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문화일기 17 장미와 자는 법 (1997-09-24)

작성자  
   achor ( Hit: 1192 Vote: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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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화일기


『칼사사 게시판』 24470번
 제  목:(아처) 문화일기 17 장미와 자는 법                           
 올린이:achor   (권아처  )    97/09/24 00:56    읽음: 22 관련자료 있음(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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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자는 법, 1996, 박일문, 문학수첩

<잡담>

1. 사실 난 책을 홀로 방에서 읽기보다는 지하철, 버스 안의 이동 중에 읽는
   편이다. 왠지 집에 혼자 있을 때면 편안한 것을 찾게 되고,  TV를 보거나
   비디오, 라디오 등을 보고 듣는 일이 많기에 책을 본다면 더욱 좋을 것이
   란 생각을 하면서도 실상은 거의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난 오늘 내 방에서 애매럴드캐슬의 '발걸음'을 들으면서 책을 마쳤다. 순
   간 내가 느꼈던 그 어떤 감정을 어떤 어휘로 표현해야할 지 모르겠다. 분
   명한 것은 지난 가을의 추억과 소설 말미에서 오는 허무가 복잡하게 얽힌
   눈물날만큼의 감정이었다는 것뿐...

2. '장미와 자는 법'이란 제목은  고백하건대 내가 좋아하는 제목은 결코 아
   니다. 그럼에도 '박일문'이란 이름만으로 아무런 꺼리김없이 바로 고르고
   말았는데, 집에 돌아와서 대충 훑어볼 때 '사랑에 대한 몇가지 충고,  몇
   가지 반성'이란 문귀를 보고는 얼마나 의외였는지 모른다. 박일문이 사랑
   얘기를?

   그러나 읽어나감으로써 역시 박일문임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한 운동권
   (정도는 이전에 비해 훨씬 둔화되었다) 이야기와  요사이 늘어가는  생태
   아나키즘, 문화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현학적 태도,  불교, 도교, 기독교
   를 포섭한 종교적 포괄성,  날로 심화되는 노골적인 성묘사 및 변태적 기
   술, 빠트릴 수 없는 허무감, 세상과의 단절 그리고 도피...

3. 오늘 난 성훈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한가지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1996
   년에 발표된 이 책을 내가 조금 일찍 읽었더라면  그 소중한 친구에게 많
   은 도움을 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다.

4. 처음으로 '민음사'가 아닌 '문학수첩'이란 출판사에서 발행되었는데 조금
   아쉬운 감이 든다. 난 민음사가 좋다. 그냥...

5. 언제나 그랬듯이 줄거리 묘사 따위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관심이 있는 사
   람은 직접 읽어보도록...

<가출>

1. 다음은 인용이다. (일전에 '끄적끄적'에 잠시 소개한 바 있는...)

나는 어른이 되었다.
집을 나왔다. 무작정 집을 뛰쳐나오면 어른이 되기 마련이다.  온실 같은 집
안보다 약육강식이 존재하는 사회는 인간을 속성재배 시킨다.  시근머리, 주
변머리가 빨리 들게 마련이다. 내 추락하는 생에도 작은 자부심이 있다.  열
아홉 이후, 나는 부모에게 어떤 경제적 도움도 받지 않았다.  세상에 대가없
는 베품은 없다. 부모의 베품조차,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 집을 나왔다.
주체경제를 세우기 위해서다. 열아홉의 건강한 사내가 남이 물어다주는 먹이
를 그저 받아먹는다는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다.  주체경제를 못 세운 자가 부
모로부터 내정간섭받는 것은 당연하다. 나이 스물이 되어 주체경제를 세우지 
못한 주제에 부모의 간섭 운운하는 사람은 바보다. 그런 토끼는 부모의 간섭
과 통제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역시 나는 사상적으로 각성된 인간이다(?)
자주성을 향한 장구하고 간구한 나의 혁명투쟁, 부모로부터의 해방은 독립된 
주체경제를 세우면서 확보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높은 형태의  운동은 
인간 해방투쟁이다.  나는 부모나 가족이라는  '낡은 것'을 반대하는 창조적 
활동으로 내 삶을 진보적으로 개선했다.  그럼으로써 나는 사회적 진보에 보
탬이 되었다.  비록 나의 자화자찬은 뻔뻔스럽지만,  역시 난 혁명적 인간이
다.

새벽 농수산물 시장에 나가 몸을 팔았고, 방학 때마다 공사판에 나가 똥짐을 
졌다. 몸에는 단단한 근육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근사한 근육이 아닌, 
노가다판 근육이랄 수 있는 팔과 장딴지가 굵어지는 흉한 근육이었다.  더러
는 술집이나 음악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경험으로 한다면 천하다는 생
각이 안들겠지만,  혼자만의 삶을 꾸리기 위해서 술집에서 일한다는 것은 치
욕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라면이나 국수 따위가 내 나날의 주식이었고, 때로 
그것은 한 달 이상씩 계속되기도 한다.  그조차 없을 땐,  하루 이틀 정도는 
굶으며 자취방에 처박혀  소설책을 읽으며 두문불출한다.  베토벤이나 말러, 
차이코프스키나 라흐마니노프 등 비장한 냄새가 나는  작곡가들의 음악을 낮
은 볼륨으로 반복해서 들으며,  어둡고 칙칙한 소설 책들을 읽곤 했다. 열아
홉, 스물이란 나이가 그것을 견디게 해주었다.

2. 나의 오만함을 단정적으로 보여주는 글이었다.
   난 비록 타인의 눈에 최고의 삶처럼 보이지 않겠지만, 스스로에게 무척이
   나 자랑스럽게 살아가고 있고, 이는  '스무살이 되어서도 남이 물어다 주
   는 먹이를 먹고 있는 너희'를 비웃는 오만함을 갖고 있다.

   그런 토끼는 부모의 간섭과 통제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밝히건대, 난 오만한 존재이다.

<결혼>

분명한 것은 난 그처럼 생태 아나키스트는 결코 아니란 점이다.
그러나 그와 다른 이유로 결혼에 종속되지 않고, 순결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는 생태 아니키즘적 관점으로 결혼을 반대한다.
결혼은 출산을 동반하고, 출산으로 인하여 지구는 더욱 황폐화될 것이며, 또
한 지구는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란 종에 의하여 멸할 것이라고 한다.

일전에 '아직 사랑할 시간은 남았다'에서 말했듯이 여전히 집단적 난혼을 꿈
꾸고 있으며, 여성들의 출산욕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모 결혼에 관한 사항은  '레테의 戀歌'에서 밝혔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섹스>

박일문의 성표현은 날로 그 정도가 심화되어 이제는 도미시다 다께오류의 야
설을 읽고 있는 느낌마저 주게 한다.

원래 그의 소설들이 문제 해결을 섹스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보이기도 하지만 
이번처럼 중세 유럽이나 혹은 남성들 사이의 섹스에서나 보이는 에널 섹스는 
등장하지 않았다.

또한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이와 섹스를 하거나 혹은 다른 이의 아이를 임신
했음에도 초연할 수 있는 자세는 집착을 버린  진정한 초탈의 경지에서나 가
능할 모습이었다.
후에 흔들리는 그의 모습은 조금 안타깝기는 하였다.

집착을 버려야만 한다.

<이별의 자세>

1.

감성이 약한 내게는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와닿지 않았을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별로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이 소설의 앞부분을 권
해 주도록 하자.

그에게 보낸 답장에는 많은 부분을 인용하긴 하였지만 여기에서는 두 부분만 
인용해 보도록 한다.

2.

나는 이제 안다. 나란 변화의 존재는 굳이 자살하지 않아도 죽는다.
찰나멸(刹那滅)이다.  순간순간 우주 속으로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이 다시 
모여 새로운 거으로 이합집산한다.
가만히 있어도 죽는 나. 나란 존재 자체가 도(道)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서 
나는 변증법적 유물론자답게 자살 같은 어린 짓은 하지 않기로 한다.
막걸리 한사발이면 죽음과 이별조차 품어 안을 만한 넉넉한 것이리라.

대웅 붓다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헤어짐의 고(苦)는 애욕의 집(集)에서  나왔
다. 집착을 멸(滅)하고 호호탕탕한 길(道)로 들어서라.

<에필로그>

1. 아~ 드디어 박일문의 모든 저서를 끝냈구나. 참, 그의 데뷔작 '왕비를 아
   십니까'가 남았군. 으휴... 1992년에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그 글을 어떻게 찾아봐야할 지... 암담~ --;

2. 너무 길어져 버린 왼손 새끼 손톱 때문에  'ㅁ'과 'ㅂ'을 치기가 너무 힘
   들다. 그렇다고 짤라 버릴 수도 없구~ 으이구~
   아름다워지기란 실로 힘들군... 푸히~ ^^;
   (다시는 호박에 줄 긋지 않으리라! --;)

3. 내가 박일문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나와 생각이 너무도 비슷하다
   는 점이다.
   결혼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일 게다.

4. 예전 '살아남은 자의 슬픔' 때와는 다른 모습의 사진이 실려있다. 핫~ 색
   마처럼 생기지 않았건만... ^^;

5. 비교와 해명을 위해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봐야겠다. (나아아아아아중에)

6. 혹이라도 여기까지 읽은 여성이 있다면 질문 하나 하도록 하마.
   "정말 여성은 적정 연령이 되면 출산욕을 느끼는가?"
   (흠~ 다들 적정 연령이 아닌감? --;)




                                                              3상5/476 건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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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