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초연하는... (1999-09-11)

작성자  
   achor ( Hit: 3075 Vote: 29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Etc


『칼사사 게시판』 34210번
 제  목:(아처) 초연하는...                              
 올린이:achor   (권아처  )    99/09/11 00:12    읽음: 39 관련자료 있음(TL)
 -----------------------------------------------------------------------------
        미리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중국집에서부터 시
      작된다. 후배 녀석과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었는데 맛은 있었
      지만 양이 너무 적었다는 건 밤새 술 마시고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내게 있어서 그리 간단히 넘어갈 만한 문제는 아니었던 
      게다. 공.복.감. 그 공복감이 문제였다. 난 무언가를 갈구하
      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난 길을 가다 우연히 발견한 안경점에 들어가고 말
      았다. 뭔가 더 필요하긴 한데  할 만한 건 전혀 남겨져 있지 
      않기에 택했던 어쩔 수 없는 결과.

        사실 내 시력이 안 좋긴 안 좋다. 좌우 모두 0.1 내지 0.2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렇지만 그게 렌즈도 안경도 끼지 
      않는 내게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았던 까닭은 전적으로 익숙
      해짐 덕택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더이상 시력이 좋을 
      필요가 없었기에 근 4년간 안경을 끼지 않았더니만 잘 안 보
      이는 상태,  그것에 난 익숙해져 있었다.  가끔 안경을 놓고 
      와서 외화를 볼 때 고생한 몇몇의 경우도 있었긴 하지만.

        자, 이렇게 왼손을 머리 위로 올리신 후 중지와 검지를 이
      용하여 윗눈꺼풀을 잡습니다.  그리고 오른손의 중지로 아랫
      눈꺼풀을 잡는 거예요. 한 번 해보세요.

        난 스물너댓 되어 보이는 소박한 여인의 말을 따라 거울을 
      보며 그대로 해보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정말 우스꽝
      스러우면서도 괴물 같았다. 얼굴  위에서 눈알이, 빠질 듯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잘 하네요. 조금만 더 하면 되겠어요. 자, 다시 해보세요.

        난 그녀가 유치원 교사가 되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 생각한
      다. 그리고 정말 내  눈은 참 작구나, 실감한다. 지금까지의 
      생애에서 눈  작은 내 자신이 이토록  원망스럽던 적은 없었
      다. 훌쩍.

        몇 차례 오른쪽에서 실패한 후 왼쪽에 도전한다.

        꽉 잡고 눈동자에 닿을  때까지 밀어 넣으세요. 시선은 계
      속 거울을 향해야 하구요.

        어랏? 왼쪽은 한 번에  성공한다. 아무래도 왼쪽이 오른쪽 
      보다 큰가 보다.

        그것 보세요. 제가 잘 할 거라 그랬잖아요. 그렇게 그대로 
      오른쪽도 하시면 돼요. 해보세요.

        결국 오른쪽까지 해내고 말았다. 그리하여 한껏 나 자신에 
      대해 대견해 하고 있으려니 그녀는 담담하게 다시 내게 말해
      왔다.

        이번엔 빼는 연습을 해봐요.

        헉. 얼마나 힘겹게 꼈는데  다시 빼라니. 역시 남녀사이의 
      일은 허무할 뿐이다.

        빼는 건 더 간단해요.  왼손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서 눈을 
      잡으신 후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눈동자를 살짝 잡아주시면 
      돼요.

        뜨아. 눈동자를 잡으라니. 세상에  잡을만한 건 눈동자 말
      고라도 충분히 많다. 이를테면  여자 따위. 그런데 하필이면 
      눈동자란다. 차라리 그녀가 날 잡아줘요, 지금 절 잡지 않으
      면 전 어디론가 날아갈 것만  같아요. 후회할 지 몰라요. 제
      발 지금 절 꼭 잡아주세요.  전 당신의 여자가 되고 싶어요,
      라고 말했다면 더 좋을 텐데... 쩝.

        그렇게 몇 차례 뺐다  꼈다를 반복하면서 그녀로부터 충실
      히 교육을 받은 후 렌즈를  낀 채 밖으로 나왔다. 렌즈로 투
      영된 세상은 정말 잘 환했다.  말 그대로 너무 잘 보여서 예
      전엔 내가  정말 어떻게 살았나 하는  생각까지도 들어왔다. 
      저 멀리 있는 것들이 다 보이기 시작한 게다.

        그런데 잘 보인다는 게 기쁜 일만은 아니란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전 잘 안 보이
      던 시절에는 지나가는 여자들이 모두 아름다워 보였었다. 세
      상에 미인이 너무 많아 어쩌면 난 평생 결혼하지 못할 것 같
      은 생각이 들 때도 있을 정도로.

        그렇지만 렌즈를 끼니 세상이  너무 세세하게 보이기 시작
      했던 게다. 그렇게 꼼꼼하게  따지다 보면, 그렇게 세심하게 
      바라보다 보면 나만 피곤해질 뿐이다. 두리뭉실 대충대충 사
      는 게 삶을 편안하게 유지시켜 주는 원천이라고 믿어왔는데.

        저 여자는 얼굴이 여드름이 많이 났구나, 어머 저 여자 눈
      에 주름진 것 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
      한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훼
      손되기 시작한다...











        나를 형용할  수 있는 형용사가  초연하는,이기를 바란다. 
      쪼잔하게 사사로운  것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다.  큰 눈으로 
      세상을 방관하고 싶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했던 고등학교 
      시절 맨 뒤 구석에서 잠만 자던 아이가 되고 싶다.

        그런데 삶을  지속시켜 가면서 느는  것이라곤 얽매임밖에 
      없는 듯  하다. 이렇게 하나하나 세심하게  바라보게 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릴까 두려움이 생길 때도 있다.




                                                            98-9220340 권아처 


본문 내용은 9,167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Post: https://achor.net/board/diary/277
Trackback: https://achor.net/tb/diary/277
RSS: https://achor.net/rss/diary

Share 밴드공유 Naver Blog Share Button

Login first to reply...

Tag


     
Total Article: 1957, Total Page: 272
Sun Mon Tue Wed Thu Fri Sat
      1
(아처) 끄적끄적 75..
2
(아처) 문화일기 15..
(아처) 문화일기 15..
3 4
(아처) 문화일기 15..
(아처) 너를 또 만..
5
(아처) 끄적끄적 76..
(아처) 모든 일에..
6 7
(아처) 문화일기 15..
8 9 10 11
(아처) 초연하는...
12
(아처) 끄적끄적 77..
13 14
(아처) 여전히 아..
15
(아처) 그녀가 사..
16 17 18
19 20
(아처) 운명에 관..
(아처) 끄적끄적 78
21 22 23 24 25
(아처) 끄적끄적 79..
26 27 28
(아처) 유치하다,..
29 30    

  당신의 추억

ID  

  그날의 추억

Date  

  Poll
Only one, 주식 or 코인?

주식
코인

| Vote | Result |
  Tags

Tag  

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