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11일 일요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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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Vote: 68 )
분류      잡담

초저녁부터 잠들어 깨어나 보니 새벽 1시.

CA-TV를 통해 뽕을 봤고, 투캅스3를 봤고, 이런저런 잡념을 하며 밤을 지새웠다.

샤워를 마치고 마지막 담배를 한 개피 태우곤 의자에 앉는다.



그리 맑지 못한 날씨가 아쉽긴 하지만

창문 사이로 비쳐오는 아침 햇살이 좋다.



문득 남가좌동에서 맞이했던 아침이 떠오른다.

소식 끊긴 사람들이 하나 둘 떠오르며 그리워진다.



이제는 적지 않는 옛 다이어리를 들추며

내가 많이 변했음을 실감한다.

더이상 생각을 할 수 없는 내 자신에 아쉬움이 밀려온다.



나는 이제 식상해졌다.

이미 사회물을 많이 마셔버렸기에 그렇고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더이상 진취적인 것에 열광하지도 않고,

후배들의 도전정신에 박수를 보내긴 커녕 유치하다고 손가락질 하고 있다.

나는 이제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



일전에 나는 내 자신의 창조성에 만족하고 마는 가벼움이 있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넓게 사고할 수 있었다고는 생각한다.



내 식상한 말투에 질려 뜨거운 커피 한 잔이 그리워졌다.

잔에 물을 담아 전자랜지에 1분 30초 시간을 누른 후 다시 의자에 앉았다.



나이가 든다는 건 이런 것일까?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이 밀곤

무서울 것 없었고, 걱정 없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는 듯 한데...



이미 길어진, 그리고 젖어있는 머리카락이 귀찮다.

내 어머니는 커피를 좋아하시는지 집에 올 때마다 종종 커피의 상표가 바꿔있다.

오늘은 맥심 오리지날 블랜드,다.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섹스는 노동 이외에 아무 의미 없다던 그 소녀의 말을 기억한다.

나는 섹스를 좋아하는 것일까, 싫어하는 것일까.



뜨거운 커피를 마셨더니 덥다.

다시 담배가 생각나지만 이미 다 폈다. 나가야하나 보다.

지금 담배를 사올까, 말까.



지난 날의 두려울 것 없던 전위성을 갖고 싶다.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것들에 자신감을 갖고 도전하고 싶다.



그렇지만 이미 내 머릿속엔

끝없이 치솟은 고층빌등과 사무적인 정장을 껴입은 양복쟁이들의 모습만이 가득하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이 아니라

느끼하게 기름 발라 뒤로 넘긴 머리카락이 느껴진다.

간사한 웃음이 얼굴에 가득하다.



나는

깨어있고 싶다.

아직도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꿈꾸고는 있지만

나는 이미 조금씩 조금씩 기존의 사회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는 걸 안다.



에잇. 이런 말 조차 거추장스럽고 지저분하다.

고정관념이라느니 일탈이라느니 전위라느니 엽기라느니...

그런 모든 말들이 다시 흔해 빠진 어휘들이 되고만 세상이다.

내 입으로 그런 말들을 한다는 게 싫어진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주변에서 이제는 쉽게 들을 수 있는 결혼이야기.

결혼도 마찬가지.

나는 내 주변의 많은이들처럼 나 또한 결혼에 대해 확신 못하는 게 싫다.

Funny Game, Trainspotting, 주유소습격사건에서 보여진

권선징악으로부터의 탈피가 일반화 되는 게 싫다.

내 생각이 동시대 젊은이들과 비슷하다는 게 싫다.

누구나 벗어나려 한다는 것도 그러기에 엽기라는 말이 일반화된 것도 싫다.



나는 아직도 결혼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나는 아직도 특별히 결혼할 생각이 없다.

나는 아직도 한 여자와 평생을 산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런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게 짜증난다.



담배나 사와야겠다.

그리고 지금까지 만나왔던, 내 기억속에 새롭고 기발함을 안겨준 사람들을

간직해야겠다.

다시 만나보고 싶다.

그들을 통해 이렇게 식상해져 버린 나를 되돌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지만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두어야 한다지 않았던가.



패러독스요 딜레마요 씨팔 젠장할 세상이다. 쩝.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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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           Re 3: 형 가르쳐 주세요. 김신갑 2000/06/12
547답변            Re 4: 형 가르쳐 주세요. achor 2000/06/12
546       Re 1: satagooni의 Board를 뚫어라! 사타구니 2000/06/12
545잡담    2000년 6월 11일 일요일 아침 achor 200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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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11/06/1999 04:17:00
Last Modified: 02/10/2025 21:1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