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qi] Trib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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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qi ( Vote: 199 )

아마 1964년 즈음이었던 듯 싶다.

공화당 정권의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이라는 것이 터졌다.
<증권파동, 워커힐 파동, 새나라 자동차 파동, 빠찡꼬 파동>
4대 의혹사건은 군정시기의 대표적인 부정비리 사건으로,
이른바 '구악보다 더한 신악'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 바로 이 때다.
결국 초대 중정부장이었던 JP는 공화당 당의장 직을 내놓고
'자의반 타의반 외유'를 떠나게 되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1964년의 삼분(설탕, 밀가루, 시멘트) 파동에 뒤이은,
한국비료(당시 삼성 소유)의 사카린 파동,
쌀 파동, 연탄 파동, 물가 파동에 이르기까지.
민생 경제는 파탄 5분전이었다.

금융특혜, 철도화물 운임횡령, 국공유지 불하 사건.
사건과 비리는 끊이지 않았고,
조두형군 유괴니 박춘우 김하근 유괴니 살인마 고재봉 사건이니,
민생범죄가 기승을 부리면서 치안부재라는 말도 많았다.

와우아파트 붕괴, 산청 버스 참사, 천안 열차 충돌 등이 이어지면서,
이 나라는 사고 공화국이란 오명이 끊이지 않았고,
신금단 부녀 상봉같은 반가운 소식과 함께,
통일론 필화 사건 같은 시국사건도 연이어 계속되었다.

1960년대는 지금과 같은,
아니, 어쩌면 더욱 치열하고 격렬하였던,
말 그대로 '격동의 역사'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은,
당기에 새겨진 황소만큼이나, 참으로 그 인기를 오래도록 누렸다.
야당이 신민당, 민주당, 다시 신민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사분오열하는 속에서 YS/DJ와 유진산/이철승의 대결구도로 치닫는,
복잡다단한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과는 참으로 다른 노릇이었다.

아, 부정선거?
물론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으니,
이는 공화당에 대한 사람들의 감상이 이중적이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해방이 되고 미군과 함께 이 땅에 서구식 공화정이 들어오면서,
이 땅에도 정당이라는 것이 생긴다.
미 OSS의 지원을 받았던 임정의 김구, 김규식을 주축으로 한 한국독립당(한독당),
하와이에서 미국과 날카롭게 대립하였던 이승만이 주축이 된 한국민주당(한민당),
그리고 누구나 아는 박헌영 중심의 당시 가장 강력한 정당인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문제는,
가장 정치적으로, 대중적으로 지지세력이 컸던 건준의 여운형이 암살되고,
우익의 거목이었던 송진우 역시 암살당하면서,
남한의 정치가 혼란 일변도로 치달은 데 있다.

친일부역 혐의가 있는 동아일보 사주였던 인촌 김성수는,
우익세력을 결집하고 남로당에 맞서 한민당을 세운다.
덕분에 미국이 주축이 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안은,
동아일보의 오보로 소련의 작품으로 매도되면서 정치혼란은 극에 달한다.

몇 줄로 간단히 설명하기는 쉽지 않으나,
한독당은 김구, 김규식의 목숨을 건 평양행까지 시도하였음에도,
이승만과 김일성의 정치적 속셈 탓에 단정수립을 막는 데 실패하고 만다.
한민당은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져 분리주의자 이승만과 야합하고,
(단정수립이라고 교과서에서는 배웠을 것이다만, 같은 말이다.)

친일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한 이른바 반민특위는,
당시 정치권의 야합으로 인해 결국 1년 만에 식물인간 상태로 전락하였고,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에서 백범이 암살되면서,
임정과 한독당은 사실상 와해되고 만다.

한국전쟁 와중에서 벌어진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
이승만은 직선 대통령이 되는 동시에 한민당을 장악, 자유당을 만든다.
이 때 쫓겨난 사람들과 한독당, 그리고 기타 정치세력이 모여,
이 땅에 제대로 된 야당이라고 들어서는데, 그것이 민주당이다.

4.19로 자유당이 붕괴되었어도, 아주 없어졌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유당이 붕괴된 결정적 계기는 다름아닌 5.16.
군법재판을 통해 부정선거, 부정축재, 민족일보 사건 등이 처리되고,
정치활동 정화법을 통해 자유당 세력은 사실상 정치에서 배제된다.

민주당이 구파, 신파에 따라 분리되었다가 통합되었다가 하는 사이,
원로 정치인 중에서 남은 사람은 사쿠라 진산의 주인공 유진산.
이 시기 주목받은 인사는 반공투사 출신의 거물 이철승.
그리고 젊은 나이에 두각을 나타낸 YS와 DJ.

그러나 아무리 YS와 DJ가 날고 긴다 한들,
분명 민주당(신민당)에는 친일부역자들이 떡 하니 버티고 있고,
민족감정상 그들에게 표를 던진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노릇.

그런데 신당인 공화당은 2공화국 정권을 쿠데타로 들어엎은 군정인데다,
대통령 자신이 만주 군관 출신인 친일부역자 출신이 아니던가.
그런데 정작 정치인 가운데서는 친일혐의자가 상당부분 걸러져 있고,
JP, 이만섭 등 당시로서는 참신한 신진 정치인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자,
과연 당신이라면 누구를 찍으시겠는가?
봉투에 표가 움직이기엔, 정치판이 참 거시기했더랬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꿈이 있었다.
흰쌀밥에 고깃국 하는 이북식 경제재건 목표가 아니더라도,
4천년을 내려온 가난과 굶주림에서의 해방.
그것은 38 이남 사람들이 가진 모두의 꿈이었다.

꿈이 있었기에 일을 했고 공부를 했다.
돈이 있고 없고는 그 시절 젊은이들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살며 사랑했던 것이 그 시절 젊은이들의 코드.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정치도, 학교도, 세상도 숨막히게 하였을는지 모르지만,
'대학생'이라는 이름 하나면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이 나라 경제를 살리고 개인의 출세도 보장하는,
모든 것이 용서되는 모든 이들의 희망, 대학생.
뼈빠지는 우골탑에서의 뒤늦은 자유 속에서,
그들은 두려워했고, 조심했으나, 또한 즐겼다.

아, 그것은 참으로 기적이었다.

정치적으로 가장 답답하던 그 시절.
"대학가요제", "젊은이의 가요제", "해변가요제"의 존재는,
참으로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었다.

아름다운 노랫말과 서정적인 멜로디,
지금의 감수성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들의 노래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는지,
그것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80년대가 오다.

일단 한 번 와보시라는 극장식당 '무랑루즈', '초원의 집'과,
17시에는 싸우다가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돌아이들 앞에서도,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창작동요제'의 존재는 또한,
살아남은 이들에게 수많은 삶의 기쁨과 재미를 안겨주었다.

아, 그것은 또한 참으로 기적이었다.

문화 컨텐츠란 돈으로 만들 수 있는 경제적 재화요,
신해철과 서태지처럼 천재나 신기어린 이들이 아닌 이상,
BoA처럼 만들어진 제품을 즐겨야만 하는 이 시대에.

겉으로는 순진무구한 듯 웃고 있지만,
뒤에선 온갖 섹스 스캔들이 난무하는 이들을,
단지 연예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바보같이 즐겨야 하는데,

무엇보다 10~20대가 아니면 문화를 누릴 가치도, 자격도 없는,
문화적 정년이 이른바 38 따라지로 점점 올라가는 마당에,
먹고 살기 바빠서 그동안 잊고 살아왔더랬다.

백발에 주름이 무성해진 배철수가 10여년 만에 마이크를 잡고,
어느덧 아랫배 풍만한 아저씨들이 땀에 젖도록 노래를 하는데,
객석을 메운 아저씨 아줌마들이 무아지경이 되어 있는 모습은,
그 광경을 보면서 참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왜였을까?

아버지와 아들이 한 무대에서 보컬과 세션으로 공연을 하고,
객석에선 손을 꼭 잡은 채 노래를 부르는 노부부의 모습에,
새벽이 밝도록 잠을 이룰 수 없더라는 어느 분의 말씀이,
가슴에 사무치는 것은 또한 무엇이란 말인가?

한 달에 몇 건 올라가지도 않던 방송국 게시판에,
삽시간에 수백 건의 글이 올라가고,
당나귀에서 미친 듯 방송 동영상을 찾아 듣고 또 듣는,
그 아저씨 아줌마들의 반란을 과연 어찌 설명하란 말인가?

노래를 쓸 수도 없고, TV에서 노래할 수는 없지만,
이들의 노래를 그리워하며 기다리던 이들이 있었다.
단지 먹고 사느라 잠시 잊고 있었을 따름.

열정을 넘어, 시기를 넘어, 매너리즘을 넘어,
언제 어디서나, 그 때 그 자리 그대로인 듯,
혼신의 힘을 다 해 노래하는 그 모습 속에서,
삶의 무게에 허덕거리는 나는 한없이 가벼웠다.

그 멋진 아마추어리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코드가 내 몸에 더 잘 맞고 편안할 따름.

또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는 것 또한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난 반란군이 되리라 결심하였다.

비록 지금은 멀리 있으되,
적어도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리라 믿었다.
그 사람'들'이라면.

토요일(2/28) 저녁,
5.16 광장 부근에서 또 한 번의 반란이 있단다.
함께 할 수는 없지만 마음만큼은 활주로를 채우고도 넘치리라.

Trib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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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qi
왜 같은 글을 여러 게시판에 올리냐고 묻거든,
이곳에 올릴 정도의 글이라면
내 나름으로 충분히 생각하고 올리는 것이라는 점만 알아주길.

그리고 이 곳은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잖아.

 2004-02-28 11:5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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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11/06/1999 04:17:00
Last Modified: 02/27/2025 10: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