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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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1428 Vote: 72 )
분류      독백

문득 본 핸드폰 속의 날짜는

오늘이 2001년 9월 1일 토요일임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어떻게 흘러가 버렸는지 모를 한 주일이고,

어떻게 흘러가 버렸는지 모를 한 달이다.

어느새 토요일. 그리고 9월.



여름이 가고 있나 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풍기 없이는 살 수가 없을 지경이었는데

이제는 가끔 오싹함을 느끼며 선풍기를 끄곤 한다.



나는 여름을 참 많이 좋아한다.

여름은 마치 내 열정과 같아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 무렵이면

나는 알 수 없는 회한과 슬픔을 느끼곤 한다.



가을.



지난 밤에는 오랜만에 라디오를 들었었다.

늦은 시간 대의 프로그램답게 아나운서는 편안한 목소리로

내가 잠시 떠나있었던 세상의 이야기를 속삭여줬다.

까만 밤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는 옛 생각들을 많이 떠오르게 했다.



예전 혼자 살 때는 이런 시간이 많았다는 걸 기억해낸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참 좋아했다는 걸 기억해낸다.

언젠가는 음악을 들으며 소설 쓰는 걸 좋아하기도 했었고,

혹은 까만 밤에, 아니면 해 지는 저녁께에 혼자 가까운 학교 근처를 산책하거나

뜨거운 여름을 기대하며 힘겨운 운동을 하기도 했었다.

TV를 보기도 했고, 비디오를 보기도 했고, 소설을 읽기도 했고.



명륜동, 그 허름한 아처제국에

나는 좋은 기억들을 한아름 남겨놓고 왔다.



한 달 전에. 내가 리니지를 하지 않던 시절 밤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여기저기 흔적들을 찾아봐도 별 것이 없는데,

나는 무엇을 하며 그 긴 시간을 홀로 보냈을까.



2학기 개강이 다가올수록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학교를 졸업하긴 해야할 것인데, 나는 대학원에 갈 것인데

지난 1학기처럼 학교를 다니게 된다면

아무 소용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한 학기를 다녀봤자 이수하는 학점도 적을 것이고,

그나마 이수해봤자 성적은 형편 없을 것이 분명한 터.



아버지께 전화가 왔었다.

다음 학기 학비 납부가 언제까지냐고.

아마도 형식적인 전화일 거라 생각한다.

나는 이미 지난 학기, 피 같은 내 돈으로 학비를 낸 터.

한 번 그렇게 떵떵거려놨는데 이제 와서 돈 없다고

부모님께 학비를 지원받는 것도 쪽팔리다.

나는 돈도 없으면서 걱정 말라고,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이야기하곤 전화를 끊었다.



어떻게든 내 힘으로 학비 내는 건 문제가 아닌데,

학비를 내고 나면 나는 지금처럼 여유롭게 하고픈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나를 망설이게 한다.

나는 다시 일을 해야한다.

비참하면서도 당연하게. 먹고 살기 위해서.



그렇지만 아직은 조금 더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말이다.

좋아하는 김성수 감독의 무사도 보고 싶고,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아무 하는 일 없이 시간을 축내며,

리니지를 하든 뭐를 하든

내가 원하는대로, 내 의지가 이끄는대로 내 삶을 소멸시키고 싶은데...



나는 지금의 내 삶에 만족한다.

나는 내 삶이 회색빛이길 희망한다.

마치 '중경삼림'이나 '도시에서의 사랑'에 나오는 그런.

불행을 꿈꾸지는 않지만 맑고 밝은 행복을 꿈꾸지도 않는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걸 바라지 않지만 원대한 목표와 찬란한 꿈으로

내 삶이 뒤덮혀져 버리는 것도 싫다.

적어도 지금은.



나는 자유롭게 일을 하고 싶고,

그리고 자유롭게 내 삶을 이끌어 나가고 싶다.

나는 내 삶의 주체자이기를 갈망하고,

내 삶에 다른 이에 개입되는 걸 거부한다.

또한 나 역시 누군가의 삶에 개입되고 싶지 않고,

나는 내가 고독과 외로움에 당당하길 희망한다.



그럼에도.

나이를 먹으면 먹어갈수록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지금보다 조금 어렸던 시절에는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와 헤어지는 일들이

내 삶에 깊은 의미가 되지 못했던 것도 같은데...



예전에 나는 참 어렸었다.

많은 걸 몰랐으면서도 세상에 너무 자신만만했었다.

나는 내가 인간의 상대가 되는 것이 싫었고,

오직 신만이 나를 제압할 수 있기를 바랬던 것 같다.

내가 불경한 소리로써 신을 모독했던 까닭도

아마도 한 번쯤 신과 대결해 보고 싶은, 무지한 자만심에 기인하리라.

나는 정말 무식했었고, 또한 덕분에 용감했었다.



나는 다시금 근원적인 문제에 시달린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내 희망대로 적당히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는 건 괜찮은데

비슷하게 해봤더니 영화처럼 멋이 없다.



그렇다고 빨리 학교를 졸업하고 좀더 전문적인 무언가를 해보기엔

내겐 공부할 생각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겠고.



이렇게 저렇게 가버리는 내 젊음이, 내 시간이

너무나도 아깝다.

이 시간들이 가버리고 나면 대부분의 영화가 화려하게 기록하는

그 젊음의 이야기들은 내 삶에서 종결되어 버리고 만다.

나는 그게 무척이나 두렵다.



2001년. 25살의 여름이 가버리는 것도 두렵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옛 시간 속에 빠져있는 것도 두렵다.



그럼에도 아무런 예외를 두지 않는 시간은

정확하게 2001년 9월 1일.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9,005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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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11/06/1999 04: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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