믿었던 사람들. 그들의 피와 땀이 서렸던 경남 임해벨트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본문 내용은 7,649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Post: https://achor.net/board/c44_free/29587
Trackback: https://achor.net/tb/c44_free/29587

카카오톡 공유 보내기 버튼 LINE it! 밴드공유 Naver Blog Share Button
keqi
원문에는 출전과 주석이 다 달려있지만 웹으로 옮기면서 그 내용이 일단 빠져 있음.



 2004-04-19 00:22:02    
Please log in first to leave a comment.


Tag


 28156   1482   6
번호
분류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추천
*    댓글들에 오류가 있습니다 [6] achor 2007/12/0856484277
28061알림   성훈 결혼식 뒤풀이 [5] achor 2004/12/021966179
28060    [울프~!] 병난 울프... wolfdog 1996/05/06844178
28059    (아처) 꼬진 경원 삐삐 땡조 1996/05/06869175
28058    죽자 [1] ee 2004/10/211678174
28057    [비회원] 강간에 대한 판례.. royental 1996/05/041070173
28056    (아처) 미팅 땡조 1996/05/05832173
28055    4월 15일은 뜻깊은 날이었다. 놀뻔한두목 2004/04/161338173
28054    (아처) 또 아이디 바꿨닷! 땡조 1996/05/05903172
28053    (아처) 으그으그 땡조 1996/05/06827172
28052    reply [7] 경원 2004/04/101403172
28051    장소 확정 이오십 2004/08/091304172
28050    [책이] 오늘 번개 성검 1996/05/06891171
28049    크크크...지금 일어났다... pupa 1996/05/06886171
28048    [모스] 간만에.. ~ 케라모스 1996/05/06928171
28047    [Keqi] 그냥 그런 이름의 여행기. [1] keqi 2004/04/192051170
28046    ------------------------------------------ 맑은햇빛 1996/05/071076169
28045    총각파티 [4] 놀뻔한두목 2004/05/051901168
28044    다들 감기조심혀~ [1] 105090862 2004/03/201339167
28043호소   민주노동당에게... [2] achor 2004/04/091749166
    2  3  4  5  6  7  8  9  10  11     

  당신의 추억

ID  

  그날의 추억

Date  

First Written: 02/26/2009 00:56:26
Last Modified: 03/16/2025 18:4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