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qi] 삐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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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만객기 ( Hit: 194 Vote: 14 )

드디어 내가 이용하던 N사의 서비스 폐지로 인해 내 삐삐도 이제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으니... 그간 이용료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부대에서 음성사서함만 쓰는 모험을
통해 지켜왔던 그간 5년간의 만남이 그저 허무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뭐, 이제
는 돈이 안 드는 인터넷 음성사서함을 이용하게 되어 통신료 부담이 조금 덜어졌다고
는 하나, 7개월 후부터의 연락처를 생각하면 그저 갑갑할 따름이다.

삐삐, 원래는 무선호출기, pager 혹은 beeper라고 말하는 이 물건이 우리 나라에 들
어온 건 1980년대 말이다. 당시 공무원이던 아버지께서는 회사에서 받은 이상한 녀석
을 들고 다녔고, 가끔 녀석이 이상하게 울면서 메시지가 뜨면, 아버지는 바로 전화를
하곤 하셨다. 모토로라라는 회사도 그 때문에 알았고, 녀석이 호출기였던 건 한참 뒤
에 알게 되긴 했지만...
초창기 호출기는 대개 군경 같은 특수한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이어서 음성사서함 기능도 없었고, 번호와 간단한 메시지만 뜨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마 대학생 이상이라면, 초창기 삐~ 소리가 난 후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끊어 메시
지를 남기던 그 어색한 삐삐에 대한 기억도 아련히 남아있을 것이다.

지금은 엄청난 기업이 된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에서 어느날인가 삐삐 01
2라는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했다는 광고를 대대적으로 한 바 있다. 탱크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모토로라 사의 (기종 이름을 잊긴 했지만...) 까만색 호출기는 많은 사람들에
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당시 초, 중, 고교에는 삐삐 휴대를 금지한다는 (지금은
이동전화 휴대를 금지하는지 솔직히 모르겠지만) 훈령 비슷한 것이 내려와 가방 검사
때마다 참 말도 아니었던 기억이 나고... 그게 아마 1993년 내지는 1994년이었던 걸
로 기억난다. 그래서 내가 수능시험을 치를 즈음, 반 아이들의 1/4 정도는 삐삐를 가
지고 있었다.
012에 이은 015 서비스가 지역 사업자(012가 전국이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
?) 방식으로 출범하고, 1995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인 삐삐 보급이 이루어지면서 몇년
동안은 정말 삐삐가 세상을 바꾸는 물건이 되었다. 서울의 어지간한 곳에는 공중전화
가 모자라서 아우성을 쳤고, 주말만 되면 종로나 강남 일대의 공중전화는 메시지를 확
인하려는 전화인파로 늘 붐볐다.
솔직히 이 시기의 삐삐가 인기를 끌었던 건, 음성사서함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남
길 수 있다는 것과, 세상 사람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들을 수 있다는 것(솔직히 그건
착각이다. 이 시절에도 도감청 얘기는 공공연히 보도되었다. 지금 이동전화 도감청
문제처럼. 예전에 공자께서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아니 세상에
서 다 아는 일인데 어찌 비밀이 있겠는가'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이 큰 메리트가
되었다.
거기에 지금 폰 문팅의 원조격인 문자 메시지 서비스(이 시절엔 그냥 말로 불러서
문자를 남겼다. 갑갑했던 시절... 또박또박 안 읽으면 그냥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더
랬다...)나 지금의 이동전화족들은 상상도 안 갈 광역 서비스의 등장이 얼마나 세상
사람들을 경악시켰던가!

내가 삐삐를 좋아하는 건 한 도수 통화동안 그렇게 할 말을 다 할 수 있다는데 있었
다. 하고 싶은 말, 할 수 있는 말을 다 해서 넣으니 얼마나 좋은가. 물론 그 시절 한
달 사용료는 좀 비싸긴 했다. 지금의 이동전화 기본 요금 정도 되지 않나 싶은데(11
000원 정도). 거기다 메시지 확인을 위한 전화요금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폰 요금 못지
않았던 듯도 싶다. 그 시절 내 한 달 전화요금은 어림잡아 전화카드만 60000원 정도였
던 걸로 생각되니까...
그래도 삐삐가 좋았던 건 그녀와의 메시지 교환. 1004같은 진부한 걸로 시작해서 세
상에서 가장 어쩌구 저쩌구 하는 숫자 메시지까지 만들어 서로 치곤 했었고, 메시지와
함께 녹음하는 음성사서함을 들으며 정말 행복해하던 기억을 생각하니 순간 내 마음
까지 다시 즐거워진다. 요즘이야 서로 전화 커플 서비스로 몇 시간씩 심야통화를 한다
지만, 가끔 쉬어가며 서로를 그리워 몸달아하던 것도 늘 전화하는 것과 다르게 묘한
매력이 있다. 사람을 사귀다 보면 다 안다. 사랑하느라 기다리다보면 정은 더 애틋해
지는 법.

요즘에 내가 준비하는 정보기기운용기능사 과목에는 전화의 발달과정이 나오는데,
이른바 발신전용 이동전화(CT-2, cordless telephone No.2) 얘기도 있다. 아마 기억할
거다. 1996년 말부터 나온다던 그 싼 전화. 물론 사업성이 없어서 일본이랑 프랑스에
서 이미 실패한 사업을 정통부에서 가격이 저렴해서 나름의 승산이 있다고 시작했다가
결국엔 적자 잔뜩 보고 폐기처분한 그 전화. 덕분에 공중전화마다 '한국통신 시티폰
. 가입전화 ***'하는 문구가 박힌 기지국을 간간히 볼 수 있기도 한.
이 시기가 삐삐의 최대 호황기이자 전락의 시초였다는 생각이 든다. 개나 소나 다
가지고 있던 삐삐가 전화도 된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삐삐조차 수신되지 않
는 곳이 있었을만큼 열악했던 통신 환경 속에서 참 세상 좋아졌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 어느새부턴가 사람들은 셀룰러나 PCS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확인할 필요 없이 바로
받을 수 있잖은가.
1997년 말부터 삐삐를 쓰는 사람이 급격히 줄었다고 기억된다. 연락처 만드는 게 굉
장한 고역이 되었던 시절이기도 하고. 시도때도 없이 바뀌는 연락처 덕분에 사람 관리
하는 것도 쉽지 않은 노릇이라 자위했었다. 나같은 사람은 정말 신기한 사람으로 치부
되기도 했었다. 한동안.

솔직히 다시 호출기를 쓸거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할 것이다. 광역 수신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문자서비스는 이용하게 될 것 같다. 전화가 훨씬 편한 걸 알긴
하지만, 나같이 여기저기 연락을 많이 주고받는 경우에는 그런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된
다. 나라고 전화가 왜 없겠는가마는 그건 정말 소중한 사람을 위해 써야 할 내 중요한
소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차라리 일상적인 연락을 위한 수단이라면 호출기가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물론 핑계겠지만, 별로 연락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의 문제도
있고. 호출기는 어찌됐든 씹어버릴 수 있잖은가. 다 들어보기는 하겠지만. 무엇보다
문팅이 대중화된 덕분에, 어차피 걸 전화는 텅 빈 공중전화를 쓰면 되고, 받을 메시
지는 문자로 받으면 그만큼 통신요금도 적게 나오고, 엄한 시간에 전화와서 낭패볼 일
도 없고, 귀찮게 잃어버려서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도 작용하긴 했
다.

사람들은 호출기를 실패한 서비스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적어도 그건 죽은
서비스라기보다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통신서비스의 퇴장은 아닐런지. 1994년 정도부
터 시작해서 7년간을 버텼고, 아직 많은 회사가 호출기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설령 민
간사업자가 다 없어진다손 치더라도 호출기가 필수인 병원이나 군경같은 특수집단은
처음에 그랬듯이 여전히 호출기를 쓸 것이다. 아직까지 건재한 012나 일부 015를 봤을
때도 그렇고.
이제 호출기 기계를 어떻게 할까? 웬만하면 정든 기계니까 그냥 쓰고 싶긴 한데 문
자수신 기능이 없어서 아마도 좋은 시계 정도로 만족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참 오랫동안 잘 썼다.

4333.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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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2/26/2009 00:56:26
Last Modified: 08/23/2021 11:46:44