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초콜릿 (1999-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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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750 Vote: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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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Love

『칼사사 게시판』 35085번
 제  목:(아처) 초콜릿                                   
 올린이:achor   (권아처  )    99/12/06 17:18    읽음: 42 관련자료 있음(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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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내 책상에 앉아본다. 얼마나 됐는지 가늠도 되지 
      않으면서 익숙함은 여전하다. 밖에 있는 동안 많이 그리워했
      다. 이 집을. 집의 편안함이 그리웠었다.
        
        지난 한 주, 참 피곤했었다. 일주일 내내 거의 잠을  자지 
      못했었다. 결국 한 번 잠들면 깨어나지 못해서 공익이든  학
      원이든 가지 못한 날이 많았었다.
        
        일전에 미팅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모든 작대기를  휩쓸었
      는 데에다가 아르바이트 퀸카의 쪽지까지 받았다며 한껏  우
      쭐해서 떠벌렸던 일.
        
        그 때는 말하지 않았었지만 몇 가지 일이 있긴 했었다.
        
        우선 친구와 가벼운 말다툼이 있었었다. 난 그 무렵  술만 
      마시면 뻗어서 그 날은 술을 그다지 마시지 않았었는데 나와 
      달리 한껏 술을 마신, 나와 함께 미팅에 나갔던  친구녀석은 
      술에 취해 내게 시비를 걸었었다. 한 여자만 고르라고.
        
        그리고 그 순진했던 아이는 내게 물어왔다. 무슨 일이었는
      지 지금에서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모두들 크게 웃고 있었는
      데 그 와중에 그 아이는 웃으면서 내게 물었던 게다. 그렇지
      만 그 행동이 너무도 갑작스러웠고, 또 웃음소리 속에  감쳐
      져 은밀하였기에 그 아이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나  이외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 아이는 물어왔다. 너  여자랑 
      자본 적 있어?
        
        너무도 돌발적이고, 또 그렇게 순진해 보였던 아이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어서 난 즉시 답해주지 못했었다. 게다
      가 다른 아이들의 시선도 있고. 난 그저 너무도 황당함에 크
      게 웃어버리고 말았었다. 그리곤 또 잠시 후에 다시금  은밀
      한 재촉을 받은 후에 너는?,이라고 말해줬었다.
        
        그 아이랑은 매주 월요일에만 만나게 됐었다.  우연하게도 
      그 아이가 일하는 곳이 내가 월요일마다 가는 곳과 비슷하여 
      그렇게 됐었는데 그 때마다  그 아이는 내게 초콜릿을  주었
      다. 소박하면서도 진한 가나초코렛.
        
        오늘은 월요일. 오늘도 언제나처럼 그 아이는 내게 초콜릿
      을 주었다. 맛있게 먹으며 이야기 나눌 때 전화가 한 통  걸
      려왔는데, 그런데 그게 바로 문제였던 게다.
        
        그 미팅에 같이 나갔던 친구였다. 난 장난인줄  알았었다. 
      그 친구는 그 아이가 자기 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난 그렇지 
      않다고, 이미 내 거라고 맞받아줬는데 그 땐 그 친구의 진지
      함을 알지 못했다. 난 그렇다면 그 아이에게 선택하게  하라
      고 짐짓 웃으며 농을 건넸고, 그 아이는 날 선택해줬다.
        
        그 때까지도 난 장난인줄  알았었다. 의외로 친구가  화를 
      내며 전화를 끊자 그 아이는 내게 이야기하였다. 지난  금요
      일부터 그 친구와 사귀기로 했었다고.
        
        껄떡대던 여자를 친구에게 빼앗겨본 기억은 없다. 생의 첫 
      일을 대함에 황당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괜히 남의  사랑 
      깨트려버린 건 아닌지. 그 아이와 사귀고 싶단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아이는 두 가지  변명을 댔다. 네가 연락하지  않아서, 
      또 네 곁엔 다른 여자가 많아서, 라고.
        
        연락하지 않았다는 건 이해할 만 하다. 난 원래 특별한 용
      건이 없으면 전화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 필요하면 그 아이
      가 하면 될 것인데, 그 아이는 누가 먼저 전화하느냐,에  의
      미를 심어두는, 그런 분류의 사람이었나 보다. 내겐 의미 없
      어 보이는 일이 다른  이에게는 중요할 수도 있으니  이해한
      다.
        
        그렇지만 두 번째 변명은 이유가 안 된다. 일전에 그 아이
      가 내 가방을 뒤지다가 한 책을 봤었는데, 그 책이 마침  어
      떤 여자아이가 선물했던 책이었다.  그 속에 적혀있는  여자 
      이름을 보고 다소 굳어졌던 그 아이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
      렇지만 그건 오해다. 친구 사이에 책 주고받는 건 어색한 일
      이 아니다.
        
        변명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  아이와 
      사랑할 생각이 없었을 뿐더러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사
      랑이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 가을, 사랑을 한창 갈구하고 있을 때 한 친구는 내게 
      말했다. 네게 필요한 건  사랑이 아니고, 함께 나갈  적당한 
      파트너가 아니냐고. 난 아무 말 하지 못했었다.
        
        이 말은 그 아이에게도 적용된다. 만약 사랑이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게다. 누가  되도 상관이 없는, 그런  파트너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기다리기 지쳐서 다른 사랑을 찾는다
      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내 사랑은 너무도 완벽해서  기다림
      에 지칠 수 없다. 어려 보이는 내 사랑에 대한 환상.
        
        돌아오는 길에 다시는 그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조
      금은 아쉬워졌다. 무엇이든  마지막은 아쉬운 여운을  준다. 
      전장에서 적장을 죽이는 맞수의 허무감까지도 이해할 수  있
      을 것 같다. 그 아이와  헤어지며 이제 다시는 초콜릿  먹을 
      수 없겠구나,라고 말해주고 왔다. 친구의 사랑을 깨가며  초
      콜릿을 먹을 필요는 없으니.
        
        사랑은 완벽해야 한다고 믿는다. 노는 거야 누구든 상관없
      다. 아무나와 놀아줄 수는 있다. 그렇지만 사랑은 안 된다.
        
        바람이 차갑게 분다. 겨울이다, 겨울. 여름을 기다리며 생
      각한다. 그 차가운 바람에 그저 몸을 맡기면 된다고. 아무리 
      추워도 몸을 투명하게 하고, 온갖 추위가 내 몸을 투영해 가
      도록 내버려두면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난  그저 
      자연의 일부로서 나를 지배하라,고 외치면 추위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실연의 슬픔 같은  거창함은 아니지만 마지막이란  감정은 
      역시 아쉬웠다. 그렇지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시간을 
      기다리며 감정이 나를 투영해 가기를 기다리면 되는 일.
        
        친구에게 전화 걸어 장난이었다고, 정말 몰랐다고, 앞으로 
      잘 해보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덧붙여줬다. 다시는 그  아이 
      만날 일 없을 거라고.
        
        역시 삶은 살아볼 만 하다. 이런저런 색다른 일들이 저 멀
      리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98-9220340 권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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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