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만 버티자 (2001-12-10)

작성자  
   achor ( Hit: 965 Vote: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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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요 며칠 많은 부분이 어수선했다.
갑작스레 행한 서버 업그레이드를 중심으로 친구가 대량의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빌려준 것도 그렇고,
학기말을 맞이하여 기말고사와 다량의 리포트가 부여된 점 또한 그랬다.
물론 아직까지는 리포트 한 번 안 썼고, 기말고사도 세 과목이나 못 보거나 시험이 끝난 후에 대충 얼버무린 정도지만.
어쨌든 주변 상황이 어수선하다는 점은 명확하다.

사무실 임대료를 처음으로 내지 못한 채 1주일이 흘렀고,
전기료와 가스료를 못 낸 건 두 달이다.
일을 해야겠다고 틈만 나면 생각하지만 실상은 지독한 게으름과 나태로 빈둥거리며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있다.

나는 요즘 때로는 의지를 보이면서도
또 때로는 깊은 회의감에 빠지고 있다.

진보하지 않는 것, 머물러 있는 것 또한 퇴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여전히 중요한 신문기사를 스크랩하거나 새로운 것에 도전도 계속 하고는 있지만
대체로는 삶이 평소 어느 때보다도 건조하다.

언젠가는 끊임없이 내게 닥쳐오는 일을 즐겼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매일매일 약속이 정해져 있고, 나는 그렇게 쌓여있는 일들을 차례로 격파해 가면서 쾌감이나 희열을 느꼈던 것도 같다.
밤새 일한 후 아침 일찍 나가 이것저것 일을 처리하곤 밤 늦게는 친구들과 바에서 술 한 잔 하고 돌아와
다시 일하며 반복되던 그 피곤하고 쉴 틈 없던 나날이 즐거웠던 때가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또 때로는 완벽하리만치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밥을 먹거나 잠깐 눈 붙이는 시간 외에는
오로치 책을 읽으며 공부했던 기억도 틀림없이 내게는 있다.
나는 본격적인 프로그래밍을 그렇게 습득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요즘은 다르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모든 악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이미 넘어섰다고 생각한다.

계속 밀려만 있는 일도 내게는 엄청난 부담이고,
날로 쌓여만 가는 금전적인 빚도 부담이 되어 간다.
하루라도 찾아가지 않으면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하는 안티운동도 부담이고,
이래저래 오라 가라 하는 학교도 부담이다.
날로 등장하는 신기술과 꾸준히 공부해야 하는 프로그래밍 현실도,
또 기자로서 기사를 써야한다는 것도 내게는 무거운 짐이 되어있다.

오늘은 수원에 갔다 왔다.
누구나처럼 내게 있어서도 시간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디를 갔다 오면 하루가 그냥 가버리고 말아 나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나는 대인기피증도 아니고, 두문불출도 아니다.
단지 시간이 아까울 뿐이다.

복수전공 하고 있는 컴퓨터공학 때문에 교수와 4학년 졸업논문을 준비해야 한단다.
학교는 적어도 지금만큼은 득보다는 실이 많다고 생각했다.
나는 정상적인 주간 경제학과 학생으로 입학했으면서도
야간에 수업을 듣거나 수원에서 수업을 들어야 하는 비정한 운명에 처해졌음도 깨달았다.
나는 왜 그래야 하는가.
나는 왜 정상적으로 아침에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도서관에서 공부하면 안되는가.

2년 전 이 무렵 나는 세 가지 직업을 갖고 있었다.
군인이기도 했으면서 나는 학원강사였으며, 그리고 아처웹스. 또한 운영하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그 세 가지 일 모두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걸 상기해 낸다.

나는 신이 아니다.
나는 그저 그런 인간일 뿐이다.
그것 명확하게 알고 있는 내가 왜 이리 욕심을 내며, 많은 것을 하고 있는가.

나는 포기를 두려워 하는가?
그렇지 않다.
나는 완벽한 운명론자로서 포기가 빠르고, 슬퍼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그저 내 운명으로 담담히 받아들이는 데에 능숙한 편이다.
여자와 헤어져도, 학점이 안 좋아도, 큰 사고를 쳐도.
나는 크게 슬퍼하거나 크게 실망한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미 포기하고 있다.
독단적으로 이끌어온 안티운동을 다수의 운영진 체계로 바꾼 뒤 물러나려 하고 있고,
기자의 신분도 다른 이를 추천하고 그만 두려 한다.
주위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게 들어온 일을 넘기고 있고,
수업도, 시험도 친구들이 대신 해주고 있다.

나는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내가 조금 더 부지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유로운 삶을 내 생의 테마로 살아가려 하지만
또 그와 모순적으로 정돈되고 체계적인 상태를 좋아한다.
비록 내 집, 내 몸은 어지럽혀 있다 하여도 내 정신만은 체계적으로 정돈되어 있기를 희망한다.

아마도 요즘은 그러한 혼란이 너무 컸던 것 같다.
어느 정도 매듭만 지어놓고 싶었던 아처보드도 조금조금 수정한다는 게 아직 이어지고 있고,
서버 업그레이드로 실질적인 환경 또한 아주 어지럽게 늘어놓아졌다.
기말고사와 리포트, 4학년이 된다는 문제도 내 정신이 정돈시키지 못한 문제이다.

이번 주만 보내자.
이번 주가 지나면 학기가 끝나게 될 것이고,
그럼 맡은 일들을 빠르게 격파해 나가자.
이번 주만큼은 오직 기말고사와 리포트에 몰입하여 제 때에 졸업하지 못해
또 이같은 비생산적인 학교생활의 반복을 막아두자.
그리곤 빨리 일을 끝내놓고, 공부를 하든, 돈을 벌든, 휴식을 취하든 하자.
이번 주만 보내자.

나는 내가 조금 더 부지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름대로 부지런하게 살아왔다고 다시 생각한다.
나는 그간 내 의지대로, 내 운명대로 잘 살아왔고, 지금도 그런 삶에는 변함이 없다고 다시 생각한다.
나는 아침에 학교에 가는 권리는 못 누리고 있지만
그보다 더 큰 혜택을 누려왔다고 다시 생각한다.
나는 일반 대학생을 포기한 대신에
정식으로 등록된 사업체의 사장이 됐으며, 신문기자가 됐으며, 시민운동가가 되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대학생인 나는 신문에 나오지 못했지만
사장으로서, 신문기자로서, 시민운동가로서는 신문에 나왔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번 주만 버티자.
그리곤 하나하나 격파해 가자.
정돈된 상태. 나는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8,316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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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