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사사 게시판』 30983번
제 목:(아처) 문화일기 118 Lawrence of Arabia
올린이:achor (권아처 ) 98/12/25 11:02 읽음: 19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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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wrence of Arabia, David Lean, 1962, 영화
일요일 오전, 난 대한극장 앞에 홀로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쌀쌀한 날씨에 일부러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난 감상적인 사람은 아니었고
단지 러닝타임이 무려 4시간 가까이 되기에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고 있
던 중이었다.
혼잡하지 않은 찻길에 건물들 사이로 빼꼼이 비쳐오는 햇살, 가족끼리
손을 잡고 나온 일요일 오전의 풍경은 참 평화로워 보였다. 나처럼 이 영
화를 보려고 기다리던 사람들은 보통 가족단위였는데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아니 상영관 수입이 걱정될 정도로 사람들은 적었다는 게 바른
표현일 게다.
그것도 당연한 게 이런 영화를 볼 사람은 무라카미 류의 영화소설집을
읽은 젊은이나 아니면 지난 향수를 그리워하는 중년층의 가족들일 거라고
난 생각했다. 그 중년층들은 마치 커다란 교육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표
정을 지으며 집에서 쉬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강제로 데리고 온 사람들일
게다. 자신은 이렇게 가족을 위해 노력, 봉사하고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
힌 채.
시간이 너무 남아 근처 식당에서 간단하게 칼국수를 하나 먹곤 타임캡
슐을 묻어놓은 '한국의 집'인가 하는 곳을 가서 시간을 때운 후 다시 대
한극장 앞으로 돌아왔을 때 난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 예상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있던 것이었
다. 이 영화의 연장상영이 인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다음 상영할 작품
과 시간이 맞지 않았기 때문일 거란 내 예상은 산산히 깨지고 말았던 게
다. 그렇지만 그다지 틀리지 않았던 건 다른 영화와는 달리 넓은 관객 연
령 분포층. 아줌마와 함께 영화를 보는 건 '타이타닉' 이후 최초였다.
류가 '가장 사막을 아름답게 표현한 영화'라고 하여 난 처음부터 사막
관찰에 내 모든 주의를 쏟았다. 그 결과 내가 얻은 것이라곤 참을 수 없
는 수면욕 뿐이었다. 보통 때 같으면 편히 자고 있을 내 유일한 휴일, 일
요일 오전을 이토록 노동하고 있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끝없이 펼쳐진 단
조로운 사막의 풍경은 아름다움 이전에 권태로움이었다. 그래서 2년 전
극장에서처럼 난 잤다.
얼마 지나 쪽팔림 속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70mm 스크린 속에서는 한
영웅적 인물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이것이 미국 영웅주의의 시조인가 할
정도로 Lawrence란 영국산 백인은 때론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였고, 또 때
론 심하게 흔들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영웅의 나약함은
마치 승자의 아량처럼 느껴질 뿐, 연민 따위는 전혀 들지 않았다.
영화에 미친 많은 이들의 열렬한 찬사를 받는 이 영화를 난 결코 유쾌
하게 보지는 않았다. 이 영화를 보았던 아침 문득 든 생각이었는데 아무
래도 난 결코 예술성과는 가깝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고보면 내가 좋아
하는 영화나 음악이나 소설은 적당히 예술성과 상업성을 갖춘 것들이었
다. 예술성이 높은 작품에서는 지루해졌고, 상업성을 추구한 작품에서는
경박함이 느껴져 외면했었다.
예술성을 인정받는 이 영화는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광활한 사막의 모
습도, 시처럼 아름다운 대사도, 스케일 큰 전투씬도. 난 그런 걸로 영화
의 우열을 가리지 않았다. 그 영화가 의미하는 것, 난 그것만을 생각했었
나 보다.
아직 一家見을 갖기엔 멀었다. 보다 많이 생각해야 하고 경험해야 한다
는 것을 깨달았다. 때론 잡다한 상식을 머리 속에 늘어놓아 정돈되지 못
한 혼잡함을 느껴보고 싶다.
그렇지만 일요일 오전, 그것만큼은 참 상쾌한 시간이었다.
98-9220340 건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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