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아처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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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2165 Vote: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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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가야한다는 부담감이 컸으면서도 여전히 디아를 하고 있었지요.
새벽 4시,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서 자기 위한 준비,
마루나 화장실의 불을 끄는 일과 매피봇을 돌려놓는 게 전부이지요,를 한 후
마지막으로 제 홈페이지와 메일을 확인하였습니다.
Jinr님의 글을 본 것은 그 때였지요.

Jinr이란 닉네임은 어쩐지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겨서 조금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첫 문장, 소주 넉 잔으로 시작하던 그 문장이 조금 의심을 심어주더니만
결정적으로 2년 2개월 동안 삽과 총을 들었다는 것으로 제 모든 희망과 기대를 송두리째 뽑아내시더군요. --;
저는 오래 전 알았던 옛 사랑의 글이길 희망하였습니다. ^^;

Jinr이란 닉네임에서는 이유 모를 기시감이 느껴지더군요.
자음과 모음으로 완벽하게 구분되는 한국어에 익숙한 제게 있어서 r로 끝나는 것도 그렇고,
그닥 영어 실력이 좋지는 않지만 어떤 약자 같지도 않기에
Jinr은 완벽하지 못한 단어라고 생각하였고, 그런 단어를 예전에 본 적이 있어서 그런 지도 모르겠습니다.
혹 제가 Jinr이란 닉네임을 본 적이 있는지요?

저 역시 Jinr님과 비슷한 생각을 많이 하곤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른이 점점 가시적으로 나가오는 나이,
게다가 미래를 완전히 책임지고 결정해야 할 시기이기에
이 무렵 또래들이 대개 겪는 일인 것도 같습니다.

일본에 갔을 때 저는 넉넉치 못한 돈이었음에도 무라카미 류의 소설책 한 권을 사가지고 왔습니다.
저 역시 하루키나 류 같은 소설가를 예전에는 아주 좋아했었거든요.
시간이 흐른 후에 저는
한때는 영웅이었던 류를 철저한 상업주의자라고 재평가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류의 소설책을 사온 까닭은
제 젊은 시절에 대한 조의의 의미였습니다.
젊은 시절 제 열정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지니고 싶었지요.

저 또한 제 나이 스물 남짓 시절에 써놓은 글들을 간혹 읽어 보곤 합니다.
문향소에 있는 대부분의 글들도 그 시절에 써놓은 것들이지요.
그리곤 Jinr님처럼 생각한답니다.
진심이 결여되어 있다 치더라도 문장은 훌륭하다고 자찬해 버렸다. 아……. 지금의 나보다는 낫다고 자찬해 버렸다.

그 시절에 저는 책을 조금 읽었었는데
요즘은 책을 거의 읽지 않으니 그런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그 시절만큼 스스로에게 만족스러운 글은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제 글이나 문체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답니다.
스토리는 어느 정도 짜볼 수 있겠지만 그것을 표현해 내는 데에 제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이제서야 많이 실감하고 있는 것이지요.
제 문장을 흉내내보려 했었다는 이야기는 제게 너무나도 큰 영광입니다.
그러나 저는 언제나 비슷비슷하고 이유 없이 장구한 제 문체에 많은 실망감과 좌절감을 느끼곤 합니다.

맞습니다.
제 학창시절 꿈은 웃지마십쇼, 세계 정복이었습니다. --+
최선은 무력에 의한 실질적인 정복이었습니다만 그것이 불가능 하다면 세계 사람들의 정신에 강렬한 저의 선을 긋고 싶었습니다.
사실은 전혀 소질도 없는 음악가나 소설가가 되려고 했던 까닭도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수월한 길이라는 제 나름의 분석 때문이었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시 나이가 들면 세상을 좀 더 알게 되고, 겸손함을 배우게 되나 봅니다.
저와 같은 세계 정복을 꿈꾸었던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걸 알게 되었고,
오히려 제가 그들에게 정복당하고 있다는 것도 느끼게 되었죠.
우리는 세상을 바꾸려 했지만 시간이 흘러보니 세상이 우리를 바꾸었다,는 말처럼.
누구랑 봤는지 기억도 안 나는, 그닥 재미 없던 Velvet Goldmine은 여전히 저를 놀라게 합니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누구를 존경하며 살든 간에 미싱은 잘도 돈다. 돌아간다.
아마도 최후까지 남아야할 도덕이 있다면 그것은 易地思之,라고 생각합니다.
한때는 완벽하다고 믿었던 제 가치관과 생각, 사상들을 다른 이들에게 주입시키고 싶어서 안달이 났기도 했었지만
사실 진리는 易地思之 밖에 없다는 걸 알겠더군요.
제가 그토록 무언가를 믿는 만큼 다른 이들 또한 스스로의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
어떤 이가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가든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것,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육적인 정의들, 이를테면 법이나 규범, 예의 같은 것이 정당하기 보다는 사회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들로부터 항상 불완전함을 느끼곤 합니다.

그럼에도,
세상도 몰랐고, 겸손하지도 않았으며, 맹목적인 열정과 자신감만 가득했던 그 시절이
저 역시도 그리울 뿐입니다.
오늘 낮에도 생각했던 일이지요.
다시 스무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6년 전의 제가 꽤 멋진 놈이었는지 확신은 들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지금 제게는 부러운 놈임은 분명합니다.
저 역시도 그저 그리울 뿐이네요.

만수무강 하시길.
삶은 시간과의 싸움일 것인데, 싸움에서 이기시려면 시간을 지배하셔야지요. ^^;

ps. 아. 잠은 포기하고 커피나 한 잔 마셔야겠습니다. 오늘 학교 못 가면 책임지십쇼. --+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8,222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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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thers
-_-a 뭔가 예의바르게 쓰려고 엄청 노력한거 같다만..
그 소주 네잔 마신넘은 어제밤 나랑 같이 잔넘 같은걸?
딱 네잔마시고 술주정땜에 괴로웠지 --+


 2002-10-07 10:24:11    
achor
읔. 그 기시감이 그것이었구먼. --;

 2002-10-07 11:14:07    
achor
아. 결국 학교 못 갔다. --;

 2002-10-07 13:4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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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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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11/06/1999 04:17:00
Last Modified: 03/16/2025 19:3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