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체는 어느덧 천천히 육지 쪽으로 기수를 돌린다. 창문너머 어렴풋이 바닷가가 보이는가 싶더니 잠시 후 착륙한다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온다. 눈을 감고 호흡을 길게 가다듬는다. 15년만이다.
꿈에도 그리던 그 곳.
여기는 부산이다.
1일차 : 수줍은 마음.
15시 40분, 회사를 빠져나와 택시에 오른다. 17시 30분 비행기라 전철로도 넉넉한 시간이지만, 마음은 벌써 초조해진다. 한 시라도 빨리 공항에 닿아 1분이라도 빨리 비행기를 탈 수 있어야 했다. 오로지 단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준비한 여행. 그를 만나야 한다.
교통방송 통신원 출신이라는 택시기사의 현명한 선택으로 김포에 떨어진 것은 택시에 오른 지 정확히 34분 후. 21,000원의 요금 따위는 30분 일찍 비행기에 오를 수 있다는 이유로 내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검색대를 지나 트랩을 밟으며 사뭇 세월을 느낀다. 보잉 727이나 737이 주였던 부산 행 국내선엔 어느덧 비즈니스 석까지 갖춘 에어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국제선에서나 볼 수 있었던 대형 액정화면으로 안전벨트 매는 법과 현재 고도, 위치 및 속도가 반복 표시되고 있었다. 20년 전, UI(승무원 보호 어린이)로 홀로 서울 행 비행기에 오를 때와는 천양지차.
흐린 저녁하늘을 뒤로 하고 기체가 이륙한다. 기류이상으로 기체는 전에 없이 흔들리지만 구름 위의 석양만큼은 정말 아름답다. 음료수를 연거푸 마셔도 귀는 연신 멍멍하다. 40분의 비행시간이 지금처럼 지루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810번 안에서 서울말씨를 쓰는 사람은 나와 그 아지매뿐. 아지매는 김해에 와 있다는 길치 남편 덕분에 연신 전화통을 붙들고 있고, 기사 선생은 예의 부산 사투리로 참으로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기어이 서부터미널에서 아지매는 내리고, 나는 ‘기사 선생님, 성격 좋으시네예’란 말로 그간의 노고에 화답한다.
“내가 무신 선생님 소리를 다 듣겠닝겨” 하는 그의 얼굴 위로 웃음이 번진다. 적어도 이 순간부터는 서울말씨를 써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유년시절만 해도 부산말씨와 서울말씨를 완벽하게 섞어쓸 수 있었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면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부산에서는 적어도 부산 말을 쓰고 싶었다.
“자갈치가 그래서야 되겠십니껴? 외지 사람들한테도 친즐하고 싸고...”
기사 선생은 연신 웃는 얼굴로 참 편하게 사람들을 맡고 있었다. 부산에 대한 애정이나 자존심도 남다른 것 같았다. 하긴, 내 기억에도, 이북에서 내려온 이모부는 물론이려니와 돌아가신 우리 이모나 막내 외삼촌 역시, 생전에는 부산에 대해선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나고 자랐으면서 관심조차 없는 내 고향 서울에 대한 느낌이 떠오르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세월은 변해도, 대로에 차 막히는 근 예전 그대로지예?”
부산은 전국적으로 따져 봐도 도로율이 좋지 못한 도시다. 한국전쟁 통에 시가지의 규모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길을 낼만한 곳에는 모조리 판잣집이 들어앉아 버렸다. 판잣집은 세월이 흘러 아파트도 되고 단독주택도 됐지만, 여전히 길은 예전 그대로란다. 그런데, 주변의 지형지물이 하도 모던하게 바뀌다보니, 왠지 내 기억 속의 그 길이 넓어진 것만 같다. 밀린다고는 하지만, 교통체증 역시 서울에 비하면 새발에 피.
남포동. 처음 와 본 것 같다. 건너편엔 자갈치가 보이고, 거리 구조나 모양은 언뜻 신촌 로터리를 연상시킨다. 느낌은 왠지 낯설지 않다.
naked와 쥬쓰다. 목소리는 얼굴과 또한 낯설다. 그러나 반갑다.
“밀면 드실... 거지요?”
둘은 나를 이끌고 골목골목을 굽이 돌아 어느 면옥에 데리고 간다. 그러잖아도 아침에 ‘시선집중’에서 내년부터 식품공전에서 ‘메밀이 없어도’ 냉면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을 들은 참이라 또한 새롭다. 8부두 근처 허름한 냉면집을 떠올리기엔 부산은 여전히 모던하였고, 긴장감에 점심조차 굶은 내 허기에 밀면이란 말 한 마디로 모든 것은 오케이다.
무엇보다, 15년 만에 먹는 밀면은 역시 사람이 먹을만한 맛있는 음식이다.
미야오에 조작가도 왔다.
밀면을 먹는 우리를 흘낏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미야오의 모습이 반갑다. 사진 속 모습만 봤는데도, 여전히 친근하다.
넷은 내게 로바다야끼로 가자고 한다. 언늬들이 나오는 비싼 일식집이나 우설(牛舌) 구이를 파는 일식집을 생각했던 터라 좀 긴장을 했는데, 셋은 부산엔 로바다야끼가 흔해빠진 거라고 말한다. 대충 들어보니, 서울에선 한 번도 못 본 것 같긴 하다.
안주의 압박.
미야오의 그 표정을 이해할 수 있겠다. 이래 먹을 것이 많은데, 바보같이 왜 밀면을 먹느냐는 그 표정. 그러나 달리 말하면 그만큼 그들은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오십세주를 먹자는 말에 나는 천국과 C1을 한 병씩 시켰다. 사탁이 전수한 천국의 이슬을 응용한, 시원한 천국을 보여줄 요량이었다. C1은 부산 소주 이름인데 대선주조라는 곳에서 나온다. 회를 많이 먹는 부산 사람들 입맛을 고려한 탓인지, 참이슬에 비해 단맛이 적다. 감미료에 질려버린 내 입맛에는 그야말로 반가운 선물.
나름대로 제조를 끝냈지만 덜 섞였다. 시간이 덜 됐거나 내가 급했던 탓이다. 미야오가 알아서, 술을 적정 비율로 섞어놓는다. 맛이 꽤 괜찮다. 더는 기다릴 수 없으니 시원한 천국은 나중에 다시 한 번 해 볼란다.
가방에서 준비한 선물을 꺼내놓았다. 조작가를 염두에 둔 노르웨이의 숲은 이미 그미가 읽었다 하니 미야오에게로 가고, 미야오에게 준비한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조작가에게로 돌아갔다. 원래는 김훈 수필집과 함께 2권 1책으로 나온 패키지였으나 멋지게 맥주에 수필집을 적시는 통에 비린내가 심해서 서울에 두고 내려왔다. ‘증정본’이 박힌 책만 덜렁 줄라니 마음이 좀 그렇다. 쥬쓰에게는 ‘올해의 인물’이 박힌 타임지와 다이어리, naked에게는 프랑스어 교재를 챙겨주었다.
“이거 우리 집안 애들이라 므으믄 안 되는데, 께~끼~.”
naked네 전공 사람들 둘이 더 와서 자리도 제법 풍성해졌다. 두 분이 들고 오신 케이크를 보고 썰렁한 장난을 쳤는데 재밌나보다. 사실 장난을 치고 싶어서라기 보단 그냥 분위기에 흘러가는 대로, 그런 애드리브를 한 것뿐이다. 사람이 좋고 분위기가 좋으니 그냥 나도 즐거운 것뿐. 서울에선 좀처럼 없는 일이다.
밖으로 보이는 영도다리 앞바다도 그렇고, 시원한 천국 맛도 그렇고, 내일 출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없으니 술맛 한 번 좋다. 술은 이렇게 먹어야 한다. 아홉 시에 들어왔는데, 어느덧 시간은 밤 열한 시.
다른 두 분의 친구들과 미야오, 조작가는 안녕히 돌아가시고, 쥬쓰, naked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용두산 공원에 올랐다. 6년 전 이맘 때, 서울타워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오른 기억이 나서 느낌이 사뭇 달랐다. 내일이면 여기서 제야의 종을 친다 하니 사람 한 번 많겠다. 나름대로 사진도 찍고 수다도 좀 떨다 대충 적당히 취한 채로 그리니치 빌리지에 가기로 한다.
방이 어지럽다고 쥬쓰나 naked는 미안해하나 상관없다. 전혀 어지럽힌 방도 아니다. 주유소가 문을 닫아 기름을 사오지 못한 게 아쉽지만 전기장판이 있어 굉장히 따뜻하다. 쥬쓰는 가스로 씻을 물을 데우고 차례로 돌아가며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쥬쓰와 naked에게 발 마사지를 해준다. 자가바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읽고 그러잖아도 준비했던 바다. 자가바람은 통풍(痛風)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운동부족으로 근육이 뭉치거나 피에 점성이 많아 모세혈관에 피가 잘 통하지 않을 때 생긴단다. 발 마사지도 어릴 적부터 자가바람이 심해서 살기 위해 배운 거지만, 자가바람이 났을 때만 잠깐잠깐 할 뿐, 평소엔 거의 하지 않았다.
naked, 자가바람이 심하다는 나보다도 훨씬 더 좋지 않았다. 혈이 경직된 것도 그렇지만, 너무 아파서 ‘하지 마세요’란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간 여러 가지로 몸이 많이 지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선은 잠이라도 편히 잘 정도로만 살포시 풀어주었다. 맥주나 한두 잔 먹으려 했지만, 그만두고 자기로 했다. 세 시쯤 된 것 같다.
2일차 : 아무런 이유 없이.
다섯 시 반쯤 눈이 뜨인다. 출근모드에 익숙한 탓이다. 쥬쓰나 naked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아, 다시 눈을 감지만 잠이 들 리가 없다. 대충 눈이나 감고 명상을 하며 뒤척거리길 열 시.
쥬쓰의 사정으로 그리니치 빌리지를 out하기로 했다. naked의 핸폰을 충전한다는 생각을 깜빡한 게 아쉽다. 대충 챙겨놓고 예대 캠퍼스로 향한다. 어제 돌아다니다가 용두산 공원에서 단화 끈이 없어져 손을 봐야 했다.
“사람이나 구두나 결국엔 사람을 잘 만나야 카는기라.”
몸이 불편한 구둣방 할배는 그렇듯 몇 마디를 툭 던져놓고 이야기 썰도 풀어놓고 노래도 하며 구두를 손질한다. 서울에서는 불광을 내야만 반짝거리던 구두가 물광 만으로도 반짝반짝 윤이 난다. 오른쪽 구두 옆이 터진 걸 보니 아마도 불광을 잘못 낸 탓이 아닌가 싶지만, 9년이 넘도록 신은 구두라 그런 것도 그리 이상해보이지는 않는다. 갑자기 노트북 생각이 나서 또 기분이 그렇다.
솔직히 naked 보고 내가 남친이냐고 물어볼 때는 기분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알다시피, naked는 여러 면에서 참 좋은 사람이잖은가. 바쁜 사람을 졸라 캠퍼스 구경을 하고 있지만, 데이트하는 기분이 들어서 괜히 싱글벙글 그렇다. 대딩 시절에 여친이 있으면 해 보고 싶은 게 그런 거였는데.
박물관 구경을 갔다. 느릿느릿하지만 귀에 쏘~옥 들어온다는 naked의 설명을 들으러 간 거였는데, 문득 설명에 열을 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도자기에서 시작한 내 주접은 어느덧 동양화 낙관 위에 있는 한자 뜻풀이까지 하고 있었다. (동양화에는 보통 작가가 작품에 대한 간략한 해설을 한자로 달아놓곤 한다.) 국사 시간에 수업은 잘 들었나보다 싶어 다행이면서 naked가 지루해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는 잘 들어주었다. good listener란 쉽지도 않지만, 만나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지금 그런 사람이 내 옆에 있다.
박물관 구경에 너무 시간을 많이 뺏겨 조금 빠듯해졌다. 학교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부산 제1의 서점이라는 문우당엘 갔다. 종로서적이나 홍익문고와 비슷한 분위긴데, 프랑스어 책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사전과 문법서를 하나씩 골라주고, 잠시 보수동 헌책방에 가서 한불사전을 찾아보기로 했다. 연말연시 약속도 많을텐데, 전혀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람에 대한 배려의 깊이가 보인다.
보수동에선 naked 덕분에 서울에서도 구하지 못했던 한불사전을 구했다. 보수동 책방거리는 서울로 치면 황학동이나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비할 만 하지만, 규모는 서울에 비해 훨씬 작다. 그러나, 책을 보는 연륜만큼은 서울보다 나았다. 나중에 보니 사전은 부산산업대 도서관 소장서였던 모양인데, 흘러나온 경위야 알 수 없지만, 책을 찾는 그녀의 센스와 도움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근처 다원에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어떻게 불어를 하시면 좋을지 간단히 이야기를 했다. 말을 하면서 naked가 서울에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불어란 혼자 배우기에 그리 녹록한 말이 아니다. 책도 많지 않고 노력도 꽤 많이 든다. 하루에 한 시간 씩만이라도 적어도 반 년은 필요하다. 그에게는 어떤 식으로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싶었다. naked라면 잘 할 거라 믿으면서도 무척 아쉬웠다.
“naked 같은 사람이 곁에 있으면 참, 좋을 것도 같아요.”
그녀를 보내고 옛날 미 문화원, 더 옛날엔 동척(동양척식) 건물에 생긴 부산근대역사관이란 건물에 들어가본다. 전시작품을 열심히 훑어보고 있는데, 좀더 정확히, 거기 써 있는 한자를 뜻풀이해가며 읽고 있는데 사무관이 와서 종무식해서 문을 일찍 닫아야 하니 빨리 돌아달라고 덜 정중히 부탁을 한다. 이래저래 1층에서 도록을 사서 거리로 나왔다.
동생을 기다리며 도록을 훑어본다. 잘 샀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에서는 좀처럼 구하기 힘든 진귀한 자료들이 많다. 역사를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도 본전 이상의 성과라 생각되어 기분이 좋다. 역사 관련 전시회에서 모든 소장 작품에 대해 도록을 만드는 경우는 서울 같으면 흔치 않다. 여긴 전 작품이 다 들어 있다. 역시나 스케일 차이다. 부산이란 도시에 대해 다시 한 번 마음이 들었다.
모던하다. 근대.
대학 때부터 많이 이야기하던 주제였다. 내 주제가 결국 ‘근대성(Modernity)'였고, 근대성의 발로로 재패니메이션이나 인터넷을 도구로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었던 것이 대학 시절이다. 극히 보수적이었던 연대에서 교수들을 뒤엎고 논문을 냈고, 옥스퍼드 교환교수였던 Murphy 선생의 인정도 받았다. 대학원을 가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너무 복잡했다.
한국에 있는 대학원을 다니며 교수들 밑에서 되도 않는 착취를 당하는 동기, 선배, 후배들을 보며 기분이 좋지 않다. 차라리 규모는 조금 작고 보수는 낮을 지라도 이 곳에서 착실히 실력을 쌓고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잘나가는 직장인이 되어도 좋을 것 같다. 기왕이면 wife가 공부하는 사람이면 더 좋겠다. 그런 데 쓰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 나 역시도 조만간 대학원을 다시 알아봐야겠다. 비록 야간 경영학과일지언정.
동생이 왔다. 키는 180이 넘는데, 돌아가신 막내 외삼촌을 닮아 마스크도 깨끗하고 성격도 좋다. 여자친구도 많고, 바람도 자주 피운다.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사촌형도 키는 자기 동생보다는 약간 작지만, 나와 비슷하고, 역시 마스크 좋고 성격 좋고 해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은근한 질투심이 느껴지지만, 명절이 아닌 때, 부산에서 만나게 되니 그런 기분 다 떠나 우선 반갑다. 핏줄이라 그렇다.
사촌동생을 만나 국제시장을 돈다. 깡통시장이라 부르는 밀수 전자제품 취급점부터 양주 취급점, 온갖 생필품 취급점까지 국제시장은 없는 게 없다. 이 곳을 어릴 적엔 이모와 어머니와 돌았고, 지금은 사촌동생과 돌고 있다. 10,000원짜리 기지바지에 30,000원짜리 구두로도 충분히 멋쟁이인 동생을 보며 부럽고 부끄럽다.
지나가는 길에 안경이나 맞출까 하고 안경점에 들른다. 가격도 서울보다 싸길래, 병원에서 도수가 높다고 하더라는 말을 했다. 이러저러 검사를 하고 안경을 맞췄는데, 전보다 도수가 세 단계나 낮아졌는데도 오히려 더 잘 보인다. 두어 달 후에 안경을 다시 맞추면서 도수를 두세 단계는 더 낮출 수 있다고 하니 다시 봐야겠다. 이번엔 반무테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서면에 들러 동보서적에 들어갔다. 광고홍보를 전공하는 녀석은 졸업 후에 광고 에이전시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녀석의 앞길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포지셔닝’을 사주었다. 집에서 머라고 글 한 줄 남기고 싶었는데, 아차, 잊고 말았다.
사촌형님과 함께 숙모의 가게에 들렀다. 20년 가까운 세월 탓에 얼굴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은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2층에 자리를 잡는다. 낙지볶음에 C1 네 병을 비우고 그간의 회포를 푼다. 조금 후에 숙모가 올라와 함께 자리를 갖는다. 어느덧 세 장정은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외삼촌의 죽음과 흔들리는 가정 속에서 2년제 진학 및 해군 부사관의 길을 선택한 사촌형과, 비록 부산에서라고는 하지만 어느덧 장학금을 놓치지 않을만큼 의젓한 학생으로 거듭난 동생을 보며, 나 역시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주 찾아왔어야 하는데, 진작 왔어야 하는데, 이렇게 오는데 15년이 걸렸다.
동네 바에서 151 스트레이트를 마신다. 바카디는 언제 어디서나 스트레이트 한 잔이 딱 좋다. 아, 세 잔까지는 상관없다. 사실 부럽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외가의 장손, 큰 외사촌형이 함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세 사람 모두 갖고 말았다. 큰 형님이야 몸이 좋지 않아 술을 먹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외사촌 5남매가 모여 서로의 회포를 풀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할 말도 많고 아픔도 많았다. 정신적 지주이자 물질적 지주였던 이모의 죽음과 이모부의 재혼. 강한 아버지와 강한 어머니 아래 자란 이모의 세 자녀의 삶은 그닥 순탄치 못했다. 두 외삼촌의 죽음은 각기 자녀들의 삶에도 어떤 식으로든 그림자를 드리웠고, 남은 사람은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외가가 절멸하면서 내 아버지는 어머니를 대놓고 무시하기 일쑤였고, 나는 그런 꼴은 참을 수 없었다. 똑똑하지만 약간의 가진 것들을 가지고 형제 간의 우애가 그닥 좋을 수 없었던 친가에 비해, 돈이 많으면서도 아껴쓸 줄 알았고, 항상 매사에 당당했던 외가를 더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이치.
무엇보다, 자식을 위해 인간관계까지 포기하고 뒷바라지를 해주었던 일자무식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효도란, 그런 식으로 남성우월주의에 어머니를 식모, 자식을 하인 컨셉으로만 생각하는 아버지의 오만과 독선, 편견에 일침을 가하고 부모, 혹은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학대하지 못하게끔 감시하는 당당하고 잘나가는 자식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서 공부를 했고, 그래서 모든 것을 걸고 싸울 수 있었다. 외사촌들 앞에서, 아니, 친가 사촌들 앞에서도 잘나가는, 그리고 당당할 수 있는, 하지만 나름의 싸가지는 챙길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영어, 수학을 못해 고딩 시절엔 항상 중간성적에 맴돌았지만, 배운 것만큼은 절대 잊지 않으려 애썼고, 매사에 노력은 엄청 했다. 그리고 그런 보이지 않는 노력 덕분에 대딩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름껏 잘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늘 나는 부끄럽다. 결혼이란 결국 사회적인 action이기에, 사랑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결코 좋은 조건이 아닌 내가 그 어떤 아가씨를 만나 사랑한다 한들 그 조건으로 인해 항상 약자의 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더구나 친가나 외가의 가족사를 보면서 결혼을 너무 서두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 건 분명하다. 사랑을 잃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부산은 술 먹기로만 따지면 서울보다 낫다. 서울에 비해 술집이 싸고 취급하는 양주의 종류도 많다. 마이크로 브루어리 맥주나 와인 같은 나름 고급 술집은 서울이 앞서지만, 양주(보통 위스키)에 있어서는 부산이 서울보다 낫다. 가짜 위스키가 나올 일도 적다.
범일동 어느 바에서 시작한 3차는 어느덧 맥주 한 짝에 양주 네 병을 비워버렸다. 코가 비뚤어질만큼 마셨을텐데도 오히려 정신은 맑다. 15년이 넘는 세월동안 묻혀 있던 서로의 깊은 이야기가 품어져 나오고, 서로를 부여안고 울고 웃고 하다가 어느덧 시간은 새벽을 달려 해가 뜬다.
오늘만큼은 내가 카드로 질러버렸다.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만큼은 그렇게 하고 싶었다. 결혼자금 문제 때문에 동료 BOQ에서 기거하면서 월급의 대부분을 저금하는 형이나 아직 학생이라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내고 용돈은 아르바이트로 충당하는 동생에게 부담을 떠안기긴 싫었다. 모자라면 서울에서 내가 안 쓰고 안 먹으면 된다. 그게 지금은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새해 선물이었다.
3일차 : 친구.
사상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마산으로 향했다. 전직 배구선수이자 지금은 창원 LG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 석봉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부산에서 마산은 한 시간 정도의 거리라 그리 멀지도 않고, 버스값도 3,100원 정도라 오가기도 무리 없었다.
전날의 폭음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몸에서 알콜 냄새가 뿜어져 나올 지경이었다. 샤워 한두 번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었나보다. 석봉의 여자친구인 보라마저도 대뜸 알아차릴 지경이었으니.
보라도 건강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병원도 자주 다니고 정기 검진도 받는다. 술도 자제하란다. 녀석은 지금 서울에서 사학을 전공하는데, 졸업하면 선생님이 되고 싶단다. 올해 교생 나가고, 조기졸업도 꿈꾸는 당찬 녀석이다. 무엇보다 석봉에게 참 지극정성인 친구다. 잘 알지만, 부럽고, 또 그래서 더 잘해줘야지 싶은 그런 녀석이다.
석봉이 회를 사줬는데, 한두 조각 집어먹고는 더 먹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잠을 못 잔 터라 사실 무리긴 했지만, 그래도 마산엔 가야만 했다. 녀석은 꼭 봐야만 했다. 녀석도 그것을 안다. 입영전야를 함께 하고 CJ와 함께 논산까지 동행했던 친구이자, 어려울 때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려 애썼던 친구. 아니보고 갈 수는 없었다.
원래는 마산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려 했으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짐을 부산에 뒀다. 우니구니와도 회포를 풀 필요가 있었다. 집에도 일이 있었다. 무엇보다 보나마나 술냄새 풀풀 풍기면서 석봉이 부모님을 뵙는다는 게 좀 민망스럽기도 했다.
어시장 회센터에서 회 먹(는 거 구경만 하)고 창동거리로 나갔다. 창동거리는 마산 시가지다. 석봉의 집은 중앙동이고 합포동인가가 시외버스 터미널이었다. 마산은 부산보다 작은 데다 부산의 영향을 직, 간접적으로 받는 탓에 부산과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산이 ‘범 경남권의 수권도시’를 꿈꾸는 이유를 알만도 하다.
창동거리 어느 커피숍. 학교 이야기로 시작된 수다는 한 시간을 넘게 끌었다. 이 얘기 저 얘기를 해도 이들과의 대화는 재밌다. 시간 여유가 있었으면 마산 산다는 쥬쓰한테 연락해보겠지만, 다섯 시까지는 양산에 있는다 했으니 그것도 무리다. 꼭 지금 만나도 무리는 아니다.
서둘러 마산을 뜨기로 했다. 석봉과 보라에게는 담번에 마산에 먼저 들러 1박을 하고 가겠노라 약조를 한다. 날짜도 보아두었고, 도착하는 대로 먼저 연락키로 하였다. 다음 번에는 술냄새를 그리 풍겨서는 곤란하겠다. 김해에서 사상까지만 나오면 되는 법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합포로 간다.
“한나라당 나오면 다 나온다는 생각은 집어치야 안하겠심니꺼? 국민들이 몬사는디 즈그들만 잘 산다 카이, 그기 지금 곙남 사람들의 불만 아잉교? 아마 슨그 때 쪼매 재미쓸끼고마예”
터미널까지 가는 길에 택시기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한국에서 택시는 한 지역의 실물경기를 반영하는 바로미터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대해 가장 직설적으로 들을 수 있는 공간이다. 지난 번 평창 때는 동계올림픽 유치 건이 걸리더니, 이번엔 총선이란다. 나는 꽤나 운이 좋은 녀석이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것 역시 내 속으로 바란 바다.
터미널에서 돌아가는 길에 국제신문과 부산일보를 샀다. 둘은 부산의 지역신문인데, 특히 석간인 부산일보는 부산의 민심을 대변하는 정론지로 알려져 있다. 서울에서 중앙지에 이회창 후보가 압승할 거라는 식의 바램이 실리던 시절에도, 부산일보는 말없이, 노무현 후보의 조심스런 우세를 점치기도 해 훗날 화제가 된 바도 있다.
신년기념 여론조사 결과가 나와 있다. 한나라당 및 우리당의 지지율 및 몇 가지 바로미터를 보면서 서울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전혀 알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잘 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기사는 내가 보기보다는 우니구니에게 주는 게 좋겠다. 사실 정치를 한다면 나보다는 그가 더 대중적일 게 뻔하다. 그는 감각적이고 명석하며 또한 감도 좋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를 정치에 빼앗기고 싶지 않다.
사상 터미널 앞에 사촌동생이 와 있다. 어제 무리를 해서 좀 자다 나왔단다. 저녁을 간단히 멀로 먹을까 고민하다가 사상 터미널 앞 롯데리아에 간다. 둘은 언제나 그렇듯 새우버거 세트다. 이모는 서울에 올 때마다 명동 롯데 본점에 있는 롯데리아에서 꼭 새우버거만을 사다 주곤 했었다. 닭튀김은 KFC, 피자는 신라호텔에서 한 번 사 줬었는데 그 때는 편식이 심해 전혀 먹질 못했다. 늘 그랬다. 패스트푸드 식성에 있어 비록 내가 실험적이긴 하지만, 원초적인 식성의 기저에는 항상 이모가 있었다.
“고기는 갈아 맹글으가 못 믿는 기라. 새우는 몸에도 좋고, 잡기 들으갈 기 읎는기라. 마이 믁고 빨리 크가 훌륭한 사람 되라카이. 그래야 이모도 조카 득 볼 그 아이가.”
사상 롯데리아에는 신문도 있었다. 서울에서 그리 많이 롯데리아를 가도 신문을 본 적이 없건만. 사촌동생도 처음 봤단다. 아마 터미널이니 그랬을 게 분명하다.
돌아가는 길에 사촌이랑 숙모 드시라고 밀감 한 상자를 샀다. 밀감(감귤) 역시 이모의 작품이다. 늘 서울에 올 때면 밀감을 박스 채 사다 큰 외삼촌 댁과 우리 집에 하나씩 보내곤 했으니. 지금도 어디 갈 때 만만한 게 눈에 띄지 않으면 그냥 밀감 한 박스를 사다 보낸다. 서울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짐을 정리한다. 담배피는 당신을 위해 부산에만 있는 향로 성냥을 하나 얻어 챙기고, naked가 챙겨준 판화도 소중히 간직한다. 사촌동생의 고장난 노트북도 손볼 겸, 들고 나온다. 짐이 두 배가 됐다. 국제시장에서 양주도 한 병 사가야 하는데 시간이 애매하다. 비행기 막차가 매진이라 멀 탈지 고민이 된다.
“행님아, 내 친구놈 차 타고 안갈라예?”
CPA 준비를 하느라 서울에 올라와 있던 자기 과 친구가 집안 사정으로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어 짐을 챙기러 간다는 것이다. 별 생각없이 차로 가기로 했다. 8시 출발이니 자정 무렵이면 서울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산장까지는 좀 늦긴 하겠지만 나쁘지는 않을 듯도 싶다.
“행님, 말씀 낮추시이소. 마, 사촌동생 친군데 말씀 높이믄 곤란하지예”
욱이라는 친구녀석은 재밌는 넘인 게 분명하다. 말도 걸쭉하고, 성격도 좋아보였다. 금방 친해졌고, 때로는 낄낄거리며, 때로는 박장대소하면서, 그렇게 왔다. 내가 장롱면허라 혼자 차를 모는 게 좀 힘들었겠지만, 내가 아는 동호회 후배 녀석들처럼 차를 개같이 몰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길이 생각보다 막히고 비도 내린다. 휴게소에서 좀 오래 쉰 영향도 있나보다. 서울에 들어오니 새벽 두 시가 넘었다. 구니는 내게 문자로 오늘은 집에서 쉬자고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비행기를 타고 왔어야 하는데 싶으면서도 또 그냥 그렇다. 욱에게 길을 일러 지름길로 신촌까지 몰고 왔다. 어차피 거기서는 차가 많다.
조심해서 가라고 보내고 택시에 갈아탔다. 이제 좀 쉬려나 싶은데, 아차차, 술을 두고 나왔다. 아까 짐이 많아서 발 밑에 내려놨는데 미처 보질 못했나보다. 동생한테 전화해서 우선 나중에 택배로 보내달라고 말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예정에 없이 일찍 왔더니 집에서도 좀 놀란 눈치다. 늘 그렇지만.
술 이야기를 했더니 당장 가서 찾으라고 한다. 멀 귀찮게 그걸 부산으로 다시 보내서 택배로 올리느냐며 어이없어 한다. 하긴 그도 그렇다. 내가 조금 더 귀찮으면 되는 것인데. 동생한테 전화를 넣고 택시로 고시원 앞까지 갔다. 녀석이 챙겨준 술을 들고, 잘 가라는 인사를 다시금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새벽 네 시.
naked가 내게 선물해준 ‘수줍은 마음’을 꺼내 보았다. 며칠 전 마사지해주던 발이 생각나서 눈물이 핑 돈다. 내가 너무 그를 귀찮게 했음에 틀림없다. 그녀 말대로, 이 그림은 액자를 잘 해서 주인을 찾아주어야겠다. 아울러 연말연시 바빴을 그와 그의 친구들을 귀찮게 했음에 또한 미안해한다.
혼자만의 여행을 좋아하는 건 내 의지대로 무언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을 몇 푼 쓰지 않아도 얻는 것이 많다. 누군가의 간섭이나 방해를 받지 않는다. 문득 우니구니의 부산 여행기가 생각난다. 그 때 같이 왔더라면 참 좋았겠다 싶으면서도 내가 돌아가자느니 머니 해서 아마 그 역시 짜증스러웠을 게다. 나 역시도 이런 식으로 예정없이, 여유있게 움직이는 게 편하다.
솔직히 이번 여행에선 쓴 돈이 조금 많았다. 하지만 전혀 아깝지 않다. 돈이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돈을 모으는 것은 최대효용을 얻는 순간 쓰기 위함이라는 것이 돌아가신 이모의 유일한 가르침이었다. 그런 원칙 아래, 이모는 이북에서 월남한 이모부와 함께 부산에서 수십억대의 재산을 굴리곤 했었다. 굳이 그 분의 가르침이 아니어도, 시간을 감안한다면 지금의 비용은 그리 아까울 게 없다.
단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시작한 여행이었고, 15년의 세월을 거슬러 핏줄을 찾았다. 어려울 때 함께 힘이 되어준 벗을 찾아 기꺼이 움직였다.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생겼고, 사람들에 대한 믿음도 더욱 강해졌다. 돈으로 셀 수 없는 것들을 너무나 많이 얻었다. 그거면 된 거다.
연말의 바쁨 속에서도 여행을 빛내주신
쥬쓰, 조작가, 미야오, 그리고 다른 두 분의 전공자분들께 다시금 감사를.
(그저 이름 못 외운 건 제 단기기억의 장애니 그저 용서하시고... ㅠ.ㅠ)
마음만큼이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을 가진 당신께 이 여행을 바치노니,
God Saves Nak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