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 정규에게... (2003-06-07)

작성자  
   achor ( Hit: 1392 Vote: 13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정규. 주인 없는 네 집 컴퓨터 앞에 홀로 앉아 글을 쓴다.
오랜만에 찾은 네 집은 평소와는 달리 평온하기만 하구나.
목소리 큰 창진이도 없고, 묵묵히 공부만 하던 위택이도 없고,
항상 음악을 틀어 놓곤 했던 너도 없으니.

나는 이 글을 다 쓴 후 다시 집을 챙겨서 신림동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며칠 있지는 못했다만 벌써부터 괜한 그리움과 아쉬움이 느껴져 오는구나.

너와 지낸 며칠, 나는 지난 1998년을 많이 떠올렸었다.
내게는 유일하게 가족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산 시절이기도 했고,
또 네 덕에 문학이나 음악 등에 대해 보다 큰 관심을 가졌던 시기이기도 했다.
내 홈페이지에 소설의 흉내를 내고 있는 글들은
대개 너와 함께 살던 시절의 기록일 것이니 그 영향은 역시 적잖았던 듯 싶다.

또한 너와 함께 살던 시절이야 말로
내가 가장 학생에 근접했던 시기로 회상된다.
비록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도서관에서 밤을 새본 것은 그 때가 유일하며,
학교 뒷동산에 올라 푸르른 산록 속 벤치에 누워
하루키며, 류며, 바나나며...
그 시절 우리 또래들이 많이 접했던 일본 대중 문학을 읽으며 잔잔한 감상에 빠져들었던 것도
아마 그 때가 유일하리라.

어쩌면 이제 와서 내가 가당치도 않은 공부에 대한 열정을 품을 수 있었던 까닭에는
그 시절의 낭만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자 했던 마음이 컸을련는지도 모르겠다.
고시에 대한 깊은 뜻이나 열정도 없으면서
나는 그저 이미 놓쳐버린 학생이란 신분이 주는 그 포근함과 편안함을
마지막으로 누리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대학 마지막을 남겨 두니 더욱 아쉬움은 커져만 가더라.
요 며칠 너와 학교에서 한 일이라곤 스타와 워크밖에 없다만
그렇게 학교 안에서 숨쉰다는 것이 나는 마냥 만족스럽기만 했다.
모범생이지 못했음을 후회하지는 않는다만
나는 너무 과도하게 학교에서 멀어졌었던 건 아닌가 이제와서 뒤늦은 후회를 조금 해본다.

나는 비록 고시책 한 번 펴보지 않은 채로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며 포기하고 떠나가지만
너는 좋은 성과 내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나와 있을 땐 고시 책 한 번 안 보더니만
지금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小法典을 보니 네가 정말 공부를 하긴 하나 보구나.
건투를 빈다.

자. 이렇게 즐거웠던 추억과 가시지 않는 아쉬움을 뒤로 하며
나는 신림동으로 돌아가마.
물론 이제 마지막 학창시절을 학생답게 보낼 기말고사가 닥칠 것이고, 또 졸업을 위한 영어시험도 준비해야 하니
나는 앞으로도 네 신세를 져야겠다.
그러니 마치 이 글이 먼 길을 떠나는 벗에 대한 편지 같은 느낌이 들더라도 그건 사실이 아니다.

다만 혼자 남의 집에 우두커니 앉아 한껏 감상에 빠져 늘어놓은 넋두리라고 해두자.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767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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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