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기 175 쌍화점 (2009-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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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2513 Vote: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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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화일기

제목: 문화일기 175 쌍화점 ( 2009. 01. 15. )
번호: 639 작성자: achor 작성일: 2009/01/16 00:20:23 조회수: 2 추천: 0


1. 극장

하긴 극장을 가본 게 오래 되긴 했었다.
아마도 맘마미아가 내 마지막 영화였으니
2년에 영화 1편 보던 내 기준에서는 결코 오래 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제 나도 보편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던가.
보편적인 미혼 남성에게 반 년이란 시간은 짧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질문 중 하나가
영화를 좋아하나요? 일 것이니
나 역시도 특별히 영화 보는 걸 싫어할 턱은 없다.

다만 월씬 편하게 볼 수 있는 많은 장치들이 있음에도
굳이 극장에서 몇 시간씩 편하지 않은 것들을 참아가며
영화를 볼만큼은 아니었을 뿐이다.

지난 밤, 밤새 펼쳐놓기만 한 채 추스리지 못했던 시스템이 눈 앞에 아른거렸지만
표가 남는다는 직장동료의 권유에 갈팡질팡 따라 나선다.

전적으로 유하 감독 탓이다.



2. 감독 유하

감독 유하.
김성수 이후 내가 가장 인정하는 감독이 아니던가.

보는 즉시 원작 소설을 사게끔 했던, 아직까지도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손꼽고 있는
결혼은미친짓이다,의 감독이기도 하고,
또 이직하여 나를 처음 소개할 때 그도 차용했었고, 나도 차용했었던
세운상가키드의사랑,의 저자이기도 한 그다.

그의 시도, 소설도, 영화도
그리 많이 접한 건 아니었지만
봤던 모든 것은 좋았었다.



3. 시나리오

갓 대학을 입학했던 무렵의 언젠가
영화에서 감독의 역할을 경시하던 시절이 있었다.
작가의 역량인 탄탄한 시나리오 하에서라면
마치 레시피대로 조리된 요리처럼,
감독의 역할은 수행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라 판단했었다.

나는 시나리오가 좋은 영화를 좋아했었다.

대개 야하다거나 동성애, 조인성 등의 코드로만 홍보되고 있었지만
사실 쌍화점은 적절한 상징과 극한의 상황, 뛰어난 연기가 결합된
웰메이든무비였다.

문학적 토양을 갖고 있는 감독의 작품다운 영화였다.

결국 이 영화도 흔하디 흔한 사랑을 이야기 했지만
그러나 그 사랑은 흔하지 않았다.

왕과 왕비의 사랑은 사회적 사랑이다.
왕비와 홍림의 사랑은 육감적 사랑이다.
그리고 왕과 홍림의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다.



4. 사랑 1

원의 왕비를 맞이해야만 했다.
부마국의 왕으로서 지정된 왕비를 맞이해야만 했다.
그 결정에는 어떠한 능동적인 선택도 담겨있지 못했다.

그러한 현실은
현 시대의 사랑과 큰 차이 없다.

사회적으로,
사랑만으로 결혼할 수 있는 시대는 종말했다.

계산적이고, 수치적이며,
개인과 개인이 아닌, 집단과 집단이 되는 결혼은 조건적이나 현실적인 사랑이고,
순수한 사랑을 지향하는 이를 사랑 지상주의자라는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결국
왕과 왕비, 모두들 불행하게 한다.

이는 궁극의 사랑이 아니다.



5. 사랑 2

은희경이 말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섹스는 몸의 친근이다.
사람을 가까워지게 만들고 때로는 사랑하게도 만든다.
사랑하게 되어 섹스를 원하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먼저 섹스를 공유한 뒤에 사랑에 빠지는 일에도 많은 진실이 있다.
우정이나 호감을 사랑으로 바꾸어주는 것도 섹스이고,
교착된 관계를 결정적으로 밀착하거나 끊어지게 만드는 것도 섹스의 영역이다.
술에 취했거나 어떤 충동에 휘말려 관계를 가졌다고 해서 께름칙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그렇게 시작된 사랑이 순서에 맞지 않는다 해서 회환에 빠지는 일도 우습다.
그때는 그냥 조금 더 친해진 것뿐이다.

...라고 은희경은 말했다.

왕비와 홍림의 사랑은 우연이다.

적절한 외향과 성향을 갖춘 그 누구였다 하여도
왕비는 그와 사랑에 빠졌으리라.

이 또한 궁극의 사랑은 아니다.



6. 사랑 3

언젠가 벨벳골드마인을 통해 이야기 한 적이 있듯이
거짓 이반이 너무 많은 현실이다.
그러한 시대적 경향은 동성애에 대한 혐오감을 없애는 데 일조한 면 없잖아 있겠으나
그러나 덕분에 동성애에 대한 곡해도 만들어 냈다.

세상의 모든 여성을 선택할 수 있는 왕의 위치에서
많은 제약을 감수하며 홍림을 선택했다.

영화는 세 가지 사랑을 동시에 진행하며
각각을 비교한다.

비록 동성애라는 극한의 상황이
어떤 이에겐 혐오감을 주기도 했겠지만
가장 극대화된 제약을 넘어서는 사랑을 형상화 함으로써
그들의 사랑이 다른 두 가지 사랑에 비해 얼마나 가치있는가 이야기 한다.

영화에서 궁극의 사랑은
오직 홍림에 대한 왕의 사랑뿐이었다.



7.
사실 재미 자체는 별로인 영화이긴 했다.
화려한 것도 별로였고, 화끈한 것도 별로였다.

물론 감독 유하.
적절한 상업성을 배제하지 않은 이이기에
꼭 필요하지 않은 부분까지도 안고 가고 있었으나
작품성이든, 흥미든
결혼은미친짓이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재된 가치만으로도 충분히 잘 만들어진 영화임은 분명하다.

영화는
네 사랑의 가치에 질문을 할 것이다.

그래, 모른다면 그냥 그렇게 살라며...

- achor


본문 내용은 5,791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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