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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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Vote: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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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모두들 새천년에 열광하던 그 해, 나는 나름대로는 열정을 품은 학원 강사였다.
나 역시도 이 시대의 무수한 젊은 교육자들처럼
내가 학창시절에 느꼈던 교육의 부조리를 몸서 개혁하려 했었고,
아이들에게 보다 교육다운 교육, 진짜로 젊음을 누리는 법을 알려주고 싶어 했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역시도
이 시대의 무수한 젊은 교육자들처럼 그저 의욕과 열정만을 나만의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었을 뿐이다.

알지 않던가.
젊은이라면 누구라도 세상을 바꿔보려 하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고 나면 세상이 그들을 바꿔버린다는 것.
무슨 꿈이든 이 시대의 젊은이라면 누구라도 품는 그저 그런 꿈이라는 것.
나는 결코 특별하지 않다는 것,
오직 나만이 모두가 실패한 꿈을 현실로 실현시킬 수 있다는 발상의 유치함.

나는 교육에 있어서 진도, 성적, 아이들과의 관계 등 삼 박자에 걸쳐 고루 괜찮은 편이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짧은 학원 강의 시간이었지만 학교 수업에 뒤떨어지지 않았고,
아이들의 성적도 많이 올려주었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과 잘 놀아주어 원만한 관계 또한 유지하였고.

그러나 나의 문제는 교육의 방법이었다.
나는 결국 키팅이 될 수 없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성적을 올려주거나 생일을 축하해주고, 같이 게임을 하면서 현실적인 즐거움을 줄 수는 있었겠지만
그들에게 꿈이나 삶의 진실, 청소년기의 이상과 바람직한 모습 등을 가르쳐 주지는 못했다.
나는 그들에게 카르페디엠을 이야기 하지 않았고,
그들은 나를 위해 오, 캡틴, 나의 캡틴이라 외쳐주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과 수업시간에 만화책을 보거나 PC방에서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학원 내에서 나의 인기는 괜찮은 편이었기에 원장도 나에게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었다.
나는 부족한 학습 시간을 극복하기 위해
완벽한 쪽집개 강의, 절대적인 암기식 수업, 폭력이 난무하는 교육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다만 폭력을 희화화 시켜 아이들이 폭력의 고통은 느끼지만 그 감정이나 기분은 유쾌하게 해주곤 하였다)
이것은 나를 부끄럽게 하기도 하나
또한 내가 얼마나 사회적인가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한 증거가 되기에 나름대로는 자랑스럽기도 하다.

물론 내가 원하는 교육의 방법이 아니었다.
나는 아이들의 성적을 올려주는 대신에 삶을 알려주고 싶었고,
내가 놓쳐 후회했던 젊은 날의 해야할 일들을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철학책 읽는 것을 좋아했었다.
사실은 이 새끼가 무슨 얘기 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쨌든 무언가 느껴지는 그 사고의 깊이를 나는 아주 좋아했었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서양철학을 좋아했었는데
그래서 나는 내가 손해보는 것, 합리적이지 못한 것을 잘 참지 못했었다.

이를테면
내가 학교 뒤 분식점에서 오뎅국을 먹고 있을 때
그 속에 날파리가 한 마리 들어있었다면
나는 즉시 주인에게 변상을 요구하거나 한 바탕 욕지거리라도 하는 편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지불한 금전에 대한 정당한 권리의 수행일 지도 모르겠다만
이제 나는 그저 날파리 건져내고 그냥 먹게 되었다.

이것은 철학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코즈머폴리턴을 지향하고, 내가 한 국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싫어하며, 국가의 장벽이 허물어지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러나 나는 한국인이고, 한국에 살고 있으며, 한국은 유교적 사상이 현존하는 동양권 국가였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너무 무지하여 서양적인 사상과 삶의 방식을 그대로 한국에 적용시켜려고 했었던 것 같다.

나는 이제서야 흔히들 이야기 하는 한국의 정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겠더구나.
한국에서는 다소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입장이 되어 조금 이해해 주고, 참아주는
정 문화가 너무나도 만연하게 펴져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물론 이런 것들이 결국은 부정부패를 낳고, 비리를 양산하기도 하지만
또한 세상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나를 많이 봐주는 편이었지만
이제는 나도 사람들을 조금 봐줄 수 있겠더구나.
나는 내가 조금 더 손해보는 것을 별로 꺼리지 않는다.
내게 원한이 있어 일부러 날파리를 넣은 것도 아닌데, 레지스트리 강한 내가 좀 먹어주지 뭐, 하며 쉽게 봐줄 수 있겠다.



인간을 가엽게 보는 것은 신만이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나는 인간을 가엽게 본다.

이건 괜찮은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저 원장, 아이들 성적이 떨어지면 수강생들이 줄어 학원 망할 텐데,
그러면 그 부인, 그 자식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불쌍하구나. 그들을 위해서라도 아이들 성적 좀 올려줘야겠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는 건 사회적인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 한 번쯤 생각해 보고, 내가 좀 손해보더라도 사람들을 봐주면서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물론 나는 성질이 지랄 맞고, 성격이 고약하여 잘 하지는 못한다만
그래도 그렇게 살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꾸준히 하고 있다.

나는 이미 하늘이 내린 섹시함이 있으니
그게 없어 슬픈 이 범인들을 내가 좀 봐주지 않으면 얼마나 불쌍하겠느냐.



다사다난했던 학원 강사 시절을 마치고
무언가 새롭게 네 꿈을 향해 준비를 하나 본데,
성공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기를 기원한다.

네게는 추진력과 왕성한 의욕이 있으니 시장 분석만 잘 해낸다면 어떤 일이든 성공적일 거라 확신한다.

ps.
http://my.achor.net/bothers
금방 되는 걸 부탁한 지가 언젠데 이제서야 마련하게 되어 미안하게 됐다. 다만 바빴다. --;
별 것 아니다만 유용하길 빈다. 메뉴얼 꼭 좀 읽어라. --;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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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thers
하필이면 저 사진을 집어넣을껀 또 뭐냐 --;;;;;


 2002-09-14 16:57:14    
sakima
2015.9.14
13년 후의 너희 친구인 내가.
너희들의 그시절 고민과 결심과 노력이 결실을 맺는단다.
그나저나 너희들.
정말 귀엽고 기특하다.

 2015-09-14 22:19:53    
achor
1. 열정을 품은 학원 강사라는 스스로의 고백이 참으로 낯서네.
2. 창진과는 예전부터 동일 업종 근무자였던 게군. -__-;

 2015-09-18 09: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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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0     오빠 게시판을 넘 지저분하게 만들어버려 죄송 ^^: 이선진 2002/09/13
3989답변      Re: 오빠 게시판을 넘 지저분하게 만들어버려 죄송 ^^ [1] achor 200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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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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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11/06/1999 04:17:00
Last Modified: 02/10/2025 21:1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