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른을 피하는 까닭에 관한 고찰 (2004-01-19)

작성자  
   achor ( Hit: 1091 Vote: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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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1.
김 사장님이 전화를 걸어오신 시간은 밤 8시 30분 경.
거의 1년만의 통화다.
광화문에서 술 한 잔 하고 있는데 생각 나서 전화를 하셨단다.

김 사장님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어른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생각이 고정화 되고, 보수적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을 것인데
김 사장님은 쉰이 넘으신 연세임에도
언제나 내 돌발적이고, 오만방자한 이야기를 들어주실 줄 아는 분이셨다.

특히 대개의 어른들이 나를 가르치기 위하여 혈안이 되는 것과는 달리
먼저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부분을 부드럽게 말씀하시는 게 좋았다.
그것이 설령 애송이에 대한 고수의 무시라 하더라도
별로 상관 없다.
결국 생각해 보면 내가 어른들과 이야기 하는 까닭은
그들을 설득시키려는 게 아니고 내가 배우기 위함이므로.

그래서 나는 김 사장님과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문화든.
무엇이든 이야기 나누는 걸 약 1년 전 즈음에 좋아했었다.
나는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자. 놀라지들 말거라.

그 밤 시간, 한창 날씨는 추워져만 가고,
게다가 눈도 내린 상황에, 심지어 만날 사람이 쌈박한 여인도 아닌데
내가 광화문으로 달려갔다는 게 아니더냐.



2.
먼저 내가 말하는 어른의 정의를 집고 넘어가자.
내게 있어서 어른이라는 게 아직까지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 지므로
실상 나 또한 어른이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 부모님뻘 되시는 분들을 어른으로 정의한다.

나는 여전히 친구들의 부모님 만나는 일을 굉장히 꺼려하고 있다.
성인이 되고 난 후 만난 부모님은 성훈과 정목의 부모님이 전부일 정도다.
두 경우 모두 특별한 사정으로 뵙게 된 경우이고,
아무리 친하든, 아무리 사랑하든 나는 그간 결코 친구 부모님을 만나지 않아왔다.
심지어 스무살 남짓 시절에는 나를 아주 좋아하시곤 선물을 보내시기도 했던 여자친구 부모님도 계셨는데
나는 그것에 고마워하기는 커녕 아주 부담스러워 했고,
여자친구에게 부모님께 내 이야기는 최소한으로 해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다.

과거에는 그 까닭이
어른들은 대개 좀 경직되어 있고, 보수적일 거라는 선입견으로,
일단은 진보적인 모습을 갖고 싶어했던 나와 맞지 않고,
또한 이것에 내가 불편함을 많이 느끼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요즘은 분석이 좀 다르다.

나는 대체로 어른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편에 속한다.
학창시절 선생님들과의 관계도 그랬고, 또 다들 짧긴 했지만 여러 직장시절 상사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나는 기본적으로 예의를 잘 갖추고 있으며
그 예의와 내 강한 성격을 잘 고려하여 언행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요즘 이것의 본질은
거리감에 따른 처신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이를테면 나는 예의에 대한 압박을 많이 받고 있으면서도
그 반대급부적으로 전혀 알지 못하는 데다가 완전히 잘못된 어른이라면
심하게, 심지어 반말까지도 구사하며 그들의 잘못에 항의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살 터울인 형, 누나들에게도 꼬박꼬박 존칭을 쓰는 내 습성상
이것은 사실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면서도 또한 충분히 그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부분이다.

반면 깊든 얕든 안면이 있고, 관계가 있는 어른이라면
결코 일체의 비예의적인 행동은 하지 못할 것 같다.
이런 경우라면 예의와 내 입장을 적절히 판단하여
상황에 맞게 수위를 조절하여 언행을 취할 것이다.
학창시절이나 직장시절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직접적인 관계가 없음에도 밀접할 수밖에 없는 어른일 경우,
이를테면 친한 친구의 부모님 같은 경우
나는 오직 예의를 다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에 나를 대하는 시간이 적을 것이고,
그러기에 내 순간의 일면이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겠다.
작은 내 언행까지도 행여나 어른들의 심기를 건들지나 않을까 조심할 것이고,
내 주의주장은 스스로 묵살한 채 청취하고, 수긍하는 데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내가 친구 부모님 만나는 일에 이토록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일 것 같다.

태초에 강한 성격을 타고나 주의주장이 강한 내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어야 하는 상황,
내 생각과 일치하지 않음에도 나 또한 그렇다며 거짓 동의를 해야 하는 상황,
그런 걸 나는 당연하게도 견딜 것인데 그것에 커다란 불편함을 느낄 것이고,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그러나 완전히 상이해 보이는 위 세 경우가
결국은 모두 내 아버지가 내게 심어놓은 예의 탓일 것이리라.
예의에 대한 강박관념이 결국은 예의에 대한 반발심으로도 함께 표출되고 있는 것이리라.

어려서부터 예의를 깊게 강요받아 왔기에
지금 내가 예의를 이중적으로 해석하고, 행동하고 있으리라.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591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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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qi2004-01-23 09:13:19
말죽거리잔혹사 강추원츄아이츄.
늬 그 생각에 대해 좋은 아이템을 줄거야...

게다가,
얼짱 한가인은 정말 올리비아 핫세를 닮은 것 같긴 하더만... ㅋㅋㅋ.

 Keqi2004-01-23 09:14:06
근데 광화문까지 간 게 새삼 놀랍지는 않은게...
너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기는 하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구?)

 achor2004-01-23 14:03:28
1. 그러고 보니 네 부모님도 한 번 뵌 적이 있구나. ^^;
2. 그렇지. 나 또한 내가 광화문에 간 것을 사실 그리 이례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예전 같으면 아무 주저함 없이 단 번에 달려갔을 것인데 이번에는 좀 고민했고, 좀 주저한 후 결심을 하고 가게 되더구나. 어쨌든 니가 나를 접한 시간이 많아 제대로 봤다 생각한다만 그 이유에 관해서는 다소 궁금한 편이다. 내가 먼저 정답을 말해보자면, 사실은 본문에 밝힐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빼버린 이야기이다만, 중요도와 빈도에 관한 적절한 조화다. 다시 말하자면 많은 친구들 역시 내게는 아주 중요한 인물들이지만 김 사장님은 내가 아무 때나 쉽게 만날 수 없다는 게 작용한 것이다.
3. 말죽거리잔혹사,를 극장에서 볼 리는 만무하고, 후에 vluez가 CD로 궈 놓거나 비디오로 나오게 된다면 한 번 꼭 보마.
4. vluez와 영철이형, 기중형님, 충형님, 그리고 나 또한. 우리는 최근 부쩍 바빠진 네 이야기를 종종 나누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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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