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5년의 긴 여정을 마치며... (200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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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Vote: 14 )
분류      Experience

『칼사사 게시판』 37624번
 제  목:(아처) 5년의 긴 여정을 마치며...                            
 올린이:achor   (권아처  )    01/01/07 23:47    읽음:  0 관련자료 있음(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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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내게 당신은 커서 무엇이 되고 싶습니까, 하며  나
      이에 걸맞지 않는 질문을 던져준다면 나는 여전히 첫째는 음
      악가요, 그 둘째는 소설가라고 답변을 할 것이다. 언젠가 나
      는 글쓰는 일을 참 좋아했었더랬다.
        
        그러나 이제는 글을 쓴다는 게 그리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
      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싫은 것은 글을 쓰고 난 후에 다시 읽
      어보는 그 순간이다. 언젠가 나는 내가 쓰고 난 글에 만족했
      던 적도 있었더랬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건 그런 의미다. 먹는 게 없으니 뱉어
      낼 것도 없는 건 당연한 이치.
        
        5년 전에 나는, 제대 후의 삶은 없을 거라 단정하고  있었
      다. 그 시절 내가 무엇보다 사랑했던 나의 (감히)  탐미적이
      고, (감히) 쾌락적이었던 삶의 자유는 군대를 거치곤 난  이
      후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  대
      신에 해야만 하는 일은 하는 게 두려웠던 게다. 그냥 그렇게 
      사회의 범인처럼 살아가는 것이.
        
        며칠 전 선영과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다. 선영은 내가 주
      섬주섬 늘어놓는 이야기에서 나의 변절을 발견하곤 놀란  표
      정을 지었다. 어쩌면 나는 선영과 5년 전에 친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5년 전 나는 돈도, 건강도, 학점도 갖고 있질 못했지만 대
      신 무엇보다 커다란 자유와  무엇보다 원대한 꿈과  자신감, 
      용기 뭐 그런 것들을 갖고 있었다. 그 시절 또래들과는 달리 
      내 삶을 내가 선택했고, 내가 일구어 나갔다는 것은  아직도 
      나의 큰 자랑거리이다. 물론 사실은 단지 철저한 운명론자로
      서 주어진 내 운명대로 나아갔던 것뿐이었지만.
        
        그리고 내겐 아주 좋은 여자친구가 있었더랬다. 우리는 이
      제 막 졸업을 하고 성인이라는 위치에 서 있었지만 아직  어
      리고 많은 것에 미숙하였었다. 그렇지만 그러기에 우리는 더
      욱 좋았다고 회상한다.
        
        그 시절에도 나는 여전히 좋은 남자친구는 아니었다. 언제
      나 친구들과 술에 취해있기  일수였고, 그렇지 않다면  다른 
      여자아이들과 내 허름한 자취방에서 비디오를 보거나 음악을 
      듣곤 하였으니. 그렇지만 그 아이는 나를 많이 생각해  주었
      었다. 내 사소한 말 한 마디에도 감동 받고, 깊은 신뢰를 가
      지고 믿어주는 그 아이는  내 자신감의 원천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군대를 가기 얼마 전  나는 그 아이와 헤어졌다.  그 
      시절 나는 그 아이를 위한 배려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무렵 
      유행하던 어느 대중가요처럼.
        
        난 내가 말할 때 귀 기울이는 너의 표정이 좋아. 내  말이
      라면 어떤 거짓 허풍도 믿을 것 같은 그런 진지한 얼굴,  네
      가 날 볼 때마다 난 내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
      져. 네가 날 믿는 동안엔 어떤  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이런 날 이해하겠니?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1997년 12월 23일 나는 첫 
      번째 입대를 한다. 거리에 흘러나오는 캐럴을 들으며.  나는 
      마치 죽으러 가듯 찹찹한 심정이었다.
        
        그리곤 병역특례가 확정되어 군대에 대한 억압을 떨쳐버리
      는 것 같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나와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았던 IMF의 영향을 받게 된다. 내가 가기로 했던 그  컴퓨
      터 회사는 IMF로 부도가 났다고 했다.
        
        1998년 9월 7일, 두 번째로 군대에 가기 전까지도 내 삶은 
      특별히 달라진 게 없었다. 주식을 많이 하셨던 아버지는 IMF
      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으셨고, 그다지 많은 대화를 해본 적 
      없는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 일들은 내 삶처럼  가까이 
      들려오지 못했다. 나는 그저 첫 번째 입대로 팔아버린  我處
      帝國 대신에 친구 자취방에서 비슷하게 살아가는 게  고작이
      었다.
        
        그렇게 긴 여정을 마치고 나는 다시 여기에 섰다. 나는 다
      시 학생으로 돌아갈 것이고, 자유를 얻을 것이다. 이제 나는 
      내가 가고픈 곳을 갈 수 있고, 내가 하고픈 일을 할 수 있다
      는 이야기. 모든 것을 잃을  것만 같았던 그 시간과  공간에 
      나는 서있는 게다.
        
        물론 그 시절 생각했던 것처럼 내 삶이 완전히 뒤바꿔버린 
      건 사실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할 일 없이 거리를 거닐지 않
      고, 비디오를 보거나 기억하지 못할 만큼 매일 술을  마시지
      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 시절 잘못 생각했던 한 가지.  내가 
      달라졌다고 삶이 훼손된 건 아니라는 것.
        
        그리하여 선영의 배신감은 합당치 않다. 시간은 삶을 변화
      시키기 마련이고, 또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도 당연하다.  나
      는 이제 학생시절 구석자리에 앉아 항상 잠을 자던 그  친구
      처럼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세상을 관조하고 싶다.
        
        고막을 울리는 음악 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고, 오직 
      개성만을 강조하는 사회, 사회정의 그리고 질서, 공동체  의
      식이 무시되는 사회가 싫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말이  싫
      고, 규율로 대표되는 법의 준수보다 엽기, 일탈이  대중성을 
      얻는 문화가 싫다.
        
        그렇지만 지난날의 내 모습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나는 과
      거를 후회하지 않겠다는 걸 삶의 좌우명으로 하고 살아간다. 
      나는 그 순간에 최선을 다했을 내 과거를 사랑한다. 후에 후
      회한다 하더라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똑같이 그
      렇게 행동할 게다. 그것이 당시로서의 내 최선이기에.
        
        5년이 흘러 나는 다시 비슷한 자리로 돌아간다. 다시 학교
      에 다니며 친구들을 만날 것이고, 다시 수업을 들을  것이며 
      어쩌면 다시 비디오를 보고, 전날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술
      을 마실 지도 모른다. 또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나 새로운 사
      랑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5년에 걸친 길고 긴 여정을 끝낸 지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나는 병역의 의
      무를 마쳤다,는 명제만이 확연하게 내 정신 속에 새겨져  있
      을 뿐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 나는 언제나처럼  과
      거를 그리워할 것이고, 추억할 것임을 알고 있다.
        
        어느새 5년이 흘렀다. 그 긴 여행을 통해 나도 변했고  세
      상도 변했지만 어쨌든 시간을 그렇게 흘러버렸다.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았던 시공에서 나는 지금,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느끼지 못한 채 이렇게.
        그저 과거를 추억할 뿐이다.
        그것이 긴 여정을 끝낸 내가 또다시 남겨놓는 내 삶, 흔적
      의 모든 것이다.
        
        이 순간 서른이 되어있을 내 모습에 모든 것이 다시  끝날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내가 서른이 되고 만다면 아무 것도 
      훼손되지 않고 단지 내가 변해있을 거란 사실이 왠지 서글프
      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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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