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끄적끄적 79 추석특집 3 (1999-09-25)

작성자  
   achor ( Hit: 1446 Vote: 4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끄적끄적

『칼사사 게시판』 34428번
 제  목:(아처) 끄적끄적 79 추석특집 3                               
 올린이:achor   (권아처  )    99/09/25 22:01    읽음: 48 관련자료 있음(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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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00일 전 2000년 1월 1일

        23일, 상주에서의 23시 30분.
        2000년 1월 1일을 100일  앞뒀다던 그날이 그렇게 아무 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종일 차안에서 자다 깨다 반복하
      며 보낸 100일 전 2000년 1월 1일.

        고민 끝에 결정한다.
        기다리자. 운명이  부를 때까지 기다리자.  조급해하지 말
      자. 참을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리자.




        2. 상주에서...

        상주에서 내가 한 일이라곤  PC방에서 산 것밖에 없다. 23
      일 밤늦게 도착하여 24일 아침  일찍 차례 지낸 후에 하루종
      일 PC방에서 뒹굴거리다가 24시 무렵 돌아와 보니 모두들 잠
      들어있었다.

        상주의 밤거리는 여전히 황홀했다.
        상주에서는 유행이 그런 것이었던지 젊은 남자라면 모름지
      기 짧은 스포츠 머리에 복고풍 정장에 핸드백 하나쯤은 들고 
      있어야 했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 황홀경에  홀로 있다는 사실은 고통이
      었다. 친구 하나 있다면 어떻게든 해보겠건만...
        돈도 조금 있고 해서 홀로  바에 들어가 술이나 마시며 기
      회를 엿볼까 고심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어찌하다보니 PC방에
      서 모든 시간을 축내고 말았다.

        이번엔 상주에  있던 시간이 워낙 짧았기에  특별히 한 게 
      없지만 언제였던가 홀로 상주의  근처 미술관을 배회했던 기
      억이 났다. 어쩐지 PC방보다는  미술관이 보다 폼 나지 않나 
      한다. 어떻게든  다음엔 상주에 계집을 하나  심어두어 함께 
      미술관이나 가봐야겠다. 끙. --+





        3. 담배

        상주 가는 시간동안은 내게 있어서 금단의 시간이다. 아버
      지야 마음껏 담배 피시건만 아, 엄격한 예의 속에서 난 어른
      과 맞담배질 만큼은 하지 말도록 배워왔다.

        운이 좋으면 휴게소에 들리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땐 몇 
      시간동안 고통은 계속된다.
        드디어 상주, 도착하여 몇 시간만에 담배를 한 모금 빤다. 
      처음 담배 피는  어린아이같이 아찔해진다. 일전에 금연기간
      을 정했던 게 2년 전 일일까, 3년 전 일일까...

        그리고 아침,  일어나자 피는 담배만큼 해로운  것도 없을 
      듯 하다. 그렇게 담배를 필 때면 심장이 미세하게 떨려온다. 
      그런데 그 고통이 이상스런 쾌감을 준다. 내 몸이 조금씩 조
      금씩 죽어간다는 게 이상스런 쾌감을 주는 게다. 오묘하다.

        기록해야할 또 하나의 사실.
        이번 추석  때는 이상하게 담배를 많이  잃어버렸다. 어디 
      다른 곳에 두는 것도 아니고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는 것인데
      도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있었다. 그래서 이틀 남짓 시간동
      안 무려 4갑의 담배를 산 듯 하다. 역시 오묘하다.






        4. 온천

        우리 집안의, 특히 내 어머니의 특기, 온천에서 목욕하기. 
      --; 이건 하도 어려서부터 당해왔던 터라 이젠 이골이 났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부모님 
      역시 온천탕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신다.

        몇 해 전 내가 장풍을 쏘아 온천탕을 무너트린 적이 있다. 
      물론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믿지 않는다고 해서 
      진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하나하나 각개격파해 나가는 수밖에 없나
      보다. 이 세상의 온천탕이 모조리 사라질 때까지 내 氣를 날
      려야겠다. 끙.
        5. 옥상

        내 시골집은 상주 시내에 위치한 1층 양옥이다. 아주 어려
      서부터 그 모습이었는데 강산이  변한다는 10년도 훨씬 지났
      건만 여전하다.

        그곳 옥상은  예전부터 내 차지였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홀로 옥상에 올라 그늘에 누워  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이
      런저런 생각도 했던 곳이다.

        이번엔 날씨가 흐려 오랜  시간, 그곳에 머무르지 못한 채 
      잠시 올라갔던 게 고작이지만 여전히 변치 않는 추억을 내게 
      가져다주었다.

        1년 전, 훈련소에서 막 나와 그곳에서 옛 음악가들의 이야
      기며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며,를 읽었던 기억이 났다.

        학생일 때도, 공익근무요원일 때도,  그러고 보면 항상 난 
      옥상에 혼자 있었던 것  같다. 홀로 되기를 꿈꾼다면 옥상에 
      올라가 보기를...








        6. 어른

        2년 전 이 무렵 읽었던  박일문의 장미와 자는 법,을 다시 
      한 번 읽게 됐다. 역시 내  인생 단 한 권의 책이었다. 그렇
      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다.

        온천탕에서 혼자 먼저 나와 호텔 앞 벤치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담배를 피고 있었다. 그런데 남녀 한 쌍이 아주 다정
      하게 내 옆을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들었던 게다.

        보.다.어.른.스.럽.게.살.아.야.겠.구.나.

        싸구려 여인숙  대신 멋진 호텔에 가는  게 어른스러운 건 
      아니다.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아니지만 돌아오는 길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요즘 Speed 011, CF에 나오는 그런 여자와 사귀는 건 어른
      스러운 일이다. 내 차에 애인을 태우고 여행을 떠나는 건 어
      른스러운 일이다. 아저씨 같게만 보였던 정장바지가 잘 어울
      리는 것도 어른스러운 일이다.
        지금 내가 말하는 어른스러움은 외적인 것에 한정된다.

        어른스럽게 되는 가장 쉽고도 편한 방법은 괜히 비난해 대
      는 거다. 유치해, 애들처럼  그게 뭐야,하며 이유 없는 투정
      으로 비난하다 보면 난 어른스럽게 되어있을 게다.

        어려만 보였던  사촌 동생이 이제 중1이라고  힙합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얼마 전까지  내가 입었던 그런 모양의 힙합 
      바지.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난 힙합 바지를  입지 않고 있었
      다. 그렇게 귀여워만 보였던 힙합 바지인데... 내 방 어딘가
      에 처박혀 있을 힙합 바지를 생각했다.

        그 시절엔 나이에 상관없는  젊음을 꿈꿨었다. 서른, 마흔
      이 되어도 힙합 바지를 입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최신 유행 
      랩을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다. 사람은 나이
      에 어울리는 모습이 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다.

        어른스럽게 살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Speed 011,  CF에 나오는 그런 애인과 사
      궈야겠다. 끙. --+








                                                            98-9220340 권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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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