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아버지께서
"사회가 얼마나 험악한지도 모르고..순진한 놈"
이라고 자주 말씀 하시곤 했는데 그때는 정녕 몰랐다. 가끔 마음
이 안맞아 싸우기도 하고 상처를 주고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항상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렸으니까.
대학원에 와서 내가 배운건 전공지식이라기 보다 인간과 사회다.
세상엔 이런 인간도 있구나. 적어도 몇 달 같이 생활해 보지 않으
면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없구나.
우리 사회란 원래 이런 곳이었구나.
착하고 성실하고 똑똑하면 바보가 되는구나.
......
요즘 같은 연구실(다른 방에 있는) 선배한테 전화가 자주 온다.
공부를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사람. 인간성도 좋은 사람.
하지만..
상처받고 있다.
힘들어한다.
뻔뻔스럽게 그 형한테 자기가 맡은 프로젝트를 떠넘겨서 그 형 혼
자 몇 개나 되는 프로젝트를 하게 만드는 나이 많은 박사들이나,
일은 하나도 안하고 그렇다고 후배들이 일하는데 도움을 주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자기 영달을 위해 혼자서 논문만 쓰는 박사들이
나, 새로운 이슈가 생기면 자기가 공부할 생각은 안하면서 석사들
한테 세미나 시키는 박사들이나, 우리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전혀 모르면서 10개나 되는 프로젝트도 모자라 자꾸 제안서만 요
구하시는 교수님이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교수님께 직
언을 못 하는 우리나, 아무 개념도 없이 날라리 같은 대학원 생활
을 하면서 동료들 일을 늘리는 후배들이나..
모두가 싫어진다.
그나마 제대로 교육받았다는 인간들이 모여서 이런 작은 사회를
형성하고 있으니 학교밖의 큰 사회는 어떤 곳인지 안봐도 뻔하다.
몇 년째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까 말한 그 형이
몇 년만에 박사과정에 올라온 사람이다.
석사들어올 땐 아는 거 많은 완전한 학자스타일의 교수님께 반해
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들어오려고 하지만 2년지나면 모두 바보가
되어 공부를 접는다. 교수님이 갈궈서가 아니라(우리교수님은 공
부하나도 안하는 다른 방 교수님하곤 달라서 전공지식이 풍부하고
사람도 좋다.)
선배들이 휘어잡고 있는 연구실 분위기가 싫어서다.
그형은 이런 분위기를 바꾸려면 내가 진학해야한다고 날 설득하려
하지만.. 난 자신이 없다. 언제나 사회는 가진자의 것, 학교는 고
학번의 것이니까.
그나마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내가 하고 싶어하는 분야
와 비슷한게 유일한 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