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즈 (2004-08-09)

작성자  
   achor ( Hit: 1278 Vote: 8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렌즈를 빼지 않고 살아온 게 10일은 되어가나 보다.

오늘은 자기 전 의도적으로 렌즈를 빼며
렌즈에 익숙치 않던 그 무렵을 기억해 냈다.

렌즈를 끼고 빼는 데에 어려움을 겪던 그 무렵
지금은 소원해 졌으나 당시에는 친했던 한 아이가
자신은 거울도 보지 않고 한 손으로 렌즈를 넣고, 뺄 수 있다고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나도 이제는 꽤 익숙해진 느낌이다.

어쩌면 그 아이는 끼고 빼는 것에 익숙해진 반면
나는 낀 채로 오래 버티는 것에 익숙해 져서
내가 아무리 렌즈에 익숙해 진다 해도 그 아이와 같은 끼고 빼기의 단계는 이르지 못할 것도 같다.


그러나 기억은
렌즈를 끼던 그 상황보다
그 시절에는 젊었다는 느낌으로 회상된다.

그 때도 나름의 걱정과 근심은 가득했지만
어쩐지 지금은 마냥 부럽기만한 젊음이 있었던 것 같다.

- achor WEbs. achor



『칼사사 게시판』 34210번
제 목:(아처) 초연하는...
올린이:achor (권아처 ) 99/09/11 00:12 읽음: 39 관련자료 있음(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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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중국집에서부터 시
작된다. 후배 녀석과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었는데 맛은 있었
지만 양이 너무 적었다는 건 밤새 술 마시고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내게 있어서 그리 간단히 넘어갈 만한 문제는 아니었던
게다. 공.복.감. 그 공복감이 문제였다. 난 무언가를 갈구하
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난 길을 가다 우연히 발견한 안경점에 들어가고 말
았다. 뭔가 더 필요하긴 한데 할 만한 건 전혀 남겨져 있지
않기에 택했던 어쩔 수 없는 결과.

사실 내 시력이 안 좋긴 안 좋다. 좌우 모두 0.1 내지 0.2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렇지만 그게 렌즈도 안경도 끼지
않는 내게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았던 까닭은 전적으로 익숙
해짐 덕택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더이상 시력이 좋을
필요가 없었기에 근 4년간 안경을 끼지 않았더니만 잘 안 보
이는 상태, 그것에 난 익숙해져 있었다. 가끔 안경을 놓고
와서 외화를 볼 때 고생한 몇몇의 경우도 있었긴 하지만.

자, 이렇게 왼손을 머리 위로 올리신 후 중지와 검지를 이
용하여 윗눈꺼풀을 잡습니다. 그리고 오른손의 중지로 아랫
눈꺼풀을 잡는 거예요. 한 번 해보세요.

난 스물너댓 되어 보이는 소박한 여인의 말을 따라 거울을
보며 그대로 해보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정말 우스꽝
스러우면서도 괴물 같았다. 얼굴 위에서 눈알이, 빠질 듯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잘 하네요. 조금만 더 하면 되겠어요. 자, 다시 해보세요.

난 그녀가 유치원 교사가 되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 생각한
다. 그리고 정말 내 눈은 참 작구나, 실감한다. 지금까지의
생애에서 눈 작은 내 자신이 이토록 원망스럽던 적은 없었
다. 훌쩍.

몇 차례 오른쪽에서 실패한 후 왼쪽에 도전한다.

꽉 잡고 눈동자에 닿을 때까지 밀어 넣으세요. 시선은 계
속 거울을 향해야 하구요.

어랏? 왼쪽은 한 번에 성공한다. 아무래도 왼쪽이 오른쪽
보다 큰가 보다.

그것 보세요. 제가 잘 할 거라 그랬잖아요. 그렇게 그대로
오른쪽도 하시면 돼요. 해보세요.

결국 오른쪽까지 해내고 말았다. 그리하여 한껏 나 자신에
대해 대견해 하고 있으려니 그녀는 담담하게 다시 내게 말해
왔다.

이번엔 빼는 연습을 해봐요.

헉. 얼마나 힘겹게 꼈는데 다시 빼라니. 역시 남녀사이의
일은 허무할 뿐이다.

빼는 건 더 간단해요. 왼손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서 눈을
잡으신 후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눈동자를 살짝 잡아주시면
돼요.

뜨아. 눈동자를 잡으라니. 세상에 잡을만한 건 눈동자 말
고라도 충분히 많다. 이를테면 여자 따위. 그런데 하필이면
눈동자란다. 차라리 그녀가 날 잡아줘요, 지금 절 잡지 않으
면 전 어디론가 날아갈 것만 같아요. 후회할 지 몰라요. 제
발 지금 절 꼭 잡아주세요. 전 당신의 여자가 되고 싶어요,
라고 말했다면 더 좋을 텐데... 쩝.

그렇게 몇 차례 뺐다 꼈다를 반복하면서 그녀로부터 충실
히 교육을 받은 후 렌즈를 낀 채 밖으로 나왔다. 렌즈로 투
영된 세상은 정말 잘 환했다. 말 그대로 너무 잘 보여서 예
전엔 내가 정말 어떻게 살았나 하는 생각까지도 들어왔다.
저 멀리 있는 것들이 다 보이기 시작한 게다.

그런데 잘 보인다는 게 기쁜 일만은 아니란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전 잘 안 보이
던 시절에는 지나가는 여자들이 모두 아름다워 보였었다. 세
상에 미인이 너무 많아 어쩌면 난 평생 결혼하지 못할 것 같
은 생각이 들 때도 있을 정도로.

그렇지만 렌즈를 끼니 세상이 너무 세세하게 보이기 시작
했던 게다. 그렇게 꼼꼼하게 따지다 보면, 그렇게 세심하게
바라보다 보면 나만 피곤해질 뿐이다. 두리뭉실 대충대충 사
는 게 삶을 편안하게 유지시켜 주는 원천이라고 믿어왔는데.

저 여자는 얼굴이 여드름이 많이 났구나, 어머 저 여자 눈
에 주름진 것 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
한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훼
손되기 시작한다...











나를 형용할 수 있는 형용사가 초연하는,이기를 바란다.
쪼잔하게 사사로운 것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다. 큰 눈으로
세상을 방관하고 싶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했던 고등학교
시절 맨 뒤 구석에서 잠만 자던 아이가 되고 싶다.

그런데 삶을 지속시켜 가면서 느는 것이라곤 얽매임밖에
없는 듯 하다. 이렇게 하나하나 세심하게 바라보게 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릴까 두려움이 생길 때도 있다.




98-9220340 권아처


본문 내용은 9,203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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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rina2004-08-10 20:58:33
ㅋㅋㅋ 너의 옛글들은 잼있어. 지금은 ... 나쁘진 않지만, 옛분위기가 안난다고나할까

 achor2014-03-25 15:11:09
그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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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