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꽃보다 아름다워

성명  
   Keqi ( Vote: 149 )

살이 에이는 밤. 새해 전날. 정류장에 도착했을때 택시가 없어서 할수없이 아버지가 차를 몰고 나오기로 했다. 정류장에 있는 개인 택시사무소에 있어야 할 택시들은 전부 어디론가 사라졌다. 비어있는 사무소에서 몸을 녹이려고 들어갔다. 이미 먼저 몸을 녹이던 50대의 사내가 티비와 창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요새는 일찍 시작하는지 10시도 안 됐는데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가 나왔다. 가족들이 전부 여 싸운다. 예의 배종옥과 한고은이 싸우고 가운데 어머니인 고두심이 말없이 그들을 말린다. 네가 그렇게 잘났니, 잘났어? 그들의 화제중심은 역시 아버지인 주현이다. 50대 사내가 벗겨진 이마를 잔뜩 찡그리다가 투덜댄다. 제기랄. 어떤 작가가 썼길래 저따위로 써... 가장들 병신만드는구먼... 나머지 소리는 중얼거려서 잘 들리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 사내는 그제야 돌아온 택시를 타고 들어간다. 드라마에서는 고두심이 할머니에게 욕을 먹는다. 이년아, 속마음을 말해봐. 고두심 할머니의 욕에 기어이 눈물을 붉힌다. 그럼 할머니도 생각해보세요. 딴 살림차리고 나간 남편의 여자에게 어떻게 그냥 밥을 줄 수가 있어요. 밥에 몰래 침이라도 뱉지 않고 어떻게 그냥 밥을 줄 수가 있냐구요. 근데 말할 수는 없어요. 저 못된 년 되잖아요. 말을 해. 그렇게 속에 담아두지 말고 말을 하라구 이년아.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는 고두심에게 다정스레 말한다. 본래 정신이 오락가락 하던 할머니가 이때만은 기억이 온전해 보였다.

친구가 노희경이 새로운 드라마를 시작했다고 알려줘서 1,2회를 보았다. 과 선배이기 때문에 생기는 호기심은 아니었다. 거짓말이나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같았던, 소위 '쓰러지게 만드는' 대사들을 기대한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요새 노희경은 그런 감성적이고 안타까운 대사보다는 가족간의 정을 더 보여준다. 그게 내게는 그다지 감동적이질 않았다. 재미나다며 오천만 국민의 반이 본다는 대장금도 안보는(내방에 티비가 없긴하지만 보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본다) 나에게 가족간의 정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아버지의 모습, 순종적이다 못해 비현실적인 고두심의 모습이 영 재미없었다. 그래서인지 3회 약간 본 이후로 더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귀찮아서기도 하지만.

택시 대합실에서 드라마를 보다가 창가를 바라보던 나는 그 50대 남자의 행동을 따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비슷하게 인상을 찌푸리기도 한다. 오랜만에 보아서 그런지 자꾸, 걸린다.
아버지의 낡은 트럭을 타고 집에 들어가는 길은 조용했다. 올해도 여전히 말은 없었다. 차에서 내린후에야 말을 꺼냈지만 트럭이 들어왔는데 목장문을 안잠그냐며 성화를 낸것 뿐이었다. '구제역상 관계로 통행금지'란 투박한 고딕체 간판이 대문에 매달려 삐그덕댔다.

올해는 고모 안오실거에요. 들어가면서 고개를 숙이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동생도 일때문에 안올거다. 올해는 세식구끼리 차례지내자.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난 허겁지겁 상에 차린 구운 만두와 부침개를 먹어치웠다. 안성까지 6시간이 넘게 걸릴줄은 몰랐고 배가 고팠다.
한참을 먹고 있는데 허기가 어느정도 가시기 시작했는지 그제야 차린 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은 제수를 만든 후 남은 부침개와 만두, 나물이었다. 내가 오기를 너무 오래 기다린 음식들은 전부 식었다. 그 음식 건너에서 어머니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 혼자 만드셨을 한상차림의 제수들과 상위에 차려진 음식, 그리고 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내 시선에 말없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고두심이 생각났다. 갑자기 내가 그 드라마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그 생각 이전에 눈물부터 났다.

본문 내용은 7,611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Post: https://achor.net/board/skk96/14432
Trackback: https://achor.net/tb/skk96/14432

카카오톡 공유 보내기 버튼 LINE it! 밴드공유 Naver Blog Share Button
Please log in first to leave a comment.


Tag


 14308   754   156
No
분류
파일
제목
성명
작성일
*공지    [Keqi] 성통회 96방 게시판 Keqi 2007/01/30
11363     [Keqi] 선택과 집중 Keqi 2003/08/09
11362     [공지] 2003년 A9반 송년회 안내 Keqi 2003/11/24
11361     [Keqi] 인경 누나의 편지 [2] Keqi 2003/11/27
11360     [Keqi] 부산 여행기 [1] Keqi 2004/01/04
11359     [Keqi] 우리은행장이 아들에게 주는 글 keqi 2004/03/03
11358     [Keqi] 사람들이 궁금해할 것 같아서 Keqi 2004/07/20
11357     [Keqi] 빠리의 연인 Keqi 2004/07/19
11356     [Keqi] Tribute [1] Keqi 2004/02/28
11355     [Keqi] 취하시게나 Keqi 2004/08/15
11354     satagooni판 부산 여행기, 희희희 (4336. 10. 1.) Keqi 2004/01/25
11353     [Keqi] 내가 탄핵에 반대하는 이유 [1] Keqi 2004/03/14
11352     [Keqi] 어느 점심무렵의 메신저질. Keqi 2004/04/19
11351공지    [Keqi] 내가 홈피를 업데하기 두려운 이유 [1] Keqi 2004/02/17
11350     [퍼옴] 이별, 37.5 Keqi 2004/05/02
11349     [Keqi] 생각 몇 가지 [3] Keqi 2004/08/21
11348     [퍼옴] 이것이 경영이다 Keqi 2004/08/01
11347     [퍼옴] 꽃보다 아름다워 Keqi 2004/04/29
11346     [Keqi] 연극유감 [3] Keqi 2004/09/02
11345     [Keqi] 카사블랑카 [2] Keqi 2004/09/09
    152  153  154  155  156  157  158  159  160  161     

  당신의 추억

ID  

  그날의 추억

Date  

First Written: 11/06/1999 04:17:00
Last Modified: 02/27/2025 10: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