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걸었다. 마치 아처처럼 졸다가 내려야할 정류장을 한참이나 지나쳐
생전 가보지도 못한곳에 내린 이유도 있었지만, 그냥 걷고 싶기에 걸었다.
도시의 '자유'가 느껴졌다. 잘 정비된 도로위를 질주하는 차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높은 아파트들, 그사이에 난 도로위를 난 내 의지로 걷고 있다.
눈밭위를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개들을 보았다.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
그개들에겐 미래란 없다. 그러기에 현실의 고통도 없다. 배만 부르면 그
것으로 끝인것이다. 그런 개들이 부럽다. 자.유.롭.게 뛰어 다니는 개들
이 부럽다. (1998/2/2)
천리행군 첫날,
힘든 하루였지만 아직까진 그럭저럭 할만하다. 전엔 행군을 하면 딴 생각
이 많이 났는데 오늘은 별생각이 나질 않는다. 이목정 휴게소란 간이 휴게
소 근처에서 하루밤을 잔다. 아직도 갈길은 멀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1998/2/17)
천리행군 6일째, 강원도 홍천군
발바닥에 물집이 많이 잡혔다. 종아리와 허벅지에도 통증이 온다. 발바닥
치료를 해야겠지만, 그럴수는 없을꺼 같다. 앞으로 4일 끝까지 버텨낼수
있을까? 신념의 흔들림, 아직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서울차들을 보
면서 집생각이 더욱더 난다. 아무래도 오늘밤은 많이 추울꺼 같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의 추위, 온몸이 떨린다. 상당히 고통스럽다. 손가락과 발가락
의 감각이 둔해진다. 몸에 저절로 힘히 너무 들어가서인지 가끔씩 호흡을
조절하면서 힘을 뺄때마다 쓰러질꺼 같은 현기증을 느낀다. (1998/2/22)
천리행군 7일째, 홍천근교
3일후면 천리행군도 끝이다. 기분이 별로인 하루였다. 빠른시일내에 발다
닥 치료를 해야할텐데, 이제 3일만 버티면 끝이다.
삶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가는것과 같다. 나는 삶의 축소판을 걷고
있는건가 (1998/2/23)
천리행군 9일째, 경기도 양평군
양평에 있는 음식점들과 커피숍,러브호텔들이 즐비해 있는 곳을 지나왔다.
오른쪽 발바닥이 많이 아프다. 물집이 그렇게 많이 잡힌것도 아닌데 아프다.
왼쪽발에 감각이 없다. 발바닥 껍질이 모두 벗겨져 걸레처럼 되었다. 피가
섞인 고름이 나온다. 이제 2일 남았다. 별생각은 없다. 산속에서 자는 것도
익숙해졌고, 밥을 해먹는것도 익숙해졌다. 깨끗하게 목욕하고 푹자고 싶다.
집에가면 할수 있겠지. (1998/2/25)
일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일년이란 시간이 지나면 오늘은 또 올것이다.
나는 강가에서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고 있다. 하류로 흐를수록 강은 점점
넓어지고 깊어진다. 더럽혀진 상류의 물도 언젠가는 저 깊고 넓은 바다로
흘러들어 희석돼 버리고 만다. 흐르는 강물처럼.. 바람이 많이 분다.
(1998/3/6)
용평에 다녀왔다. 스키장에서의 스키, 정말 탈만했다. 재미있었다. 괜찮아
보이는 여자들을 몇몇보았다. 민간인들과의 접촉, 군복을 입고 있는 내자신
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초라한 모습은 겉모습뿐만이 아닐것이다.
이쁜여자에게 끌리는건 여전하다. 내일은 사령관이 직접 방문해서 시범을
보인다. 내일 가장 위험한 코스를 탈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스릴 넘치는
무언가를 한다는건 묘한 매력이 있다. 목숨을 건다는거, 쉬운일이 아니기에
할만할꺼다. (1998/2/5)
섬득한 꿈을 꾸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느낌이 생생하였다. 일어나서 손목
을 만져 보았다. 너무나도 섬득한 꿈이였다. 뭔가 불안한 일이 생긴건가?
아직 확정된거 같진 않지만 믿을만한 소리를 들었다. 휴가를 갈수도 있을꺼
같다. 또 이러다가 갑자기 바뀌어서 못가게 되는건 아닐지..마음이 설래이면
서도 이상하다. 왠지 막상 나가면 어리둥절하고 낯설기만 할꺼 같다. 장기수
들의 석방전 기분이 이런것일까? 나가고는 싶지만 막상나가면.. freedom
(1998/3/5)
97-72003221 ..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매번 그랬던것 처럼 반갑게 반겨주었다. 영화를 보여
준다니 그녀가 보여준다고 말을 하였다. 뭐 넉넉하지 않은거야 그녀든 나든 마찬
가지가 아닐까. 난 내가 보여주고 싶었다. 후..돈이 뭔지 해줄수 있는건 모든지
해주고 싶은데..그녀의 집앞에서 그녀를 만났다. 예전처럼 항상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끊기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지만 입이 굳어서인지 마음대로 되진 않았다.
사실 영화따위는 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무슨짓을 하고 있는건지..
하여튼 극장엘 들어갔다.자리를 잡고 앉아 그녀의 어깨위에 손이라도 올리고
싶었지만 선뜻 그렇게 할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영화가 시작할 무렵이였다. 자기가 남자친구 있는
거 아느냐고 물어봤다. 난 그저 웃으면서 안다고 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는
상관없냐는 그녀의 말에 난 계속 뭐 별거 아니라는듯 웃기만 했다.
그녀도 황당해서인지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영화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나와서 스티커 사진을 찍었다. 뭐 이런식으로 추억을 남겨두는것도 괜찮은 거겠지.
저녁을 먹고 있는데 그녀가 내 자살시도 얘기를 꺼냈다. 알고 싶다는 것이였다.
난 그녀가 무엇이든지 물어보면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왠지 그얘기는 꺼내고 싶
지 않았다. 그녀가 내 과거를 물어보면 대답해 줄수 있었지만, 그날의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커피숍을 들어갔다. 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색한 얘기였지만
그래도 내가 기억하는한 모든 얘기를 들려주었다. 중간중간 그녀가 자신은 숨긴체
나의 얘기만을 듣고 싶어하는 면을 보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뭐 그런것이 중요
하겠는가. 난 모든 얘기를 해주었다. 솔직한 감정과 함께.. 어떻게 생각하냐는
내 질문에 그녀는 그저 모르겠다고만 대답하였다. 그녀의 집앞에서 그 그녀의 남자
친구라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극장안에서부터 계속 전화를 걸었던 그남자인거
같았다. 나에 대해서 조금 안다고 그녀가 말했다. 나를 지금 만나고 있는것도 알고
정말 화가 난거 같다고 걱정하는 그녀를 보면서..난 별다른 해줄말이 생각나질 않았
다. 그녀의 입에서는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던것이 더 좋았을 꺼란 말이 나왔다.
차마 나에게 이제 모든걸 끝내자는 말을 할수는 없는지 망설이면서 어쩔줄 몰라 하고
있었다. 난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그저 물흘러 가듯이 그렇게 생각하라고..
난 내 신념을 지키지 못하였다.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내 소유로 하고 싶었다. 한순간 일지라도..
아마도 이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시간이였겠지..얼마후면 난 다시 떠날테고, 예전
처럼 정신 없이 살아가겠지.. 뭐 그다지 심각해질 필요도 없고 고민할 필요도
없을것이다. 어차피 난 홀로 왔다가 홀로 가야하니까...
1998/3/30
또다시금 그녀가 떠나갔다. 아쉬움이 남는다면 그녀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것 같아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제와서 이런 생각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나는 절대,결코 그녀를 욕할 생각이 없다. 그녀가 어떤일을 하던지간에..
내친구 아처또한 나와 생각을 같이 해줄꺼라 믿고 있다.
나를 정말 좋아한다는 그녀의 말또한 믿는다. 나또한 그녀를 정말 좋아하기에.
그녀의 행복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