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게임 (2002-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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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962 Vote: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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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부터 통일하고 가야겠다.
그간 사장님, 실장님 등으로 불리던 김기중 (주)삼일 실장님을 앞으로 '형님'으로 통일하도록 하자.
이미 웹스. 내부에서는 사외이사 겸 고문 겸 큰 형님으로 통하고 계시니 뭐 특별한 조치는 아니다.

어쨌든 형님은 오늘 기습을 하셨다.
기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멤버들 모두 밤새 일한 후 vluez와 keqi는 학교에 등교한 시각.
형님은 이미 새벽에 한 숨 주무시고 난 터,
정오가 지난 그 무렵 나는 이제 막 잠을 청하려던 참이었다.

그러자 형님은 점심이나 먹고 자라고 외출을 권했다.
대체로 중국집이나 김밥집에서 식사를 시켜먹던 전례에 비춰 다소 이례적인 일이었다.
우리는 주중 내내 같이 생활하다 보니 많은 습관들이 옮아
누구라도 객기바이러스에 한 번쯤 간염되었고,
또 나의 게으름 역시 전파되어 다들 외출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한 번 오면 누구라도 안 가서 나는 고생한다. --;

어쨌든 나도 배는 출출했던 터,
형님과 사무실 길 건너 음식백화점으로 나섰다.

그 때였다.
아카데미21 영화관을 발견하신 형님은 돌연적으로 영화를 보자고 조르기 시작하셨던 게다.

이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영화관에 갇혀있는 것을 싫어하는 데에다가
남자와 영화를 본다는 건 결코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1년에 한 번 영화를 볼까 말까 하는 내게 남자와 영화를 보는 일이 닥칠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느냐 말이다. !_!

그나마 위안은 극장으로 올라가던 계단에서 21-22살 정도 되어보이는 여인들 둘과 스쳤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스침이라면 어찌 위안이 되었겠는가.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내려오던 그녀들과 올라가던 나와의 스침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다. 내 직감은 현실이 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상영작들을 보며 '스파이게임'을 골랐을 때
그녀들이 내려가던 계단을 다시 올라와 연이어 우리와 같은 '스파이게임'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 사실만으로 아직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는 사람은 연애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다.
처음 접하는 여자들과의 관계에서는 목소리의 억양, 톤, 고저 등 그 하나하나에 의미가 들어있기 마련이다.
나는 우리와 같이 '스파이게임'을 연이어 고른 그녀들의 그러한 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상상해 보라.
손님 없이 썰렁한 그 공간에서 우리는 다소 굵은 목소리로 그녀들에게 들리게 '스파이게임'을 골랐고,
그녀들은 우리가 표를 사자마자 바로 역시 높은 목소리로 '스파이게임'을 외친 것이다.
상호간의 그 외침은 매표원에게 하는 의미와 동시에 상대방에서 우리 역시 이 영화를 볼 것이라는 암시였던 게다.

아. 그러나.
사랑에 비극이 없다면 깊을 수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위기는 닥쳐왔다.
이제 마무리 작업만 남겨놓은 상황에서 우리의 큰 형님은 점심을 빨리 먹으러 가자고 하셨던 게다.
영화 시작을 5분 가량 남겨놓은 그 상황에서.

1층으로 내려가 파파이스에서 버거세트를 구입하고 올라와 극장 반입을 노렸으나
음식물 반입 금지 규정에 보기 좋게 걸려서 허겁지겁 해치우고 상영관으로 들어간 시간은 상영을 시작한 지 10여 분 후.

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극장 안에서 그대로 잠들어 버렸고,
영화가 끝났다고 형님이 깨우셨을 때 일어났다. --+
나름대로 감동적이었다는 형님의 눈가에 고인 눈물과 커다란 하품 속에서 내 눈가에 고인 눈물이 무슨 차이가 있으랴. --;

극장을 나서는 길.
우리는 다시 그녀들과 마주쳤다.
그녀들은 우리 앞에서 천천히 걷고 있었고, 우리 또한 그녀 뒤를 천천히 따랐다.
나는 이미 끝난 게임, 더이상 미련 없었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 뿐이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더니 형님은 내게 더 큰 슬픔을 전해주셨다.
내가 졸고 있던 시각, 그 큰 극장에는 그녀 둘과 우리 둘밖에 없었다는 게다.
그 어두컴컴한 공간에 말이다.

그간 함께 해온 옛 전우들과 있었다면 이것은 적중률 100%의 게임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우리는 근처 호프에서 술 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지도 모르고,
혹은 또 다른 공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고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녀들은 21-22살 정도의 노는 여인들이 많이 입는 정장 스타일. 딱 그 모습이었다.
다들 170에 육박할 만큼 키도 컸고, 몸매도 볼륨이 있었다.

이런 마주침이 삶에 드믄 일은 아닐 것인데 굳이 다이어리에 벌써 며칠이나 지난 일을 적어내는 것만큼
그녀들은 괜찮았고, 적중률 100%의 미련에서 오는 아쉬움이 컸다.
흔치 않은 기회였는데. 참으로 하늘이 내게 주신 찬스였는데... !_!

형님! 주르륵.
다음 판엔 반드시! 불끈! --;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8,213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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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